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한국교회 속에서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엄격하게 배웠을 것이다. 십일조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십일조 엄수주의”가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필자 또한 십일조는 빚을 내서라도 드려야하고 자기의 첫 소득 또한 다 바쳐야한다는 구약의 율법과 전통을 배우며 자랐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암이 발생한다는 말을 강단을 통해 선포하는 이상하고 폭력적인 목사에 관한 기사도 보았다.
과연 십일조는 빚을 내서라도 바쳐야 하는 것인가? 소득의 1/10을 정확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준이고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고 복에서 제외되는 것인가? 십일조가 신앙이 좋다는 잣대이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기원과 십일조의 정신과 형성, 구약과 신약의 관계와 발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본서는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인 것을 짧지만 정확하고 묵직하게 써 나가고 있다.
더구나 책에는 목회자로서 저자가 교회 사역 가운데 경험했던 십일조에 대한 성도들의 고민과 갈등과 한숨이 담겨져 있어서 우리에게 더욱 피부로 다가온다. 헌금이 결코 우리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법으로 제정하신 것이 아닌데 오늘날 성도들에게 죄책감을 더 심어주는 헌금의 실상을 보며 저자는 헌금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제시한다.
필자 또한 교회생활을 하며 헌금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보았고 지금도 십일조 때문에 시름하는 집사님 가정을 알고 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가정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고 죄스러워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안다. 어떤 경우는 교회가 필요한 재정과 사역을 위해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구분 없이 무리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악한 모습까지 보았고, 사회 상황과 성도들이 살아가는 배경과 실상에 대한 파악 없이 십일조는 우리 신앙의 척도요 마지막 기준이라고 하며 성도의 목을 조이는 모습도 보았다.
과연 십일조가 신앙의 마지막 유일한 마지노선인가? 이것만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라도 꼭 파수해야 하는 엄격한 율법일까? 이 책은 또한 우리에게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십일조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과 공통점들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과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성경적 신학적으로 제시하며 신약의 교회는 더 자유로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우리에게 빛을 던져준다.
책의 내용을 조금 요약하면 1장 “모세율법의 십일조”에서는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언약적, 제의적, 신성국가적이라는 것이다. 2장 “아브라함의 십일조”에서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고대근동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드린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기에 십일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3장 “말라기의 십일조”에서는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을 주해하고 설명하며 이 본문은 기복주의 말씀이 아니라 언약적이며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로 관계의 회복과 종말론적인 복의 성취라고 설명한다.
4장 “십일조의 분량”에서는 모세의 율법에서 1/10은 대략적이었다는 것과 신약에서는 폐지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5장 “책망받은 바리새인의 십일조”에서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주해하며 예수님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은 옛 언약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함을 말한다. 6장과 7장 “십일조와 신약헌금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와 공통점을 보여주고 레위의 십일조와 절기의 십일조와 자선의 십일조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성취되고 신약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책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면 첫 번째로는 구약 십일조의 특징을 제시한다. 구약에서 시내산에서 율법의 수여될 때 십일조가 포함되는데 이 십일조는 성전 제의와 성전을 위해 그리고 언약백성의 결속과 연합을 위해 그리고 객과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연약한 자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의무적이긴 했지만 결코 가난한 자에게까지 요구되지 않았고 바리새인처럼 그 분량까지 따지지 않았다. 결코 구약의 십일조가 하나님의 성품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구약의 십일조는 언약적이기에 백성들에게 의무감이 있다. 또한 제의적이어서 성전과 제사를 위해 요긴하게 사용된다. 아울러 신정국가적(공동체적 돌봄)이여서 공동체적으로 넓게 사용된다. 이처럼 모세에 의해 세워진 십일조를 보더라도 그 특징이 성도들에게 강압적이고 괴롭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돌봄과 사랑의 평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오래전부터 배웠던 구약 십일조의 오해를 벗겨준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십일조가 어떻게 성취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십일조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질적 차이만큼 크다. 그래서 신약의 십일조는 구약처럼 언약적이지 않아 이것을 못한다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지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성전과 제사 의식이 모두 성취되었으므로 제의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구약은 신정국가적이었지만 신약에서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복지를 담당하기에 교회는 세금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레위의 십일조를 자신의 영원한 대제사장직과 자신의 온전한 제물되심과 자신의 참된 성전되심으로 인해 레위의 십일조와 그 모형들이 폐기된다. 그리고 절기의 십일조도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고, 오순절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고 영혼의 추수가 이루어지며, 초막절은 예수님이 물과 빛이 되셔서 이 절기를 성취하는 분임을 나타내신다.
아울러 자선의 십일조는 특별히 폐지될 예표가 없지만 예수님의 정신으로 그 주기가 더욱 확장되고 범위가 넓어지는데 ‘3년마다’라는 주기는 ‘항상’ 감당할 사명으로 전환되고 ‘네 성중에’라는 범위는 ‘세상’이라는 하나님 나라로 뻗어간다. 이렇듯 책은 구약의 십일조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성취되는지 성경적으로 분명히 짚어준다. 아울러 둘 사이에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무엇인지도 드러내준다.
세 번째는 개인적으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십일조의 공적 역할을 강조한다. 구약의 십일조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자비와 구제와 돌봄을 향하듯 신약의 교회는 이 정신이 더 강조되어야한다. 이것은 십일조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의 문제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로의 사고의 전환과 정신의 회복이다. 십일조와 헌금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라는 주인 의식과 청지기 의식이 올바르게 표현되는 수단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로 움직이는데 이 속에서 사회가 탐욕으로 물들어 있고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 또한 맘몬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물리치고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고 복음의 정신을 헌금에도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경주에 살았던 최 부자 댁의 교훈 중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헌금을 통해 이러한 구제와 복지를 예수님의 정신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교회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성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십일조 엄수를 가르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악이고 성경의 정신과 어긋나며 하나님의 성품과도 맞지 않다. 만약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빚을 내어 드린다면 그 빚으로 낸 헌금을 하나님이 받으시겠는가? 또한 사회에서 불합리하게 얻은 수입으로라도 하나님께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겠는가?
사회적 약자를 전혀 돌보지도 않고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히 마지막 신앙의 잣대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금의 정신은 우리가 당연히 강조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더 많은 창고를 만들려는 재력가들과 교회에게 복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또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하는 제사장적 사명과 불의한 사회구조를 향한 예언자적 메시지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우리에게 변함없는 강제력과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 해석과 적용은 우리 시대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 십일조의 제도는 취소되었고 그 본질과 정신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교회의 주어진 놀라운 자유를 가지고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과 양심과 능력에 따라 헌금을 해야 할 것이고 교회는 그것을 가지고 탐욕을 벗어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지향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