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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교회사의 영적 거성 - 존 오웬
청교도의 황태자 죤 오웬/앤드류 톰슨/엄경희/지평서원/[권지성]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여전히 존 오웬은 탐구의 대상일 뿐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대상은 아닌 듯하다.
그가 지은 저작들과 그에 대한 지식이 나의 영혼과 믿음의 여정, 그리고 제자화, 그리고 선교적인 삶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또 하나의 헛된 지식의 축적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지만 그의 ‘죄와 유혹’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죄에 대해 고군분투하는 삶과 제임스 패커의 ‘청교도 신앙’이라는 책에서 오웬에 대한 격찬을 듣고 앤드류 톰슨의 존 오웬 전기를 읽게 되었다. 40년 이상을 청교도 신학을 연구해 온 패커는 오웬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미쳐버렸을지 모른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 가면서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그의 어떠한 점이 패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일까? 이 책은 약 350년전, 17세기로 날아가 그의 삶의 여정을 추적하게 해 준다.
존 오웬의 삶 전체를 여기에서 모두 다 자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그는 크게 3번의 인생에서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출생에서 옥스퍼드에서 추방당한 때까지를 1기로,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을 맡기까지를 2기로,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에서 물러나기까지를 3기로, 죽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4기로 볼 수 있다.
[1] 제 1기(1616~1637년, 21세): 출생에서부터 옥스퍼드에서의 수학이후, 추방당하여 로버트 도너경의 사목이 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존 오웬은 1616년 옥스퍼드셔의 스토드햄의 대리목사였던 아버지 헨리 오웬(Henry Owe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철학과 신학의 교육을 받았으며, 청교도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어머니 수잔은 어거스틴의 모니카와 같이 오웬을 키우는데 헌신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탁월한 천재성을 발휘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후, 옥스퍼드의 사립학교에서 에드워드 실베스터 감독에게서 고전공부를 하였고, 이후 뛰어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2세의 나이에 Queen’s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오웬은 4시간 정도의 수면 시간을 가지고 탁월하게 다양한 교과과정들을 이수해 나갔다. 그의 학창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오웬의 마음 속에는 진리에 대한 빛이 조금씩 스며들어 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의 신앙은 첫 번째, 연단을 통과하게 된다. 카톨릭 성직자였으며, 난폭한 윌리엄 라우드가 학장이 되자, 그는 학교의 강압적으로 카톨릭의 많은 의식들과 의무들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웬은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러한 억압과 정책들에 항거하다 결국 1637년 약 10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한 채 추방당하게 된다. 청교도들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은 고난과 환란으로 점철된 풍랑의 세월을 지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루터와 칼빈, 낙스, 그리고 17세기의 백스터, 오웬, 번연 모두 정치 권력과 국가에 대항해 진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었다.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 잉글랜드로 떠났던 초기 이주자들의 경우에도 자연환경과 질병과의 싸움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고, 이후에 오웬의 생을 통해 보게 되겠지만, 그 역시 20대 초반의 시절부터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부흥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신앙이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지 못함으로 지성은 둔감하고, 의지는 박약하고, 감정은 메말라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제 2기(1637~1651년, 35세): 옥스퍼드에서의 추방 이후, 다시 옥스퍼드의 부총장으로 지저스크라이스트처치의 학장으로 취임하기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19세부터 인문학 석사를 시작하여서 21세가 되자 밴크로프트 주교로부터 성직 인허를 받게 되었다. 학교를 떠난 오웬은 에스콧의 로버트 도머경의 가족 목사이자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다시 버크셔의 헐리의 러블라스 영주의 가족 목사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 당시의 영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의회파와 왕당파간의 깊은 갈등으로 팽팽한 전투에 대한 긴박감이 돌던 시기였다. 이 당시의 시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세기는 무역의 성행과 상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도시 시민층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또한, 스튜어트 왕조의 과도한 세금징수와 폭압적인 정치로 많은 원성을 사던 시기였다. 게다가 라우드의 미신적인 행위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오웬으로 하여금 의회파를 지지하게 하였고, 이것은 러블라스 영주와 재정적인 후원인이었던 삼촌과의 결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후, 다시 런던으로 옮겨온 오웬은 영적인 깊은 침체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정확한 침체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영적인 고민과 갈등이 위대한 저술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게 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영적인 고통의 시간을 거듭하던 그 어느 날, 깊은 밤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듯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오웬과 친구는 에드먼드 칼라미박사의 맬더맨버리 예배 처소로 주일 아침 설교를 듣기 위해 갔다. 그의 친구는 오웬에게 칼라미의 외모를 보고 다른 교회로 갈 것을 애기했으나, 힘을 소진한 그는 그 곳에서 남아 설교를 듣게 되었다. 칼라미박사의 마태복음 8장 26절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오웬의 영혼은 진정한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회심의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거스틴과 스펄전과 휘트필드의 경우와 같이 오웬의 경우에도 이러한 극적인 회심체험 이후에 인생의 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 같은 부으심은 오직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3] 제 3기(1651~1657년, 42세): 옥스퍼드의 부총장으로 부임하여 물러나기까지의 기간이다. 당시 옥스퍼드의 상황은 왕당파의 시기심으로 인해 대학의 관계자들은 영원히 강단을 상실했고, 학생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방탕함에 빠져있었다. 오웬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용기와 지혜로 학교를 예전의 융성한 상황으로 회복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기간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또한, 1653년에는 옥스퍼드를 대표하여 의회의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4] 제 4기(1657~1683년, 68세):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에서 물러나, 임종할 때까지의 기간이다.크롬웰의 죽음 이후에 그는 부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청교도들은 왕정의 복원과 함께 박해를 경험하게 된다.그는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수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는데 그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다, 1683년 8월 24일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죽기 바로 전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 Charles Fleetwood에세 다음의 편자를 보내게 된다.
