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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당신이 사랑하는 우상들을 깨뜨려라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마이클 호튼/운석인/부흥과개혁사/[권지성]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의 신작 ‘The Law of Perfect Freedom’은 우리들에게 잊혀진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기신 율법의 대헌장인 십계명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다시 되살렸다.
그는 ‘미국제 복음주의 경계하라’,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를 통해 미국 교회 내에 숨어 있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과 영지주의로 세속화 되어 버린 미국 교회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함께 내어 놓는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갈 것, 그리고 성례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본주의적인 생각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기독교 핵심 구원관을 해설한 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는 참된 성경적인 교리의 회복이 있어야 함을 늘 부르짖는다. 우리의 시대에 그와 같은 특이한 독설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숨김이 없이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안팎의 문제들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힘이 있다.
십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적되는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미국이 진리를 말하던 날’에 나타난 데이터는 우리가 얼마나 십계명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말씀을 어기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냉혹한 서부 시대가 다시금 미국을 엄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휠씬 더 거칠고 난폭하다. 당신은 이 국가의 법이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1990년대에는 그 어떤 확실한 도덕적 합의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말 그대로 자신만의 개인적 도덕률-자신만의 십계명-을 만들고 있다. (P.21)
율법이라는 도구로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꼬집어내는 것이 이 책의 전부라면 착각이다. 그는 율법이 어떻게 복음을 더욱 복음으로 드러내는 지를 이 책을 통해서 보여준다.
복음으로 달려가게 하는 율법의 참 정신
율법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여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공개하고 지적한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과 아픔이 먼저 불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만 십자가의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부흥 시대의 탁월한 설교가들에게 있었던 목표의식은 회중들이 더욱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사악함을 알려 주는 것은 바로 율법의 기능이다. 한국 교회의 강단은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말씀의 증거에 그치는 율법주의자와 값 싼 복음만을 판매하려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회중들의 율법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무엇이 죄인지 죄가 아닌지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양심이 화인 맞고 무디어진 것이다. 세상 정신과 썩어빠진 물질주의의 속물 근성이 우리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율법의 선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지 아니한다면 십자가는 싼 값에 팔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회중들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죄악을 알려주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그래서 지옥에 내려가기에 마땅한 자와 같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십자가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율법이 없이 마음의 양심을 가진 이방인들에게도 위대한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려 주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며 신학적인 용도가 바탕이 되어야 그것이 기독교의 참된 윤리의 정신이 되어서 사회적인 순 기능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범죄의 만연의 근본적인 요소에는 이렇듯 기독교의 가장 가본적인 십계명의 정신이 무너진 이유가 크다고 하겠다. 이렇게 저자는 10가지 계명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방식들로써 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우상숭배란 무엇인가에서는 제 1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에 대해서 다룬다. 저자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바로와 애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현대인이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상’이라고 부르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좋은 선물은 그 선물 자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늘 아버지께 감사의 시선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P. 52)
‘선물은 기쁨과 희락의 원천이지만, 우상은 구원이 아닌 파멸로 끝난다.’ (P.53)
출애굽 당시의 농업과 연희와 정치와 사랑과 전쟁의 신들이 있었던 것처럼, 현대의 불신자들과 신자들까지도 과학문명과 철학과 신비주의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각양 좋은 일반 은혜의 선물들을 우상으로 바꿈으로써 그것들을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이 계명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명령이며 약속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기 의,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를 바탕으로 하여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 무엇이 우리의 우상인가? 돈, 섹스, 권력, 성공은 우리의 분명한 우상이다. 이것은 불신자에게 해당할 뿐만 아니라, 원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취 나고, 소름 끼치는 추악한 내면의 본성이다. 더 위험한 우상을 숭배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우상을 밝혀내기가 더 힘든 법이다. 믿음을 믿는 믿음은 ‘믿음’이라는 신념 체계 자체를 하나의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에 자기를 계시한 참 신이신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이나 사물을 믿는 믿음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가치 있고 고상한 것을 믿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P 59)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삶의 전 영역에서 인간을 주요 대상으로 삼게 된다……. 나는 그런 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는다.’(P. 59)
체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그 자체와 그 분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상대적인 체험에 더욱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우상이 된다. 자아와 행복을 믿는 믿음은 또 다른 하나의 우상 숭배이다.
