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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창조의 영성
현실, 하나님의 세계/유진 피터슨/IVP/[강도헌]
본서의 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염두에 둔 독자들의 주된 대상은 북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고 바른 영적인 삶을 살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서는 쓰여진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지적되었듯이 미국중심의 복음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한 문제점들을 하나로 묶는다면 속단하기는 곤란하지만 알미니안주의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한다고 표방하지만, 실제적인 목회현장과 그들의 부흥관과 영성관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적인 영성 추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다분히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스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으로 보여진다.
본서의 부재는 ‘영성신학’이다. 저자는 북미의 영성은 현재 혼란의 상태이며, 균형잡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성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본서의 저자 유진 피터슨은 영성의 출처는 하나님, 예수님, 즉 말씀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것이 본서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영성 신학이다. 그리고 그의 영성신학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며, 영성신학의 현장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며, 영성신학의 활동은 창조의 활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1. 북미 영성의 오류
본서의 저자가 북미의 영성에 대해 우려하는 바는 하나님이 없는 영성 추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목회의 현장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의나 뜻이 관심사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예배 안에 하나님의 임재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임재하지 않으면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간의 고함소리(찬양, 기도)만 커지는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사해와 같이 비움이나 나눔이 없는 헌신과 희생이 없는 그리고 사랑이 없는 메마른 탐욕적 채움만을 구하고 있다.
사람들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기 위해 분주하게 새로운 세상적 스킬들을 도입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그들은 자랑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임을 그대들은 아는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기분, 감정, 심리, 재무상태, 질병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 밖의 일반은총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부분은 우리의 영혼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일반은총으로는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특별 은총인 이 말씀을 무미건조한 일반은총으로 계속해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의 글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섭리의 특별은총 즉,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영성신학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영성신학을 ‘하나님의 놀이’로 표현하고 있다.
2.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시간, 장소
하나님의 창조 사역 속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 속에 필연적으로 창조된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중요한 창조물인 시간을 발견하도록 지혜를 주셨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의 구분, 그리고 각 각의 날들의 경계를 창조하심으로 시간의 단위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단위 속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의 리듬 속에 집어 넣으셨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신비인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가진 하나님의 형상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처럼 ‘인간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리듬의 반복적 순환은 시간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리듬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리듬의 시작과 끝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 인류는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세대가 바뀌어 왔다.
오늘날 까지 인간이 살아온 것은 쉼 없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6일로 끝나지 않았다. 구속사와 일반 역사의 큰 줄기에서부터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서 창조 사역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시간과 장소 안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고, 인간의 입장에서 사역하셨다.
분석을 위해 인간의 삶을 해부하거나 인간의 몸을 해부하거나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물질들의 조합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육체를 학대하며, 오직 영혼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주장하였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단계에 까지 나아간다. 그들의 의도는 영혼을 더 높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더 추앙하기 위해 시도된 의도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불필요한 요소가 첨가 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사실(요 1장)은 분명한 사실임을 성경은 단호히 증거하고 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이 이 땅에 육신으로 임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치유하심, 기적을 배푸심은 자연, 인간, 영혼의 모든 부분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3.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식탁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처럼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수 없으며,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류의 역사는 살기 위한 몸부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성경은 육신의 필요를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살기 위해 먹는 양식에 대해 다른 종류의 양식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밝힌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육신을 위해 육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영의 양식을 우리는 먹어야 한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양식이며 영생을 주는 양식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며, 말씀과 함께 함으로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단이 파 놓은 함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 혹은 도덕주의이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삶은 율법주의의 사상이다. 그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교리가 또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선하게 삶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인본주의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말씀의 계명들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 좋은 삶으로 곡해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식탁 초대인 성만찬은 살기 위해 먹는 식탁이 아니다. 육의 양식은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대하신 성만찬의 식탁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다른 동물들의 살과 피를 먹는 식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죽음으로의 초대이다. 예수님 자신의 살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자기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 수도, 예수님을 좇을 수도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세겨 보라. 참 생명은 나눔에 있으며, 영원한 생명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얻게되는 것이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내 안에 있는 죄악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식탁이다. 이 식탁의 자리는 역사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순간의 자리인 것이다.
