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느니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느니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고전 중에 고전이다. 어린아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읽고 대화할 수 있는 책이고, 많이 배운 자나 적게 배운 자나 자신의 신학과 경험을 녹여서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대화마다 성경의 비유와 소재가 사용되고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그의 성격과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니 저자는 이 책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20대에 이 책을 완독을 했다. 그때는 신학과 삶이 깊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이 책을 접하니 모든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고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더구나 그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신학과 신앙에 대한 교훈이 발견된다. 20대에는 게으름과 정욕에 대한 교훈이 컸다면 지금은 믿음과 용기와 동역자에 대한 내용이 더 감격이 된다.
행함이 있는 믿음
크리스천이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서 맞이하는 일들과 그것에 대한 해설을 보면 존 번연은 단순한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그는 신학을 알고 성경에 조예가 깊어서 모든 삶의 순간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풀어낼 수 있는 신학자이자 설교자였다. 필자도 그의 글을 보며 그의 신학사상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17세기 청교도가 가졌던 신학의 순수함과 신앙의 경건함을 맛볼 수 있었다.
책을 보면 순례하는 믿음과 천국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신칭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입으로 믿는다 하고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넘어서 감동과 변화를 받아 실천되어지는 보배로운 믿음이다. 믿음만을 강조하여 삶의 내용은 상관없는 근본주의적이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삶만을 강조하여 영혼의 변화와 회심이 없는 그러한 인간적인 믿음도 아니다.
존 번연은 소설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이것은 순례의 길에 주님을 따라가고 말씀을 붙쫓아가는 열쇠임을 보여준다.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일시적인 것이 있고 시험 같은 것에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이 있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믿음이 있다. 그러니 순례의 길에 자신의 양심과 삶을 지탱해주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우리는 점검하게 되고 순결한 믿음을 지니게 되길 사모하게 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순례자인 크리스천은 천국을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고난이 시작된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고향을 떠나서 부름을 받아 결단하고 나섰는데 행복한 길이 열리지 않는다. 전도자의 지시를 받고 나섰지만 불화살이 그를 공격하고 죄악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함께 떠난 동료가 낙심하여 되돌아가는 일도 발생한다. 원수들이 습격하고 괴물들이 공격하여 그를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내면적으로도 다양한 공격이 그를 장악하려고 한다.
이런 순례의 여정을 보며 복음의 의미와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복음은 우리의 외면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인생의 조건을 개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과 인격을 바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 땅에서 큰소리치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이 땅에 많이 우는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 믿는다고 육적인 시온의 대로가 펼쳐지는 게 아니다. 물론 영적인 시온의 대로는 펼쳐지지만 그 길을 걸어감에 우리가 싸워야 될 싸움이 있고 감당해야 될 고난과 시련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복음과 함께 부흥하고 복음과 함께 성공하라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복음과 함께 철저히 고난의 길로 행하라고 한다. 복음은 천국행 티켓, 심리치료제, 보험금 등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영혼이 변하는 것이고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으로 변화 받은 자는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않고 시련과 유혹과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다. 그럼에도 주님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다.
믿음의 흔적은 영원하다
성도가 홀로 이 길을 걷는다면 너무 외롭고 지치고 힘겹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생이든 선배이든 후배이든 동기이든 가족이든 함께 어깨를 같이하여 완주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을 붙여 주신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이 한 사람이 걷는 것보다 훨씬 낫다. 크리스천 또한 동역자와 동행을 한다. 한 명이 순교를 하지만 또 다른 동역자가 그와 함께 걸어간다. 그러니 오늘 나와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우습에 여기는 자들이 있다. 순례의 길을 떠나는 그를 보며 가족마저 어리석다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할 자라고 저주까지 한다. 그러나 후에 그의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의 믿음과 승리와 인내와 소망이 자랑스럽게 전달된다. 순교자의 죽음과 헌신과 사랑도 죽일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죽음 후에 그의 희생이 기념되어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마을도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믿음은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믿음은 열매를 맺히게 되어 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나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천로역정이라면 아름다운 믿음의 흔적들이 새겨질 것이다. 반대로 힘들고 어렵다고 그 자리를 떠나고 포기하면 불명예스러운 흔적이 남겨질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처음엔 가족들도 크리스천을 비난하지만 후에 가족이 그의 믿음의 길을 따라 함께 순례를 하고 다른 사람들도 감동하여 천국을 찾아가는 것처럼 믿음의 씨앗은 믿음의 열매를 맺히게 된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용기를 가지고 사명의 길을 걷고 순결한 믿음으로 살아가길 소망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죽을 때까지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주님의 품에 거할 때까지 신실하게 살아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