“인간은 종교의 중심에 남게 되며, 하나님은 심판자와 구원자라기보다는 인간의 도우미에 불과하다.”(P. 68)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기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인가?’(P. 69)
얼마나 많은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문화 다원주의는 종교 다원주의로써, 우리의 시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Melting Pot과 같이 모든 것을 섞은 문화와 같이 기독교의 진리를 비 진리와 타종교의 진리와 가치와 동일하게 바라보려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배타적인 분으로 자신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못 박으셨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하여 불화가 발생하며, 가족이 분열할 것이며, 자신은 검을 주실 것이라 하셨다. 즉, 배타적이지 않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그러나, 이 계명은 유대인이 믿는 동일한 십계명의 1계명과는 다르다.우리는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신 독생자로써 나타나신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이신 한 분 이시며, 3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나 자기 의나 물질이나 철학이나 이방 종교 따위는 구역질 나는 현대의 우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율법이자 복음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캠퍼스에 그리고 조국의 교회가 이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고, 이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제 2계명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계명을 어기는 것인데, 결국 인간 중심적인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소비자 중심적인 예배를 원하는 시대에 교회의 모습은 그들이 원하는 예배의 방식을 좇고 있다. 로버트 슐러는 “인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이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자기 중심적인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며 평안하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더 이상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상상력을 동원한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 신앙으로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거나 적어도 신을 통제해 자기 생애에 대한 권한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다.”(P92)
미술과 예배 역시 문제시 된다.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는 무엇에 의해서 감동을 받기 때문에 미술이라는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더 좋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것처럼,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설교 강단은 TV 토크쇼와 시트콤의 재미와 유머와 경쟁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야 말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TV 설교나 전도와 같은 매체들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설교자의 이미지를 하나님과 대체하게 만든다. “중세 시대 농부가 기적을 연출하는 ‘접촉점’인 성자의 초상화나 유품에서 느끼던 미신적인 유혹과 스크린에 손을 얹으라고 말하는 TV설교자의 영상에서 현대 시청자가 느끼는 유혹을 견주는 것은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P100)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깨어지면 믿음도 두 동강이 난다. 나 역시 이러한 이후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집에 교회를 다닌 후에 우환이 많이 생긴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했다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정도였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성례와 말씀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 분을 예배하며, 오직 그 분이 계시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만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써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이다. 자신을 예배하거나, 자신이 세운 이미지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영상 매체나 미디어를 예배하는 잘못된 우상들을 파기하고,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만을 예배하는 것이 잘못된 예배를 벗어나 참된 예배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3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는 방식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나의 도우미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신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게 만든다. 위선적이며 오류와 신성 모독은 모두 3계명을 어기는 것에 해당된다. 함부로 불려지고 훼손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되고 영광을 받으셨다. 그 이름은 마지막 날에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제 4계명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저자는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제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우리의 이웃의 여러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이다. 5계명에서는 젊은 지상주의와 현재 지상주의, 그리고 허세주의와 자기 지상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것은 가정 생활에서 부모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반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6계명에서는 살인의 문제를 낙태와 노숙자, 기아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미움이라는 간접 살인의 문제로 확장하여 타인을 향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들을 향한 참된 사랑과 기쁨을 나누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제 7계명에서는 간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결혼과 가정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며, 8계명은 청지기로써 어떻게 맡기신 물질을 다루며, 직장에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다하는 것이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 9계명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며, 살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제 10계명에서는 현 시대의 탐욕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물질주의에 물든 그리스도인들을 질책하며, 이것이 우리들이 만들어낸 우상이며, 이러한 물질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촉구한다.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문제들의 대안들로써 내어 놓는 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의 그 모든 것들을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이 칭의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하는 것을 즐겁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성화에 까지 이를 것을 저자는 말한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형상이 더욱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화의 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구원 받으면 ‘끝’이고 이제는 죄 짓고 살아도 ‘OK’라는 생각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만큼 성화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구원의 내용은 곧 성화를 포함한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온전한 내용은 성화를 포함할 때에야 온전히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은혜로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율법의 정신을 현대의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 종교를 믿는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다시금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으로 그에게 달려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저자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
국제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활동
옥스퍼드 대학교의 윌클리프홀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 기독개혁연합의 설립자이자 회장
현,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의 신작 ‘The Law of Perfect Freedom’은 우리들에게 잊혀진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기신 율법의 대헌장인 십계명을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다시 되살렸다.