4.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사랑
센스 있는 독자라면 본서의 배경이 점점 한 곳을 향하여 클로즈-업 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우주 창조 - 역사 창조 - 공동체의 창조의 순서로 본서는 점점 더 우리 삶의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들의 생활 현장을 확대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창조’라는 단어를 ‘놀이’로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놀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창조의 진가를 더욱 구체적이고 쉽게 가르쳐 주고 있다. ‘공동체’라는 단어를 통해 직감 하였듯이 이 공동체는 크게는 교회를 의미하며, 작게는 가정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과 교회는 세례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통해 시작된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창조 놀이 속에 핵심인 공동체의 능력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 사랑은 인본주의적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분파주의적이거나 분리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의 영이신 성령의 통치로 살아 숨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5. 글을 맺으며 : 기다림(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의 영성
본서가 말하는 영성의 신학에서 강조되는 것인 인간 중심에서 출발하는 영성의 이해가 아니라 말씀에서 출발하는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영성은 또한 이원론적인 신비주의나 사회운동의 영성이 아니라 구속사적 영성의 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북미의 영성이 인본주의적 영성에 가까워짐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북미 영성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해 필요한 영성의 훈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하나님의 장소에서 기다림’, ‘하나님의 방식으로 기다림’으로 인도한다.
본서는 후기에 빙하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 있다. 빙하 이야기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속도를 중시함으로 잃어버린 내용과 잊어버린 목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숨가쁜 오늘에 함몰되는 근시안적 관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거시적으로 보며, 우리의 영성이 인간이 일으키는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 조급하고 인위적인 영성의 상품을 만들어 내지 말고, 자연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지금까지 존재해 왔듯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영성으로 초대하고 있다.
본서는 인간이 주도하는 영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차이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미처 우리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성과 현실성 그리고 현재성을 깨닫게 해준다.
저자 유진 피터슨 (Eugene H.Peterson)
개신교 영성 신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목회자.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는 리전트 대학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쳤으며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30년간 목회자로 섬겼다. 2005년 현재 리전트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친구에게-우정으로 양육하는 편지>,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등이 있다.
본서의 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염두에 둔 독자들의 주된 대상은 북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고 바른 영적인 삶을 살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서는 쓰여진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지적되었듯이 미국중심의 복음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한 문제점들을 하나로 묶는다면 속단하기는 곤란하지만 알미니안주의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한다고 표방하지만, 실제적인 목회현장과 그들의 부흥관과 영성관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적인 영성 추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다분히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스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으로 보여진다.
본서의 부재는 ‘영성신학’이다. 저자는 북미의 영성은 현재 혼란의 상태이며, 균형잡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성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본서의 저자 유진 피터슨은 영성의 출처는 하나님, 예수님, 즉 말씀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것이 본서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영성 신학이다. 그리고 그의 영성신학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며, 영성신학의 현장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며, 영성신학의 활동은 창조의 활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1. 북미 영성의 오류
본서의 저자가 북미의 영성에 대해 우려하는 바는 하나님이 없는 영성 추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목회의 현장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의나 뜻이 관심사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예배 안에 하나님의 임재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임재하지 않으면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간의 고함소리(찬양, 기도)만 커지는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사해와 같이 비움이나 나눔이 없는 헌신과 희생이 없는 그리고 사랑이 없는 메마른 탐욕적 채움만을 구하고 있다.
사람들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기 위해 분주하게 새로운 세상적 스킬들을 도입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그들은 자랑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임을 그대들은 아는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기분, 감정, 심리, 재무상태, 질병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 밖의 일반은총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부분은 우리의 영혼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일반은총으로는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특별 은총인 이 말씀을 무미건조한 일반은총으로 계속해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의 글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섭리의 특별은총 즉,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영성신학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영성신학을 ‘하나님의 놀이’로 표현하고 있다.
2.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시간, 장소
하나님의 창조 사역 속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 속에 필연적으로 창조된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중요한 창조물인 시간을 발견하도록 지혜를 주셨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의 구분, 그리고 각 각의 날들의 경계를 창조하심으로 시간의 단위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단위 속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의 리듬 속에 집어 넣으셨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신비인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가진 하나님의 형상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처럼 ‘인간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리듬의 반복적 순환은 시간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리듬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리듬의 시작과 끝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 인류는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세대가 바뀌어 왔다.
