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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부르심과 순종의 이야기
하나님의 산 역사 갈대상자/김영애/두란노/[송광택]
한동대학교.
이제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 또한 그 이름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꿈의 산실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는 드라마의 현장이기도 한다.
책의 제목인 <갈대상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애굽에서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날 때 다 죽임을 당했던 거처럼 한동대에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갈대상자를 통해 모세를 지켜 주셨듯이 한동대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에 의해 순간순간 보호를 받았다.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가 후일에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가 되었듯이 새벽이슬 같은 이 시대의 정직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양육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손수 엮으시는 이 한동대 갈대상자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갈대상자>는 부르심과 순종의 이야기이다.
저자 김영애 권사의 남편 김영길 박사의 고향은 경북 안동 지례 마을이다(현재는 임하댐으로 수몰된 지역임). 김 박사가 기차나 자동차, 그리고 큰 신작로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한다.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던 김영길 소년은 앞으로 어른이 되면 멋진 비행기를 만드는 과학자가 되리라고 꿈을 키웠다.
김 박사 잡안의 가훈은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이다. 처세술이 능하고 영리하되 인간성이 못된 사람보다 좀 어수룩해도 어진 사람으로 살 것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받고 살았던 것이다.
김영애 권사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대구 대봉제일교회에 다녔고, 복음에 철저하신 이성택 목사님을 존경하였으며, 교회 일에는 모범생처럼 항상 열심이었다. 김 권사는 고려대 김종길 교수의 소개로 김 박사와 서신을 주고 받은 지 1년만에 결혼을 했다. 김 박사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 그는 아내에게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에는 과학적, 논리적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그후 슈퍼마켓 한쪽의 서가에서 발견한 할 린지(Hall Lyndsey)의 책을 읽고 성경의 진리와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김 박사는 자신이 깨달은 복음 진리를 아내에게 설명하였고, 아내 김영애 권사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명목상의 신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어찌하여 오늘 저녁 이 진리를 우리 부부에게 동시에 깨닫게 해 주십니까? 저희들의 삶과 가정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소서”(42쪽).
후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김 박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부탁으로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사로 나서게 되었고, 1980년 8월 사흘에 걸쳐, “창조냐, 진화냐” 세미나가 열렸다. 사흘 동안 4천 명이 넘는 분들이 참석했다. 이 세미나는 교계와 학계에 커다란 파문과 도전을 던지며 성황리에 끝났다. 드디어 1981년 1월에는 전경련 회관에서 300여명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한국 창조과학회를 창립했다. 김 박사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저자 부부는 1994년 1얼 20일 저녁 식사 후 모처럼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손진곤 변호사의 전화였다. 포항에 한동대라는 종합대학교가 세워지는데, 그 대학에서 김 박사를 초대 총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손 변호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학교 건설현장도 둘러보고 설립자도 한번 만나 보라는 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김 박사는 포항행 비행기를 탔다.
1994년 1월말 김 박사가 두 번째로 한동대를 방문할 때는 김 권사도 동행했다. 건설관계자는 지하공동구와 모든 기계를 자동화할 동력실의 중앙관제소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의 눈길을 끈 것은 학교 입구에 세워질 대학교회 배치도였다.
김 박사는 학교 관계자에게 물었다. “학교 이름을 왜 한동이라고 했지요? 기독교정신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도 많이 있을 텐데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학교명을 공모했는데, 무려 130여 개가 넘는 이름이 들어왔고, 설립 본부 측에서 몇 개를 선정해서 이사장에게 들고 갔다. 이사장은 비교적 아래쪽에 적힌 이름을 짚었다.
설립 본부는 학교 이름을 한동으로 정하고 응모자에게 연락을 했다.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고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교회에 가시고 안 계신다고 했다.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버님이 뭐하시는 분이시냐?" "목사님이세요"
그분은 구룡포 어촌에서 자그마한 교회를 개척하신 우선화 목사님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교회에서 꼭 써야 할 돈 100만원이 필요해서 학교 이름을 응모했던 목사님 내외분은 그날도 교회에 가서 그 이름이 뽑히기를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그 이름이 이사장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목사님 내외분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동대는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개입하시는 대학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에 우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한동은 더 이상 평범하거나 촌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20쪽).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마음의 흔들림 때문에 하나님의 확증을 요구하지도 했지만, 김 박사 내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김 박사는 학문적인 탁월성과 사명감 있는 교수들을 찾아 나섰다.
<갈대상자>는 고난을 감당한 승리의 이야기이다.
한동대의 개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믿으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과학자이자 KAIST 교수였던 김영길 장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한동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주위 사람들의 방해와 재정적인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함으로서 수많은 질곡과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저자는 길목 길목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할지라도 가장 안전하다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되어갔다.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저자는 탄성을 질렀다. "와! 하나님, 굉장하시네! 정말 살아 계시네!"