그는 ‘미국제 복음주의 경계하라’,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를 통해 미국 교회 내에 숨어 있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과 영지주의로 세속화 되어 버린 미국 교회의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함께 내어 놓는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갈 것, 그리고 성례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본주의적인 생각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기독교 핵심 구원관을 해설한 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는 참된 성경적인 교리의 회복이 있어야 함을 늘 부르짖는다. 우리의 시대에 그와 같은 특이한 독설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숨김이 없이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안팎의 문제들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힘이 있다.
십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적되는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고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미국이 진리를 말하던 날’에 나타난 데이터는 우리가 얼마나 십계명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말씀을 어기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냉혹한 서부 시대가 다시금 미국을 엄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휠씬 더 거칠고 난폭하다. 당신은 이 국가의 법이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1990년대에는 그 어떤 확실한 도덕적 합의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말 그대로 자신만의 개인적 도덕률-자신만의 십계명-을 만들고 있다. (P.21)
율법이라는 도구로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꼬집어내는 것이 이 책의 전부라면 착각이다. 그는 율법이 어떻게 복음을 더욱 복음으로 드러내는 지를 이 책을 통해서 보여준다.
복음으로 달려가게 하는 율법의 참 정신
율법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여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공개하고 지적한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과 아픔이 먼저 불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만 십자가의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부흥 시대의 탁월한 설교가들에게 있었던 목표의식은 회중들이 더욱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사악함을 알려 주는 것은 바로 율법의 기능이다. 한국 교회의 강단은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말씀의 증거에 그치는 율법주의자와 값 싼 복음만을 판매하려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회중들의 율법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무엇이 죄인지 죄가 아닌지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양심이 화인 맞고 무디어진 것이다. 세상 정신과 썩어빠진 물질주의의 속물 근성이 우리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율법의 선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지 아니한다면 십자가는 싼 값에 팔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회중들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죄악을 알려주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그래서 지옥에 내려가기에 마땅한 자와 같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십자가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율법이 없이 마음의 양심을 가진 이방인들에게도 위대한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려 주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며 신학적인 용도가 바탕이 되어야 그것이 기독교의 참된 윤리의 정신이 되어서 사회적인 순 기능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범죄의 만연의 근본적인 요소에는 이렇듯 기독교의 가장 가본적인 십계명의 정신이 무너진 이유가 크다고 하겠다. 이렇게 저자는 10가지 계명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방식들로써 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우상숭배란 무엇인가에서는 제 1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에 대해서 다룬다. 저자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바로와 애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현대인이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상’이라고 부르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좋은 선물은 그 선물 자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늘 아버지께 감사의 시선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P. 52)
‘선물은 기쁨과 희락의 원천이지만, 우상은 구원이 아닌 파멸로 끝난다.’ (P.53)
출애굽 당시의 농업과 연희와 정치와 사랑과 전쟁의 신들이 있었던 것처럼, 현대의 불신자들과 신자들까지도 과학문명과 철학과 신비주의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각양 좋은 일반 은혜의 선물들을 우상으로 바꿈으로써 그것들을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이 계명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명령이며 약속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기 의,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를 바탕으로 하여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 무엇이 우리의 우상인가? 돈, 섹스, 권력, 성공은 우리의 분명한 우상이다. 이것은 불신자에게 해당할 뿐만 아니라, 원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취 나고, 소름 끼치는 추악한 내면의 본성이다. 더 위험한 우상을 숭배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우상을 밝혀내기가 더 힘든 법이다. 믿음을 믿는 믿음은 ‘믿음’이라는 신념 체계 자체를 하나의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에 자기를 계시한 참 신이신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이나 사물을 믿는 믿음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가치 있고 고상한 것을 믿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P 59)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삶의 전 영역에서 인간을 주요 대상으로 삼게 된다……. 나는 그런 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는다.’(P. 59)
체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그 자체와 그 분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상대적인 체험에 더욱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우상이 된다. 자아와 행복을 믿는 믿음은 또 다른 하나의 우상 숭배이다.
