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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리스도인, 부자로 살아도 되는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김영봉/IVP/[송광택]
일찍이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에서 돈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이야기한 후, “돈은 보다 큰 목표를 위해서 붙잡혀야 하고, 복종해야 하며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의 물질 만능주의를 슬퍼하면서, “우리 생활의 진정한 ‘법’은 부와 물질의 힘이라는 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은 단순히 불행이라기 보다는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우상을 향하여 아니라고 소리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돈을 그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돈을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단순한 삶을 제안한다. 사실 그는 삶의 단순성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단순한 삶의 서약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와 믿음에 관한 구절은 약 500구절이지만, 돈과 소유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은 약 이천 구절에 이른다. 쉐일러 매튜스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하시지 않았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도 예수님께서 재물의 영적 위험을 크게 강조하셨다면, 지극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와 돈의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논의된 ‘뜨거운 감자’였다. 초대교회의 문서 <디다케>(12사도의 교훈)는 사람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해야만 한다고 했다. 생명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재물이 있는 자는 곤궁한 자에게 기꺼이 거저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청하는 모든 이에게 주고서 되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각자의 선물들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디다케>는 지상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재물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쓰라고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유 중심의 이교 세계관에 반(反)해서 신자들은 재화를 나누는 것을 덕으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한편 2세기의 헤르마스 의하면, 재산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긁어모으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답을 사지 말고 곤경에 처한 영혼들을 사시오...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재산과 가옥을 이런 전답과 가옥에다 사용하시오.”
중요한 초대교회 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자는, 하나님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라도 하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행복은 이웃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 보다 많이 갖고 싶은 욕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소유하거나 자기 아랫사람들을 꺾어 누르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웃의 짐을 져 준다면, 자기의 풍족한 것으로 곤궁한 사람을 도울 심정이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자기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신(神)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훈은 이교세계의 가치관과 행복관을 배격하고,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라틴 교부(敎父) 키프리안은 부의 선한 사용과 그 실천을 위해 수백 편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 자신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책임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방대한 자선행위를 열거하였고, 4-5세기의 교회지도자 암브로우스와 크리소스톰은 부는 원천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다. 즉, 부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고자 하신 재물을 소수의 사람이 강탈한 것이라고 보았다. 한 이교도 역사가(Ammianus Marcellinus)는 로마의 성직자에 대해 비평적으로 글을 썼는데, 기혼부인의 선물에 의해 부자가 된 성직자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성직자가 마차를 타고 다니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왕들의 식탁을 능가하는 식사 나오는 연회를 즐기는 것을 비난했다.
사실 초대교회의 경우, 가난한 자를 위한 연보(the Sunday collection for the poor)는 2세기에 존재하였고, 그후 여러 세기동안 지속되었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그 모금이 극빈자 매장, 고아와 노인 후원,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자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본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청부론과 청빈론을 넘어서는 가난과 부에 대한 영적 사색”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번영을 신실한 성도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 왔다.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나는 괜한 죄책감을 가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최근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기독교 서점가에 "돈"혹은 "부자"에 관한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그 중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반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 "부자 되는 법"에 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올라 있는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자 되는 것’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가히 ‘부 권하는 사회’라 할 만하다. 기독교 출판계도 이 풍조에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깨끗한 부"라는 말은 허구이다. 그가 비판하는 ‘청부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 가르기에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풍요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부자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저자는 이러한 청부론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의 상황을 매우 염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깨끗한 부자'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저자는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이 언제나 부유한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면적이고 철저하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부르심이다.”