하나님은 한동대를 세우실 때, 김영길 총장에게 <느헤미야서>를 계속 읽게 하셨다. 실제로 김영길 총장은 온갖 반대 세력들의 흉계와 모함, 각종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시킨 느헤미야의 완벽한 분신이었다. 그리고 죠지 뮬러처럼 김영길 총장도 돈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구했고 그때마다 수천만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르는 거액들이 통장으로 입금되곤 하였다. 김영길 총장과 김영애 권사도 인간이기에 학교 재정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심한 좌절감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절묘하게 그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과학자로서, KAIST 교수로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전혀 몰랐던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김 총장은 자신이 가는 길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인식하고 조금도 후회없이 그 좁은 길을 묵묵히 걸었다.
만성적인 재정의 허덕임 속에서 노심초사하던 김 총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이었다. 원주민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기 위하여 컴퓨터 10대를 가지고 피지 선교여행을 떠났던 한동대 학생들 중에 강경식, 권영민, 두 학생이 땅을 파는 작업을 하고 나서 몸에 묻은 흙을 닦기 위하여 방파제로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파도에 순식간에 휩쓸려 버린 것이었다.
김 총장은 다른 어려움은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따지듯 매달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사야 61장 3절> 말씀을 그에 대한 응답으로 주셨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은 강경식군의 어머니는 오히려 김 총장을 위로하였다. "경식이는 늘 선교하겠다고 말해 왔어요. 경식이를 선교지에서 불러 가심은 저희 가문의 영광입니다. 지금까지 경식이를 잘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한동대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권영민군의 어머니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말했다. "파도를 일으키며 재우기도 하시고, 바다 속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영민이를 살리시려면 요나처럼 살리실 수 있었겠지요. 천국과 부활을 아들에게 가르쳐 온 제가 어찌 불신자처럼 절망하겠습니까?"
김영길 총장은 학교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금통장, 심지어는 두 부부의 노년을 위해 은밀하게 아껴두었던 카이스트의 퇴직금까지 털어서 학교 재정에 보태야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의 안정적인 것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아파하던 이영덕 이사장(전 국무총리)도 며칠 후 33년 동안 봉직했던 서울대 퇴직금을 학교에 전액 기부한다.
그런 희생과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한동대와 김 총장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냉혹하기만 했다. 결국 2001년 5월 11일, 김영길 총장과 오성연 부총장이 재정비리의 죄명으로 법정 구속되어 경주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김 총장이 구속된지 나흘째 되는 날, <스승의 날>을 맞은 한동대 학생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학교 채플에 모여들었다. 학생 1500여명은 "총장님, 부총장님, 사랑합니다!" 라는 현수막을 버스에 두르고 30대의 버스에 몸을 싣고 김 총장이 수감되어 있는 경주구치소로 향했다. 거기에 교수와 학부형까지 합쳐 1800여명은 구치소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교육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상을 초월한 행렬이 구치소 앞으로 이어졌다.
<갈대상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김 총장의 수감 번호 433이었다. 그는 인간적인 수모를 느낄만한 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헤를 체험했다. 그는 수첩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고 질주해 온 나를 주님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이런 기이한 장소에서 이런 방법으로 나를 자유케 하시며 나와 독대하고 계신다. 이곳은 나의 기도 처소요, 주님과 만나는 골방이다.” 그는 수갑을 겹으로 차고 포승줄에 묶여서 주님이 당하신 고통의 무게를 느꼈다. 본서에서 독자는 “한국의 새로운 기적의 산실”인 한동대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저자 김영애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 뉴욕주립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1993년까지 이화여대 특수교육과에서 강의했다.
한동대학교.
이제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 또한 그 이름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꿈의 산실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는 드라마의 현장이기도 한다.
책의 제목인 <갈대상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애굽에서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날 때 다 죽임을 당했던 거처럼 한동대에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갈대상자를 통해 모세를 지켜 주셨듯이 한동대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에 의해 순간순간 보호를 받았다.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가 후일에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가 되었듯이 새벽이슬 같은 이 시대의 정직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양육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손수 엮으시는 이 한동대 갈대상자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갈대상자>는 부르심과 순종의 이야기이다.
저자 김영애 권사의 남편 김영길 박사의 고향은 경북 안동 지례 마을이다(현재는 임하댐으로 수몰된 지역임). 김 박사가 기차나 자동차, 그리고 큰 신작로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한다.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던 김영길 소년은 앞으로 어른이 되면 멋진 비행기를 만드는 과학자가 되리라고 꿈을 키웠다.
김 박사 잡안의 가훈은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이다. 처세술이 능하고 영리하되 인간성이 못된 사람보다 좀 어수룩해도 어진 사람으로 살 것을 평생의 가르침으로 받고 살았던 것이다.
김영애 권사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대구 대봉제일교회에 다녔고, 복음에 철저하신 이성택 목사님을 존경하였으며, 교회 일에는 모범생처럼 항상 열심이었다. 김 권사는 고려대 김종길 교수의 소개로 김 박사와 서신을 주고 받은 지 1년만에 결혼을 했다. 김 박사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 그는 아내에게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에는 과학적, 논리적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그후 슈퍼마켓 한쪽의 서가에서 발견한 할 린지(Hall Lyndsey)의 책을 읽고 성경의 진리와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김 박사는 자신이 깨달은 복음 진리를 아내에게 설명하였고, 아내 김영애 권사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명목상의 신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어찌하여 오늘 저녁 이 진리를 우리 부부에게 동시에 깨닫게 해 주십니까? 저희들의 삶과 가정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소서”(42쪽).