“인간은 종교의 중심에 남게 되며, 하나님은 심판자와 구원자라기보다는 인간의 도우미에 불과하다.”(P. 68)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기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인가?’(P. 69)
얼마나 많은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문화 다원주의는 종교 다원주의로써, 우리의 시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Melting Pot과 같이 모든 것을 섞은 문화와 같이 기독교의 진리를 비 진리와 타종교의 진리와 가치와 동일하게 바라보려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배타적인 분으로 자신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못 박으셨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하여 불화가 발생하며, 가족이 분열할 것이며, 자신은 검을 주실 것이라 하셨다. 즉, 배타적이지 않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그러나, 이 계명은 유대인이 믿는 동일한 십계명의 1계명과는 다르다.우리는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신 독생자로써 나타나신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이신 한 분 이시며, 3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나 자기 의나 물질이나 철학이나 이방 종교 따위는 구역질 나는 현대의 우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율법이자 복음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캠퍼스에 그리고 조국의 교회가 이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고, 이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제 2계명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것 역시 계명을 어기는 것인데, 결국 인간 중심적인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소비자 중심적인 예배를 원하는 시대에 교회의 모습은 그들이 원하는 예배의 방식을 좇고 있다. 로버트 슐러는 “인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이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자기 중심적인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며 평안하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더 이상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상상력을 동원한 예배가 잘못된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 신앙으로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거나 적어도 신을 통제해 자기 생애에 대한 권한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다.”(P92)
미술과 예배 역시 문제시 된다.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는 무엇에 의해서 감동을 받기 때문에 미술이라는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더 좋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것처럼,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설교 강단은 TV 토크쇼와 시트콤의 재미와 유머와 경쟁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것이야 말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TV 설교나 전도와 같은 매체들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설교자의 이미지를 하나님과 대체하게 만든다. “중세 시대 농부가 기적을 연출하는 ‘접촉점’인 성자의 초상화나 유품에서 느끼던 미신적인 유혹과 스크린에 손을 얹으라고 말하는 TV설교자의 영상에서 현대 시청자가 느끼는 유혹을 견주는 것은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P100)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깨어지면 믿음도 두 동강이 난다. 나 역시 이러한 이후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집에 교회를 다닌 후에 우환이 많이 생긴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했다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정도였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성례와 말씀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 분을 예배하며, 오직 그 분이 계시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만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써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이다. 자신을 예배하거나, 자신이 세운 이미지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영상 매체나 미디어를 예배하는 잘못된 우상들을 파기하고,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만을 예배하는 것이 잘못된 예배를 벗어나 참된 예배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3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는 방식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나의 도우미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신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게 만든다. 위선적이며 오류와 신성 모독은 모두 3계명을 어기는 것에 해당된다. 함부로 불려지고 훼손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되고 영광을 받으셨다. 그 이름은 마지막 날에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제 4계명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저자는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제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우리의 이웃의 여러 사람들에게 대한 계명이다. 5계명에서는 젊은 지상주의와 현재 지상주의, 그리고 허세주의와 자기 지상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것은 가정 생활에서 부모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반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6계명에서는 살인의 문제를 낙태와 노숙자, 기아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미움이라는 간접 살인의 문제로 확장하여 타인을 향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들을 향한 참된 사랑과 기쁨을 나누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제 7계명에서는 간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결혼과 가정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며, 8계명은 청지기로써 어떻게 맡기신 물질을 다루며, 직장에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다하는 것이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 9계명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며, 살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제 10계명에서는 현 시대의 탐욕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물질주의에 물든 그리스도인들을 질책하며, 이것이 우리들이 만들어낸 우상이며, 이러한 물질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촉구한다.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문제들의 대안들로써 내어 놓는 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의 그 모든 것들을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이 칭의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하는 것을 즐겁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성화에 까지 이를 것을 저자는 말한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형상이 더욱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화의 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구원 받으면 ‘끝’이고 이제는 죄 짓고 살아도 ‘OK’라는 생각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만큼 성화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구원의 내용은 곧 성화를 포함한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온전한 내용은 성화를 포함할 때에야 온전히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은혜로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율법의 정신을 현대의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 종교를 믿는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다시금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으로 그에게 달려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저자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
국제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활동
옥스퍼드 대학교의 윌클리프홀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 기독개혁연합의 설립자이자 회장
현,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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