저자는 진정한 복은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복 신학"은 근거를 잃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행복인 이유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함으로 의미로 충만해지고, 그 소명을 이루어 감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얻는 기쁨은 다음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고생도 어떤 유혹도 이 기쁨을 아는 사람을 흔들 수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히브리 11장에서 열거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모두 그렇게 살다 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만사형통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브라질의 주교 돔 헬더 까마라(Helder Camara)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는 부(富)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너무 과장하여 강조하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에야 나는 조금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부자로서 인간의 정을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이란 것은 사람의 눈에 자를 달아놓을 수 있으며 인간의 손과 눈과 입술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로날드 J. 사이더는 말하기를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무슨 행동을 하건 간에 가난한 이들을 못 본체 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 25장과 요한1서 3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불복종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배금사상 또는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팽배는 오늘의 현실이요,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는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세력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겉으로는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비판하지만, “뒷문으로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청지기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성경적 물질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논의가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소유와 분배>의 저자 룩 존슨(Luke T. Johnson)이 말한 바와 같이, “재물과 재물의 사용에 관한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점을 찾는다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당시의 사유재산제와 소유 증대의 경제질서를 거부하지 않으셨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예수님은 오직 재물이 잘못 쓰이는 것과 싸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현실적 상황에서 재산의 소유를 당연시하였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는 부유한 여인들에 의해 섬김을 받았으며(눅 8:2이하; 10:38이하 참고), 탕자에 대한 비유는 재산 소유(사유재산)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황금’이 하나님과 대립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치셨다(마 6:24).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선전포고를 내리셨다. 재물을 아람어로 ‘맘몬’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맘몬이 적대되는 신이라고 선고했다. 즉 예수님은 ‘맘몬’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한 대조적 존재’로, 선택의 대상으로,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주인’으로 설정하셨다. 한마디로 ‘맘몬’은 하나의 경쟁 신(a rival god)으로 묘사되었다. 엘룰(J. Ellul)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의 수사학적 어법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교회 현장에서의 체험과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해 온 주된 흐름에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본서가 한국교회를 위해 올바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자 김영봉
기독교 대한 감리회 목사 협성대학교 신학 대학 신약학 교수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 시작 미국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캐나다 해밀톤에 있는 맥매스터대학교대학원 종교학부에서 신약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 뉴저지 벨마연합감리교회 목사 역서 [이해를 위한 신약성서 연구] [공관복음서 기적의 의미] [예수의 치유이적 해석] 등
일찍이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에서 돈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이야기한 후, “돈은 보다 큰 목표를 위해서 붙잡혀야 하고, 복종해야 하며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토마스 머튼은 현대의 물질 만능주의를 슬퍼하면서, “우리 생활의 진정한 ‘법’은 부와 물질의 힘이라는 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것은 단순히 불행이라기 보다는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우상을 향하여 아니라고 소리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돈을 그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돈을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단순한 삶을 제안한다. 사실 그는 삶의 단순성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단순한 삶의 서약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와 믿음에 관한 구절은 약 500구절이지만, 돈과 소유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은 약 이천 구절에 이른다. 쉐일러 매튜스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하시지 않았다. 비교적 단순한 사회에서도 예수님께서 재물의 영적 위험을 크게 강조하셨다면, 지극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와 돈의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논의된 ‘뜨거운 감자’였다. 초대교회의 문서 <디다케>(12사도의 교훈)는 사람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해야만 한다고 했다. 생명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재물이 있는 자는 곤궁한 자에게 기꺼이 거저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청하는 모든 이에게 주고서 되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각자의 선물들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디다케>는 지상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재물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쓰라고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유 중심의 이교 세계관에 반(反)해서 신자들은 재화를 나누는 것을 덕으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한편 2세기의 헤르마스 의하면, 재산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긁어모으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답을 사지 말고 곤경에 처한 영혼들을 사시오...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재산과 가옥을 이런 전답과 가옥에다 사용하시오.”
중요한 초대교회 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자는, 하나님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라도 하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행복은 이웃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 보다 많이 갖고 싶은 욕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소유하거나 자기 아랫사람들을 꺾어 누르는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웃의 짐을 져 준다면, 자기의 풍족한 것으로 곤궁한 사람을 도울 심정이 있다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자기 혜택을 받는 이들에게 신(神)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훈은 이교세계의 가치관과 행복관을 배격하고,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라틴 교부(敎父) 키프리안은 부의 선한 사용과 그 실천을 위해 수백 편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 자신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책임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방대한 자선행위를 열거하였고, 4-5세기의 교회지도자 암브로우스와 크리소스톰은 부는 원천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다. 즉, 부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고자 하신 재물을 소수의 사람이 강탈한 것이라고 보았다. 한 이교도 역사가(Ammianus Marcellinus)는 로마의 성직자에 대해 비평적으로 글을 썼는데, 기혼부인의 선물에 의해 부자가 된 성직자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성직자가 마차를 타고 다니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왕들의 식탁을 능가하는 식사 나오는 연회를 즐기는 것을 비난했다.
