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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베드로를 건져내신 주님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랴!
물위를 걸을 수 있는데 왜 빠지십니까/데이비드 아일랜드/말씀사/김정완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 속에 빠졌다.
믿음으로 시작했던 일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든지 의도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이뤄질 것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릴 것인가? 다른 방도를 모색할 것인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을 살필 것인가? 무조건 잘못이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는 아주 다르다. 처음 선택이 옳다고 나중 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다.
베드로의 첫 선택은 훌륭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선택이 나중을 보증하지 못했다. 보증은 내 선택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는 주님이 보증하는 한에서 빛을 발한다. 물위로 오라고 명하신 분이 주님이시다. 도중에 빠진 것은 베드로의 선택이었다. 말씀을 계속적으로 의지했더라면 빠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신앙을 지식과 믿음과 동의를 조합해 풀이하고 있다. 신앙=지식+믿음+동의(행동)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심을 ‘믿고’ 그 믿음대로 ‘행할’ 때 그 일련의 행태를 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에 덧붙여 신앙과 긍정적인 사고(자기확신으로 풀어도 좋을 것 같다. 이하 이 용어를 자기확신으로 대체한다.)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자기확신 또한 신앙과 같은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지식과 ‘자기중심적인’ 믿음과 ‘자기 중심적인’ 동의가 다를 뿐이다. 그 모양은 사실 신앙과 구분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위장한 자기확신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자가 삶을 통해 깨닫고 인용한 다음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나를 두고 쏟아내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독신 남성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불쑥 이런 말을 내뱉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될지어다!” 그는 (잘못된)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을 믿으며, 그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녀는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화가 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소리친다. “진심으로 그 여자를 제게 주실 거라 믿었어요. 믿음은 아무 소용없네요!”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잘못은 지식의 본체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벨보이처럼 일하실 거라 생각했고, 성경이 그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단순히 요구할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정확한 성경 지식, 자기가 구하는 것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올바른 신앙의 기본 요소를 확립하는 열쇠이다.」
처음 몇 번의 흉내는 잘 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의지에 근거한 자기확신의 결과 때문이다. 그 자기확신이 지난 날 잘 된 경험과 짝을 이루면 이젠 성채처럼 생각과 마음을 견고하게 두른다.
베드로의 믿음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깟 바람에 그만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뱃사람이야 바람이 불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잘 알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바람이라면 배가 견딜 수 없다든지, 어떻게 해야 슬기롭게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했을 수 있다. 이미 이해되지 않은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간 잔뼈가 굵은 바다 상황을 걱정했다는 것이 의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보는 순간 일은 벌어진다. 믿음으로 행한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 내 선택에 있다.
신앙이 있으면 환난이나 역경이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기대 또한 착각이다. 주님이 계신 물위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우리를 해하려는 바람은 수도 없이 불어온다. 약한 바람일지라도 겁내는 한 그 바람이야말로 나를 삼키는 강한 돌풍이다. 바람만 바라봐서는 해결책이 도무지 없다는 얘기다. 베드로가 걸을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라면 바람이 나를 해할 수 없는 것도 나를 지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이다. 말씀은 늘 있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내게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아본다고 했다. 자라는 듯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맺기는 해도 영 신통치 않은 열매가 나온다면 그 나무를 높이 평가할 수 없다. 열매를 맺기 전에는 나무의 상태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열매가 맺히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처음 베드로의 상태는 무척 놀라울 정도로 믿음이 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맺은 열매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었다. 주님의 책망은 그래서 옳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오늘 내가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다면 그 문제를 일으킨 또 다른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실패 많은 인생조차 감당하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신 주님께로 달려갈 일이다. 그 일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글 김정완 / 명예편집위원
저자 데이비드 아일랜드
기계공학,토목공학,신학을 전공하고,조직 리더십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는 'IMPACT with David Ireland'라는 TV쇼와, 매일 방영되는 라디오 방송으로 유명하다.그가 섬기고 있는 'Christ Church'는 1986년 6명으로 시작했는데,현재 5,000명이 모인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 속에 빠졌다.
