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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윌리엄 퍼킨스/채천석/부흥과개혁사/[권지성]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설교가 단지 회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값 싼 제품이 아니라, 죄인들의 양심에 율법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어, 그들의 마음이 회개의 애통함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칭의와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교회의 가장 영광스러운 일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19세기의 찰스 스펄전의 “Lecture to my Students”와 20세기의 마틴 로이드 존스의 “Preaching and Preacher”의 15세기판 축소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정도로 사상과 내용면에서 압축적이고 요약, 정리되어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영광은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과 같은 불의 혀 같은 설교가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었다. 또한, 18세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휘트필드, 웨슬리, 에드워즈와 같은 시대를 뒤집어 엎었던 사람들도 설교가였다. 반대로, 영적인 깊은 침체의 시기는 어떠한가? 오염된 교리를 증거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 목회자들이 판치던 시대였다. 오늘날은 우리 시대의 강단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기업의 단순한 소비자 제일주의의 사고방식의 발상이다. 아니면, 그들에게 율법을 단순히 이행하라고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일쑤이다.
죄와 지옥에 대한 설교를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감성시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은 오직 은혜와 사랑과 기쁨이라는 위로와 감미롭고 짜릿한 감동에 익숙해있다. 고학력 시대의 회중들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난도질하고 판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복음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교회로 바꿀 수 있는 소비자들이 되어 버렸다. 얼마든지 돈을 들이면, 그러한 목회자들을 살 수 있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하는 시대이니 사사기와 같은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회중들의 목회자들에 대한 불신은 바로 설교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죄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으로 죄를 사정없이 다루지 않고, 단지 언급하는데 지나치고 있으며, 이것은 교만한 죄인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전혀 겸허해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싸구려에 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부흥의 시대의 그 영광스러운 설교가들의 타오르던 야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 성난 하나님의 진노의 발 앞에 납작하게 엎드러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앞에 자신을 드리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과 칭의의 교리와 만났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어쩔 중 몰라 하는 그 광경 말이다.
전반부의 설교의 기술에서는 설교자의 설교 내용과 목적과 방법,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라는 명제에서부터 설교의 본문-해석-적용이라는 청교도들의 정형화된 틀을 형성하면서 글을 서술해 나간다.
윌리엄 퍼킨스가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시간은 위대한 청교도 설교가들을 배출한 시대로써, 이들의 설교 사역을 통해서 영국은 유혈혁명을 거치지 않고 시민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만큼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시대였다. 퍼킨스는 엘레자베스 여왕 시대의 초기 청교도로써 엄청난 분량의 저서를 쏟아낸 영국 청교도 신학의 원조로써, 그의 설교 사역의 스타일은 후대의 청교도들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전체 책의 구조는 설교의 기술(Art of Prophesying)과 목사의 소명(The calling of the ministry)의 2부분으로 나뉜다. 설교의 기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가들은 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해석 능력을 겸비하여야 함을 말한다. 또한,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리고 이 설교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다루어 놓고 있으면서 마지막에서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퍼킨슨은 설교의 가치를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영혼의 유혹자’로서 믿음과 회개로써 죄와 세상과 적그리스도를 훼파하는 도구임을 역설한다. 특히 저자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써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목소리와 입으로 그의 말씀을 타락한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설교를 대하는 가치관과는 대단히 다른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설교를 통한 진리의 위대한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충분히 경험하는 일을 외면해 왔다. 세상적인 예화나 재미있는 오락거리가 강단을 차지하고, 가벼운 감정에 호소하려 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일그러진 인식론의 변화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20년 30년 이상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모조리 탐사하여 회중들의 마음에 온전히 강론하기 위해 기도함으로 이 말씀을 증거하여 메말라 죽어버린 영혼들이 말씀의 강가로 인도하는 설교자가 진정한 설교자인가 아니면, 드라마나 세상의 애기나 통계를 들먹이며 말씀의 의미는 오히려 무시하는 설교자가 진정한 설교자인가. 오늘날은 후자의 설교자가 인기를 끄는 듯이 보인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퍼킨스가 기억술을 사용하여 설교를 절대 암기하는 것은 비영적인 활동으로써, 우리들의 마음과 총명을 어둡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히려 퍼킨스는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순서를 가슴에 새기며 성령님이 주시는 자유로운 영적 감정에 의지할 것을 역설한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의 준비의 과정과 내용의 전달과 행동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기를 원했던 그들의 마음은 오늘날 헛된 공명심으로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목사의 소명에서는 욥기 33장 23~24절의 말씀과 이사야 6장 5~9절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목사가 지녀야 할 자질들과 소명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저자는 모든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설교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평이하고도 능력 있게 설교해야 함을 말한다. 바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떠하든지 간에 설교의 강단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다 된다고 말하지 않고, 이 말씀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법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을 그래서 성령께서 그 설교에 기름 부으실 것을 말한다.