“나는 폭풍 가운데 있는 교회라는 배를 떠나네. 그러나 위대하신 선장이 배 안에 계시는데, 노를 젓는 한 사람이 떠난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깨어서 기도하고 소망을 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낙심하지 말게나. 약속이 견고히 섰으니 그분께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일세.”(P. 174)
죤 오웬의 묘비명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 알미니안, 소시니안, 그리고 카톨릭의 오류들이 히드라의 더러운 호흡과 치명적인 독처럼 교회에 들끓었을 때, 오웬은 헤라클레스보다 더 큰 힘으로 그것들을 격퇴했고 무찔렀으며, 파멸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친 학자였습니다. 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일으켰고, 대중적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삶들을 세웠으며, 출간된 서적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P. 211~212)
전체적으로 직역이 많아 읽기가 매끄럽지 못한 것 같은데, 고전일수록 독자들은 문체가 생소하므로, 조금 더 의역에 가깝게 번역에 신경 써 주었으면 한다. 또한, 정확한 책의 출처와 출판사를 밝혀 두었으면 좋겠다라는 아쉬움이 든다.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여전히 존 오웬은 탐구의 대상일 뿐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대상은 아닌 듯하다.
그가 지은 저작들과 그에 대한 지식이 나의 영혼과 믿음의 여정, 그리고 제자화, 그리고 선교적인 삶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또 하나의 헛된 지식의 축적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지만 그의 ‘죄와 유혹’이라는 책을 통해 그의 죄에 대해 고군분투하는 삶과 제임스 패커의 ‘청교도 신앙’이라는 책에서 오웬에 대한 격찬을 듣고 앤드류 톰슨의 존 오웬 전기를 읽게 되었다. 40년 이상을 청교도 신학을 연구해 온 패커는 오웬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미쳐버렸을지 모른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 가면서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그의 어떠한 점이 패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일까? 이 책은 약 350년전, 17세기로 날아가 그의 삶의 여정을 추적하게 해 준다.
존 오웬의 삶 전체를 여기에서 모두 다 자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그는 크게 3번의 인생에서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출생에서 옥스퍼드에서 추방당한 때까지를 1기로,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을 맡기까지를 2기로,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에서 물러나기까지를 3기로, 죽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4기로 볼 수 있다.