사실 초대교회의 경우, 가난한 자를 위한 연보(the Sunday collection for the poor)는 2세기에 존재하였고, 그후 여러 세기동안 지속되었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그 모금이 극빈자 매장, 고아와 노인 후원,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자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본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청부론과 청빈론을 넘어서는 가난과 부에 대한 영적 사색”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번영을 신실한 성도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 왔다.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나는 괜한 죄책감을 가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최근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기독교 서점가에 "돈"혹은 "부자"에 관한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그 중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반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 "부자 되는 법"에 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올라 있는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자 되는 것’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가히 ‘부 권하는 사회’라 할 만하다. 기독교 출판계도 이 풍조에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깨끗한 부"라는 말은 허구이다. 그가 비판하는 ‘청부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 가르기에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풍요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부자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저자는 이러한 청부론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의 상황을 매우 염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깨끗한 부자'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저자는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이 언제나 부유한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면적이고 철저하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부르심이다.”
저자는 진정한 복은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복 신학"은 근거를 잃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행복인 이유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함으로 의미로 충만해지고, 그 소명을 이루어 감으로 자신의 존재가 영원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얻는 기쁨은 다음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고생도 어떤 유혹도 이 기쁨을 아는 사람을 흔들 수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히브리 11장에서 열거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 모두 그렇게 살다 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만사형통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브라질의 주교 돔 헬더 까마라(Helder Camara)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는 부(富)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너무 과장하여 강조하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에야 나는 조금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부자로서 인간의 정을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이란 것은 사람의 눈에 자를 달아놓을 수 있으며 인간의 손과 눈과 입술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로날드 J. 사이더는 말하기를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무슨 행동을 하건 간에 가난한 이들을 못 본체 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 25장과 요한1서 3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불복종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배금사상 또는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팽배는 오늘의 현실이요, 현대의 황금만능주의는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세력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겉으로는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비판하지만, “뒷문으로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청지기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성경적 물질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 논의가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소유와 분배>의 저자 룩 존슨(Luke T. Johnson)이 말한 바와 같이, “재물과 재물의 사용에 관한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점을 찾는다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당시의 사유재산제와 소유 증대의 경제질서를 거부하지 않으셨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예수님은 오직 재물이 잘못 쓰이는 것과 싸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현실적 상황에서 재산의 소유를 당연시하였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는 부유한 여인들에 의해 섬김을 받았으며(눅 8:2이하; 10:38이하 참고), 탕자에 대한 비유는 재산 소유(사유재산)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황금’이 하나님과 대립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치셨다(마 6:24).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에 대해 선전포고를 내리셨다. 재물을 아람어로 ‘맘몬’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맘몬이 적대되는 신이라고 선고했다. 즉 예수님은 ‘맘몬’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한 대조적 존재’로, 선택의 대상으로, 그리고 ‘양립할 수 없는 두 주인’으로 설정하셨다. 한마디로 ‘맘몬’은 하나의 경쟁 신(a rival god)으로 묘사되었다. 엘룰(J. Ellul)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의 수사학적 어법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교회 현장에서의 체험과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해 온 주된 흐름에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본서가 한국교회를 위해 올바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자 김영봉
기독교 대한 감리회 목사 협성대학교 신학 대학 신약학 교수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 시작 미국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캐나다 해밀톤에 있는 맥매스터대학교대학원 종교학부에서 신약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 뉴저지 벨마연합감리교회 목사 역서 [이해를 위한 신약성서 연구] [공관복음서 기적의 의미] [예수의 치유이적 해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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