“그는 뇌로 흘러 들어오는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영적인 손가락으로 자기 영에 새겨야 한다.”(p 128)
“결과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한 후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여 나로 학자의 혀를 주사 당신의 거룩한 뜻의 올바른 해석자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p 129)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내 설교는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문제가 무엇일까? 라고 하소연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지침과 모범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설교가 단지 회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값 싼 제품이 아니라, 죄인들의 양심에 율법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어, 그들의 마음이 회개의 애통함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칭의와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교회의 가장 영광스러운 일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19세기의 찰스 스펄전의 “Lecture to my Students”와 20세기의 마틴 로이드 존스의 “Preaching and Preacher”의 15세기판 축소판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정도로 사상과 내용면에서 압축적이고 요약, 정리되어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영광은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과 같은 불의 혀 같은 설교가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었다. 또한, 18세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휘트필드, 웨슬리, 에드워즈와 같은 시대를 뒤집어 엎었던 사람들도 설교가였다. 반대로, 영적인 깊은 침체의 시기는 어떠한가? 오염된 교리를 증거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 목회자들이 판치던 시대였다. 오늘날은 우리 시대의 강단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기업의 단순한 소비자 제일주의의 사고방식의 발상이다. 아니면, 그들에게 율법을 단순히 이행하라고 자신도 지킬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일쑤이다.
죄와 지옥에 대한 설교를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감성시대를 살아가는 청중들은 오직 은혜와 사랑과 기쁨이라는 위로와 감미롭고 짜릿한 감동에 익숙해있다. 고학력 시대의 회중들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난도질하고 판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복음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교회로 바꿀 수 있는 소비자들이 되어 버렸다. 얼마든지 돈을 들이면, 그러한 목회자들을 살 수 있다는 위험한 발상까지 하는 시대이니 사사기와 같은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회중들의 목회자들에 대한 불신은 바로 설교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죄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으로 죄를 사정없이 다루지 않고, 단지 언급하는데 지나치고 있으며, 이것은 교만한 죄인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전혀 겸허해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싸구려에 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부흥의 시대의 그 영광스러운 설교가들의 타오르던 야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 성난 하나님의 진노의 발 앞에 납작하게 엎드러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앞에 자신을 드리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과 칭의의 교리와 만났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어쩔 중 몰라 하는 그 광경 말이다.
전반부의 설교의 기술에서는 설교자의 설교 내용과 목적과 방법,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라는 명제에서부터 설교의 본문-해석-적용이라는 청교도들의 정형화된 틀을 형성하면서 글을 서술해 나간다.
윌리엄 퍼킨스가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시간은 위대한 청교도 설교가들을 배출한 시대로써, 이들의 설교 사역을 통해서 영국은 유혈혁명을 거치지 않고 시민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만큼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시대였다. 퍼킨스는 엘레자베스 여왕 시대의 초기 청교도로써 엄청난 분량의 저서를 쏟아낸 영국 청교도 신학의 원조로써, 그의 설교 사역의 스타일은 후대의 청교도들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전체 책의 구조는 설교의 기술(Art of Prophesying)과 목사의 소명(The calling of the ministry)의 2부분으로 나뉜다. 설교의 기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가들은 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해석 능력을 겸비하여야 함을 말한다. 또한,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리고 이 설교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다루어 놓고 있으면서 마지막에서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퍼킨슨은 설교의 가치를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영혼의 유혹자’로서 믿음과 회개로써 죄와 세상과 적그리스도를 훼파하는 도구임을 역설한다. 특히 저자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써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목소리와 입으로 그의 말씀을 타락한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설교를 대하는 가치관과는 대단히 다른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설교를 통한 진리의 위대한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충분히 경험하는 일을 외면해 왔다. 세상적인 예화나 재미있는 오락거리가 강단을 차지하고, 가벼운 감정에 호소하려 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일그러진 인식론의 변화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20년 30년 이상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모조리 탐사하여 회중들의 마음에 온전히 강론하기 위해 기도함으로 이 말씀을 증거하여 메말라 죽어버린 영혼들이 말씀의 강가로 인도하는 설교자가 진정한 설교자인가 아니면, 드라마나 세상의 애기나 통계를 들먹이며 말씀의 의미는 오히려 무시하는 설교자가 진정한 설교자인가. 오늘날은 후자의 설교자가 인기를 끄는 듯이 보인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퍼킨스가 기억술을 사용하여 설교를 절대 암기하는 것은 비영적인 활동으로써, 우리들의 마음과 총명을 어둡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히려 퍼킨스는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순서를 가슴에 새기며 성령님이 주시는 자유로운 영적 감정에 의지할 것을 역설한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의 준비의 과정과 내용의 전달과 행동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기를 원했던 그들의 마음은 오늘날 헛된 공명심으로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목사의 소명에서는 욥기 33장 23~24절의 말씀과 이사야 6장 5~9절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목사가 지녀야 할 자질들과 소명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저자는 모든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설교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평이하고도 능력 있게 설교해야 함을 말한다. 바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떠하든지 간에 설교의 강단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다 된다고 말하지 않고, 이 말씀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법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을 그래서 성령께서 그 설교에 기름 부으실 것을 말한다.
“그는 뇌로 흘러 들어오는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영적인 손가락으로 자기 영에 새겨야 한다.”(p 128)
“결과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한 후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여 나로 학자의 혀를 주사 당신의 거룩한 뜻의 올바른 해석자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p 129)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내 설교는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문제가 무엇일까? 라고 하소연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지침과 모범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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