편집자칼럼


하나님의 도성 읽기(4) 1권 16-28. 자살은 살인로서 어떤 형태의 살인은 부당하다.

고경태 | 2023.05.27 22:23

I권 16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에서 부녀자들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에, 기독교는 정결의 상태로 평가하지 않고 교제와 위로의 문제 더 관심을 갖도록 했다. 불가항력적 피해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받은 상태에 수치심을 부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7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처녀들이 이러한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죄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또한 범죄 앞에서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하는 것은, 죄인이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며 자신이 더 큰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18절.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덕목은 모든 “악을 참아내는 인내”에 있다. 비록 육체의 순결이 짓밟혔을지라도 정신적 순결이 유지된다면, 육체의 순결이 잃지 않았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절. 로마의 귀부인인 루크레티아의 자살이 칭송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로마법에서 아무리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재판 없이 처형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루크레티아는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을 살해했는데 칭찬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루크레티아와 같은 일을 당했지만, 동일한 결정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 안에, 양신의 정결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20절. 자살은 살인의 한 유형이므로, 계명(6계명)을 지켜야 한다.

21절.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은 경우는, 사람에게 부여된 특수한 명령에 의한 행동이다. 위임된 상태에서 실행한 행위는 죽음에 대해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그 행동은 범죄가 아니라 순종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사기의 입다가 실제로 자신의 딸을 제물로 드린 것으로 해석하며, 정당한 살해로 본다.

* 이러한 원리 - 위임된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한 행위 - 를 주장한 사람이 파시스트 아이하만(Eichmann's crime)이다. 한나 아렌(1906~1975)는 재판 과정을 정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에서 그의 범죄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재판정에서 검사는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당신의 범죄는 양심에 따라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당시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평범하고 성실한 악인",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가 유죄인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대인 학살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무사유의 죄'이다.

22절. 자살이 정신력의 강함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견유학파는 자살을 인정함). 오히려 불행을 참음은 것이 더 큰 정신력이다.

23절. 케사르에 패배한 카토는 자살하면서, 자신의 아들은 살려주어 일관성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24절. 욥은 고난을 참으려고 했다. 레굴루스는 카토와 달리 카르타고의 포로가 되어 견뎌, 로마의 영웅이 되었다. 또 대승리 후에도 검소한 생활로 타락의 길에 서지 않았다.

25절. 육체가 죄에 굴복되었을 때에, 또 장래에 일어날 죄를 피하기 위한 자살도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소망하며 의지해야 한다.

26,27절. 자살은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어떤 형태도 자살은 허락되지 않는다.

28절. 폭도의 만행이 허락되어도 심판은 피할 수 없다. 교만에 구원은 없다(고전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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