믿음으로 시작했던 일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든지 의도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이뤄질 것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릴 것인가? 다른 방도를 모색할 것인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을 살필 것인가? 무조건 잘못이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는 아주 다르다. 처음 선택이 옳다고 나중 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여지도 많지 않다.
베드로의 첫 선택은 훌륭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선택이 나중을 보증하지 못했다. 보증은 내 선택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는 주님이 보증하는 한에서 빛을 발한다. 물위로 오라고 명하신 분이 주님이시다. 도중에 빠진 것은 베드로의 선택이었다. 말씀을 계속적으로 의지했더라면 빠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신앙을 지식과 믿음과 동의를 조합해 풀이하고 있다. 신앙=지식+믿음+동의(행동)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심을 ‘믿고’ 그 믿음대로 ‘행할’ 때 그 일련의 행태를 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에 덧붙여 신앙과 긍정적인 사고(자기확신으로 풀어도 좋을 것 같다. 이하 이 용어를 자기확신으로 대체한다.)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자기확신 또한 신앙과 같은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지식과 ‘자기중심적인’ 믿음과 ‘자기 중심적인’ 동의가 다를 뿐이다. 그 모양은 사실 신앙과 구분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위장한 자기확신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자가 삶을 통해 깨닫고 인용한 다음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나를 두고 쏟아내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독신 남성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불쑥 이런 말을 내뱉는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될지어다!” 그는 (잘못된)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을 믿으며, 그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녀는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화가 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소리친다. “진심으로 그 여자를 제게 주실 거라 믿었어요. 믿음은 아무 소용없네요!”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잘못은 지식의 본체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벨보이처럼 일하실 거라 생각했고, 성경이 그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단순히 요구할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정확한 성경 지식, 자기가 구하는 것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올바른 신앙의 기본 요소를 확립하는 열쇠이다.」
처음 몇 번의 흉내는 잘 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의지에 근거한 자기확신의 결과 때문이다. 그 자기확신이 지난 날 잘 된 경험과 짝을 이루면 이젠 성채처럼 생각과 마음을 견고하게 두른다.
베드로의 믿음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깟 바람에 그만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뱃사람이야 바람이 불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잘 알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바람이라면 배가 견딜 수 없다든지, 어떻게 해야 슬기롭게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했을 수 있다. 이미 이해되지 않은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간 잔뼈가 굵은 바다 상황을 걱정했다는 것이 의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보는 순간 일은 벌어진다. 믿음으로 행한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 내 선택에 있다.
신앙이 있으면 환난이나 역경이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기대 또한 착각이다. 주님이 계신 물위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우리를 해하려는 바람은 수도 없이 불어온다. 약한 바람일지라도 겁내는 한 그 바람이야말로 나를 삼키는 강한 돌풍이다. 바람만 바라봐서는 해결책이 도무지 없다는 얘기다. 베드로가 걸을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라면 바람이 나를 해할 수 없는 것도 나를 지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이다. 말씀은 늘 있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내게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아본다고 했다. 자라는 듯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맺기는 해도 영 신통치 않은 열매가 나온다면 그 나무를 높이 평가할 수 없다. 열매를 맺기 전에는 나무의 상태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열매가 맺히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처음 베드로의 상태는 무척 놀라울 정도로 믿음이 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맺은 열매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었다. 주님의 책망은 그래서 옳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오늘 내가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다면 그 문제를 일으킨 또 다른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실패 많은 인생조차 감당하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신 주님께로 달려갈 일이다. 그 일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글 김정완 / 명예편집위원
저자 데이비드 아일랜드
기계공학,토목공학,신학을 전공하고,조직 리더십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는 'IMPACT with David Ireland'라는 TV쇼와, 매일 방영되는 라디오 방송으로 유명하다.그가 섬기고 있는 'Christ Church'는 1986년 6명으로 시작했는데,현재 5,000명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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