[1] 제 1기(1616~1637년, 21세): 출생에서부터 옥스퍼드에서의 수학이후, 추방당하여 로버트 도너경의 사목이 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존 오웬은 1616년 옥스퍼드셔의 스토드햄의 대리목사였던 아버지 헨리 오웬(Henry Owe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철학과 신학의 교육을 받았으며, 청교도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어머니 수잔은 어거스틴의 모니카와 같이 오웬을 키우는데 헌신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탁월한 천재성을 발휘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후, 옥스퍼드의 사립학교에서 에드워드 실베스터 감독에게서 고전공부를 하였고, 이후 뛰어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2세의 나이에 Queen’s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오웬은 4시간 정도의 수면 시간을 가지고 탁월하게 다양한 교과과정들을 이수해 나갔다. 그의 학창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오웬의 마음 속에는 진리에 대한 빛이 조금씩 스며들어 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의 신앙은 첫 번째, 연단을 통과하게 된다. 카톨릭 성직자였으며, 난폭한 윌리엄 라우드가 학장이 되자, 그는 학교의 강압적으로 카톨릭의 많은 의식들과 의무들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웬은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러한 억압과 정책들에 항거하다 결국 1637년 약 10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한 채 추방당하게 된다. 청교도들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은 고난과 환란으로 점철된 풍랑의 세월을 지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루터와 칼빈, 낙스, 그리고 17세기의 백스터, 오웬, 번연 모두 정치 권력과 국가에 대항해 진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었다.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 잉글랜드로 떠났던 초기 이주자들의 경우에도 자연환경과 질병과의 싸움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고, 이후에 오웬의 생을 통해 보게 되겠지만, 그 역시 20대 초반의 시절부터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부흥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신앙이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지 못함으로 지성은 둔감하고, 의지는 박약하고, 감정은 메말라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제 2기(1637~1651년, 35세): 옥스퍼드에서의 추방 이후, 다시 옥스퍼드의 부총장으로 지저스크라이스트처치의 학장으로 취임하기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19세부터 인문학 석사를 시작하여서 21세가 되자 밴크로프트 주교로부터 성직 인허를 받게 되었다. 학교를 떠난 오웬은 에스콧의 로버트 도머경의 가족 목사이자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다시 버크셔의 헐리의 러블라스 영주의 가족 목사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 당시의 영국의 정치적인 상황은 의회파와 왕당파간의 깊은 갈등으로 팽팽한 전투에 대한 긴박감이 돌던 시기였다. 이 당시의 시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세기는 무역의 성행과 상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도시 시민층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사회 계층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또한, 스튜어트 왕조의 과도한 세금징수와 폭압적인 정치로 많은 원성을 사던 시기였다. 게다가 라우드의 미신적인 행위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오웬으로 하여금 의회파를 지지하게 하였고, 이것은 러블라스 영주와 재정적인 후원인이었던 삼촌과의 결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후, 다시 런던으로 옮겨온 오웬은 영적인 깊은 침체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정확한 침체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영적인 고민과 갈등이 위대한 저술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게 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영적인 고통의 시간을 거듭하던 그 어느 날, 깊은 밤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듯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오웬과 친구는 에드먼드 칼라미박사의 맬더맨버리 예배 처소로 주일 아침 설교를 듣기 위해 갔다. 그의 친구는 오웬에게 칼라미의 외모를 보고 다른 교회로 갈 것을 애기했으나, 힘을 소진한 그는 그 곳에서 남아 설교를 듣게 되었다. 칼라미박사의 마태복음 8장 26절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오웬의 영혼은 진정한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회심의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거스틴과 스펄전과 휘트필드의 경우와 같이 오웬의 경우에도 이러한 극적인 회심체험 이후에 인생의 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 같은 부으심은 오직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3] 제 3기(1651~1657년, 42세): 옥스퍼드의 부총장으로 부임하여 물러나기까지의 기간이다. 당시 옥스퍼드의 상황은 왕당파의 시기심으로 인해 대학의 관계자들은 영원히 강단을 상실했고, 학생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방탕함에 빠져있었다. 오웬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용기와 지혜로 학교를 예전의 융성한 상황으로 회복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기간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또한, 1653년에는 옥스퍼드를 대표하여 의회의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4] 제 4기(1657~1683년, 68세): 옥스퍼드의 부총장직에서 물러나, 임종할 때까지의 기간이다.크롬웰의 죽음 이후에 그는 부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청교도들은 왕정의 복원과 함께 박해를 경험하게 된다.그는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수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는데 그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다, 1683년 8월 24일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죽기 바로 전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 Charles Fleetwood에세 다음의 편자를 보내게 된다.
“나는 폭풍 가운데 있는 교회라는 배를 떠나네. 그러나 위대하신 선장이 배 안에 계시는데, 노를 젓는 한 사람이 떠난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깨어서 기도하고 소망을 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낙심하지 말게나. 약속이 견고히 섰으니 그분께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실 것일세.”(P. 174)
죤 오웬의 묘비명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 알미니안, 소시니안, 그리고 카톨릭의 오류들이 히드라의 더러운 호흡과 치명적인 독처럼 교회에 들끓었을 때, 오웬은 헤라클레스보다 더 큰 힘으로 그것들을 격퇴했고 무찔렀으며, 파멸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친 학자였습니다. 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일으켰고, 대중적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삶들을 세웠으며, 출간된 서적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P. 211~212)
전체적으로 직역이 많아 읽기가 매끄럽지 못한 것 같은데, 고전일수록 독자들은 문체가 생소하므로, 조금 더 의역에 가깝게 번역에 신경 써 주었으면 한다. 또한, 정확한 책의 출처와 출판사를 밝혀 두었으면 좋겠다라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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