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회피하고 싶은 시한폭탄―부채
회피하고 싶은 시한폭탄―부채
경제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그에 관계된 용어도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적 파고와 혼돈을 온몸으로 겪은 50대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왔고, 나름의 책과 자료를 통해 주먹구구식으로라도 원인과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온 부분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사견일 수 있고, 전문적인 분석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각에서 개인적 분석을 러프하게 이야기하자면 한국경제와 산업구조의 왜곡은 길게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에 대한 사후정리와 후유증의 기반에서 정부와 미 원조 속에서의 재벌의 탄생, 고도성장에서 벌어진 기형적 경제구조가 생성되었다. 이후 90년대 말 연착륙실패로 결국 IMF관리와 그 요구를 받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급격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편입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인한 지금의 양극화 현상의 기반과 출발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예상보다 빠른 IMF 관리체제의 졸업이란 성과는 거두었지만 단기적 경제회복을 바라는 기업과 국민들의 바람과 압력은 카드남발과 부채확산이라는 악순환적인 마약중독 같은 상황을 낳고 말았고, IMF 체제 속에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이들의 삶의 몰락과 각 기업계층간의 계급화는 현 우리나라의 경제와 사회 문제의 어두운 그림자와 불안한 요소의 기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계속되는 단기적 경제처방과 정치권력보다 어떤 면에서는 강해진 재벌들의 힘 속에서 기업의 계급화와 각 계급 속에서의 또 다른 서브 양극화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영향력 속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중하위 계층들의 부채수준은 심각해진 상태이며, 이 위기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를 이미 익히 이전 정권들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차기 정권으로 폭탄돌리기를 하는 모습이 있어 왔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 그에 상응하는 고통수반과 치료과정이 필요한데 고통과 그 과정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정권들은 그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으려 단기적 경제처방으로 근본적 처방과 해결을 회피하곤 했다. 문제는 결국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권도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려고는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쌓여온 적폐와 왜곡된 시스템, 그리고 억눌려졌던 불만과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옴으로써 이것을 조율하고 풀어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구조의 근본적 문제들을 풀어감에 있어 한 커다란 요소 중 하나는 빚, 곧 부채라는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이 지구에 자리한 이후 계속 벌어진 화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IMF 체제 이후 우리나라의 가계경제에 쌓여가는 부채문제는 심각한 수준인데 이 문제를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고민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이에 대한 대응논리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방안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랜드래피즈 보고서에서 존 스토트가 지적했듯이, 인명 사고가 많이 나는 도로에서 그저 구급차나 구급함, 인명구조요원을 두는 것은 사고난 사람들을 돕는 데는 도움은 되지만 근원적 해결책은 아니다. 왜 이 도로에서 사고가 많이 나는지 살펴야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횡단보도를 만들던지 신호등을 만드는 것이 사고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 것처럼 길게는 인류역사를 괴롭혀왔던 부채, 짧게는 지금 우리 사회의 쓰나미같이 우리를 위협하는 부채를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부당한 빛 정당한 빚‘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보던 부채를 새롭게 바라보고 분석하도록 돕는다. 안일섭 교수가 쓴 이 책은 저자보다는 역자로 인해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 책과 약간의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기업의 컴플라이언스라는 주제로 여러 권을 번역했던 역자 노동래는 금융계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아 왔기에 이 컴플라이언스가 우리 시대 기업에 필요할 것이라는 사명감으로 사회에 필요하지만 수지는 맞지 않을 책들을 번역하는데 상당한 힘을 쏟아왔고, 그 책을 같은 사명의식으로 연암사라는 출판사에서도 그 출간에 동역해왔다.
이번 ‘부당한 빚 정당한 빚’도 역자가 번역한 이전 책들처럼 사실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닐 수 있었다. 분명 필요하고 고민해야 할 주제이지만 정작 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고 이 문제는 교회를 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풀어가고 고민해야 할 숙제인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부채를 도덕적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인식의 전환을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이것은 카드회사나 저축은행, 대부업체 등에서 현혹적이고 자극적인 광고말미에 과도한 소비나 대출은 가계경제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의 문구를 아주 작은 표시로 담아내는 것 같은 것처럼 돈을 빌리는 이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경제 구조 속에서 부채를 재인식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저자는 과거에 부채를 선물경제라는 관점에서 보았음을 지적하고 또 이 선물이라는 관점은 이후 해결방법에서도 나타난다. 성실하게 살아오고 최선을 다했지만 가진 자나 금융 쪽에 유리한 경제 시스템 속에서 결국 빛의 재생산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빌리는 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낳고 있는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저자는 도덕적 차원의 접근을 제거함으로써 부채는 윤리와는 무관하게 바라보도록 했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양산시키고 그 환수에 있어서도 무자비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도덕성이 결여된 부채는 그 환수와 후유증으로 인해 비윤리적 행동 및 사회악들이 발생되었음을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개인에 대한 부채환수는 무자비하게 이루어지고 경제적 약자 국가들의 부채에 대한 과도한 공격으로 그 나라가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반면 정작 금융사기나 금융파산 등 대형 사고가 터질 때 그에 대한 책임에서는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비윤리성이 드러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는 몇 가지 종교적 접근을 시도한다. 그것은 앞서 저자가 지적했듯 부채는 도덕적 관점에서 고찰해보아야 해결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슬람 경전에서 말하는 교리를 통해 이슬람자본을 통해 행해지는 이슬람 금융을 조명해본다. 이슬람의 교리가 반영되었다고 말하는 이슬람금융을 실제 이슬람학자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부채나 금융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있어서의 장점과 문제점들을 지적한다―이슬람 금융을 이슬람 포교나 세력 확장으로 보는 교계의 관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록 타종교라 하더라도 좋은 점을 흡수하고 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편으로 여기고 살펴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유대교의 희년 윤리를 통해서 이러한 시각이 어떻게 부채를 인식하고 풀어갈 수 있을지를 살펴본 후에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 미덕 부채 윤리를 제시하면서 절제, 관대함, 용기, 감사라는 덕목을 통해 부채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시도를 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우리들에게 당장의 부채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일차적인 이득은 현대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은연중에 물들어 있고 갚을 수 없는 부채문제를 빌리는 자의 게으름과 도덕적 결여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를 깨뜨려준다는 것일 게다.
앞서 역자가 돈이 안 되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데 힘쓴다고 했는데 사실 이 책도 책의 가치와 중요성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인물이었지만 그보다는 주목받지 못한 듯했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 시대의 경제적 대안으로 주목받는 헨리 조지마냥 저자의 ‘부당한 빚 정당한 빚’은 우리가 주목하고 연구해 볼만한 중요한 책이다. 그리고 아직은 총론적이고 개략적이기에 좀 더 이 시대의 부채문제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대안들을 후속작에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