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이신칭의: 똥통 (?) 에서 피어난 놀라운 은혜의 깨달음

신동수 | 2021.01.12 03:40
"마침내, 밤낮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묵상을 하는 중에, 나는 ... 하나님의 의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 주어짐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 그 때서야 나는 내가 완전히 거듭났다고 느꼈고 활짝 열린 문으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루터, 그의 전집 서문에서)
위의 구절은 루터가 죽기 일년 전 1545년 그의 라틴어 전집의 서문에 자서전 형식으로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소위, "루터의 회심 (거듭남) 경험"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신칭의 -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 의 사상은 중세신학으로 부터의 돌파구 (breakthrough) 를 열고, 종교개혁 시대를 활짝 여는 사건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깨달음이요, 발견입니다.
물론, 루터 이전의 기독교 신학자들도 모두 - 초대 교회의 대표인 어거스틴으로 부터 중세 카톨릭의 대표인 아퀴나스까지 -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천명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깨달은 이신칭의는 이전 세대 신학자들과는 다른 매우 참신하고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는 아무런 의 (공로) 를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우리 바깥에서 (extra nos) 부터 오는 의, 그것이, 우리를 위한 (pro nobis) 은혜로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철저히 우리 바깥으로 눈을 돌려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에 그로부터 우리를 위한 의로움과 구원이 임한다는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이전 세대 신학자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한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어거스틴은 이신칭의를 말했지만,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becoming righteous) 입문으로서의 신자의 의였고, 아퀴나스의 이신칭의도 공로 (merit) 사상과 뒤엉키면서 인간의 의가 되었습니다. 루터의 스승의 스승이었던 가브리엘 비엘이나 유명론 학자들에게 어떤 종교적 행위가 공로가 되느냐는 논의는 중세말 스콜라 신학의 화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가 돌파구로서 발견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나 공로나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없고, 또,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은혜와 의를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서 눈을 돌려 우리 바깥 (extra nos) 에서 부터 우리를 위해 (pro nobis) 임하시는 그 의와 공로를 받아들일 때 살게 된다는 이 청천벽력 같은 깨달음은 초,중세 교회와 종교개혁 교회를 가르는 홍해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 깨달음입니까? 더 이상 나를 개조하려 하거나 선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누리게 되는 구원, 거듭남, 그리고 천국의 기쁨. 이것이 루터 이후 500년간 개신교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루터의 이 돌파구, 이신칭의의 깨달음이 그가 수도원의 옥탑방에 오르는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알려진 돌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깨닫게 된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낭설 입니다. 아마도, 루터의 깨달음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후대 사람들의 꾸밈인 듯 합니다.
사실, 루터가 이 사건이 일어난 진짜 배경을 말하는 언급이 그의 Table Talk (자신의 제자들을 모아 식사와 맥주를 마시며 나누던 대담 모음집) 에 나타납니다. 1532년 경, 그는 제자들에게 이신칭의의 깨달음을 말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Dise Kunst hatt mir der Spiritus Sanctus auf diss Cl[oaca]. eingeben" (no. 1681, 1532) - 성령께서 이 변기통에 앉아있는 내게 찾아오셨다.
루터 학자들에게 심심풀이 이상의 논란이 되고 있는 이 구절은, 그의 이신칭의의 깨달음이, 사실, 수도원의 똥통 (cloaca) 에서 피어난 성령의 역사라고 읽게 합니다.
젊은 루터가 가졌던 고질적인 변비는 잘 알려진 바입니다. 그는 하루 중 오랜 시간을 변기통에 앉아 있어야 했고, 그 때마다, 그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되뇌이고 묵상하는데 할애 했을 것입니다. 그가 기나긴 답답함과 고통의 변비를 뚫고 감격적인 돌파구를 경험하는 그 순간, 중세의 기나긴 답답함과 고통의 공로 신학을 뚫어 버리는 이신칭의의 깨달음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유쾌, 상쾌, 통쾌한 이신칭의의 유산이란 말입니까? 루터가 가져 온 이 종교개혁의 정수, 이신칭의의 깨달음과 돌파의 능력을 우리 개신교인들 모두가 마음껏 누리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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