오늘날 까지 인간이 살아온 것은 쉼 없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6일로 끝나지 않았다. 구속사와 일반 역사의 큰 줄기에서부터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서 창조 사역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시간과 장소 안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고, 인간의 입장에서 사역하셨다.
분석을 위해 인간의 삶을 해부하거나 인간의 몸을 해부하거나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물질들의 조합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육체를 학대하며, 오직 영혼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주장하였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단계에 까지 나아간다. 그들의 의도는 영혼을 더 높이며, 예수님의 신성을 더 추앙하기 위해 시도된 의도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불필요한 요소가 첨가 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사실(요 1장)은 분명한 사실임을 성경은 단호히 증거하고 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이 이 땅에 육신으로 임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치유하심, 기적을 배푸심은 자연, 인간, 영혼의 모든 부분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3.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식탁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처럼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수 없으며,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류의 역사는 살기 위한 몸부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성경은 육신의 필요를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살기 위해 먹는 양식에 대해 다른 종류의 양식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밝힌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육신을 위해 육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영의 양식을 우리는 먹어야 한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양식이며 영생을 주는 양식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며, 말씀과 함께 함으로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단이 파 놓은 함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 혹은 도덕주의이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삶은 율법주의의 사상이다. 그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교리가 또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선하게 삶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인본주의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말씀의 계명들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 좋은 삶으로 곡해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식탁 초대인 성만찬은 살기 위해 먹는 식탁이 아니다. 육의 양식은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대하신 성만찬의 식탁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다른 동물들의 살과 피를 먹는 식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죽음으로의 초대이다. 예수님 자신의 살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자기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 수도, 예수님을 좇을 수도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세겨 보라. 참 생명은 나눔에 있으며, 영원한 생명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얻게되는 것이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내 안에 있는 죄악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식탁이다. 이 식탁의 자리는 역사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시는 순간의 자리인 것이다.
4.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사랑
센스 있는 독자라면 본서의 배경이 점점 한 곳을 향하여 클로즈-업 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우주 창조 - 역사 창조 - 공동체의 창조의 순서로 본서는 점점 더 우리 삶의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들의 생활 현장을 확대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창조’라는 단어를 ‘놀이’로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놀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창조의 진가를 더욱 구체적이고 쉽게 가르쳐 주고 있다. ‘공동체’라는 단어를 통해 직감 하였듯이 이 공동체는 크게는 교회를 의미하며, 작게는 가정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과 교회는 세례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통해 시작된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창조 놀이 속에 핵심인 공동체의 능력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 사랑은 인본주의적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분파주의적이거나 분리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의 영이신 성령의 통치로 살아 숨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5. 글을 맺으며 : 기다림(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의 영성
본서가 말하는 영성의 신학에서 강조되는 것인 인간 중심에서 출발하는 영성의 이해가 아니라 말씀에서 출발하는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영성은 또한 이원론적인 신비주의나 사회운동의 영성이 아니라 구속사적 영성의 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북미의 영성이 인본주의적 영성에 가까워짐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북미 영성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해 필요한 영성의 훈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하나님의 장소에서 기다림’, ‘하나님의 방식으로 기다림’으로 인도한다.
본서는 후기에 빙하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 있다. 빙하 이야기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속도를 중시함으로 잃어버린 내용과 잊어버린 목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숨가쁜 오늘에 함몰되는 근시안적 관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거시적으로 보며, 우리의 영성이 인간이 일으키는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 조급하고 인위적인 영성의 상품을 만들어 내지 말고, 자연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지금까지 존재해 왔듯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영성으로 초대하고 있다.
본서는 인간이 주도하는 영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차이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미처 우리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성과 현실성 그리고 현재성을 깨닫게 해준다.
저자 유진 피터슨 (Eugene H.Peterson)
개신교 영성 신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목회자.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는 리전트 대학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쳤으며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30년간 목회자로 섬겼다. 2005년 현재 리전트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친구에게-우정으로 양육하는 편지>,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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