후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김 박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부탁으로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사로 나서게 되었고, 1980년 8월 사흘에 걸쳐, “창조냐, 진화냐” 세미나가 열렸다. 사흘 동안 4천 명이 넘는 분들이 참석했다. 이 세미나는 교계와 학계에 커다란 파문과 도전을 던지며 성황리에 끝났다. 드디어 1981년 1월에는 전경련 회관에서 300여명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한국 창조과학회를 창립했다. 김 박사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저자 부부는 1994년 1얼 20일 저녁 식사 후 모처럼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손진곤 변호사의 전화였다. 포항에 한동대라는 종합대학교가 세워지는데, 그 대학에서 김 박사를 초대 총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손 변호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학교 건설현장도 둘러보고 설립자도 한번 만나 보라는 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김 박사는 포항행 비행기를 탔다.
1994년 1월말 김 박사가 두 번째로 한동대를 방문할 때는 김 권사도 동행했다. 건설관계자는 지하공동구와 모든 기계를 자동화할 동력실의 중앙관제소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의 눈길을 끈 것은 학교 입구에 세워질 대학교회 배치도였다.
김 박사는 학교 관계자에게 물었다. “학교 이름을 왜 한동이라고 했지요? 기독교정신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도 많이 있을 텐데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학교명을 공모했는데, 무려 130여 개가 넘는 이름이 들어왔고, 설립 본부 측에서 몇 개를 선정해서 이사장에게 들고 갔다. 이사장은 비교적 아래쪽에 적힌 이름을 짚었다.
설립 본부는 학교 이름을 한동으로 정하고 응모자에게 연락을 했다.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고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교회에 가시고 안 계신다고 했다.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버님이 뭐하시는 분이시냐?" "목사님이세요"
그분은 구룡포 어촌에서 자그마한 교회를 개척하신 우선화 목사님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교회에서 꼭 써야 할 돈 100만원이 필요해서 학교 이름을 응모했던 목사님 내외분은 그날도 교회에 가서 그 이름이 뽑히기를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그 이름이 이사장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목사님 내외분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동대는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개입하시는 대학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에 우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한동은 더 이상 평범하거나 촌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20쪽).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마음의 흔들림 때문에 하나님의 확증을 요구하지도 했지만, 김 박사 내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김 박사는 학문적인 탁월성과 사명감 있는 교수들을 찾아 나섰다.
<갈대상자>는 고난을 감당한 승리의 이야기이다.
한동대의 개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믿으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과학자이자 KAIST 교수였던 김영길 장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한동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주위 사람들의 방해와 재정적인 온갖 어려움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함으로서 수많은 질곡과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저자는 길목 길목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할지라도 가장 안전하다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되어갔다.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저자는 탄성을 질렀다. "와! 하나님, 굉장하시네! 정말 살아 계시네!"
하나님은 한동대를 세우실 때, 김영길 총장에게 <느헤미야서>를 계속 읽게 하셨다. 실제로 김영길 총장은 온갖 반대 세력들의 흉계와 모함, 각종 협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시킨 느헤미야의 완벽한 분신이었다. 그리고 죠지 뮬러처럼 김영길 총장도 돈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구했고 그때마다 수천만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르는 거액들이 통장으로 입금되곤 하였다. 김영길 총장과 김영애 권사도 인간이기에 학교 재정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심한 좌절감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절묘하게 그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과학자로서, KAIST 교수로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전혀 몰랐던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김 총장은 자신이 가는 길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인식하고 조금도 후회없이 그 좁은 길을 묵묵히 걸었다.
만성적인 재정의 허덕임 속에서 노심초사하던 김 총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이었다. 원주민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기 위하여 컴퓨터 10대를 가지고 피지 선교여행을 떠났던 한동대 학생들 중에 강경식, 권영민, 두 학생이 땅을 파는 작업을 하고 나서 몸에 묻은 흙을 닦기 위하여 방파제로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파도에 순식간에 휩쓸려 버린 것이었다.
김 총장은 다른 어려움은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따지듯 매달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사야 61장 3절> 말씀을 그에 대한 응답으로 주셨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은 강경식군의 어머니는 오히려 김 총장을 위로하였다. "경식이는 늘 선교하겠다고 말해 왔어요. 경식이를 선교지에서 불러 가심은 저희 가문의 영광입니다. 지금까지 경식이를 잘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한동대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권영민군의 어머니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말했다. "파도를 일으키며 재우기도 하시고, 바다 속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영민이를 살리시려면 요나처럼 살리실 수 있었겠지요. 천국과 부활을 아들에게 가르쳐 온 제가 어찌 불신자처럼 절망하겠습니까?"
김영길 총장은 학교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금통장, 심지어는 두 부부의 노년을 위해 은밀하게 아껴두었던 카이스트의 퇴직금까지 털어서 학교 재정에 보태야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의 안정적인 것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아파하던 이영덕 이사장(전 국무총리)도 며칠 후 33년 동안 봉직했던 서울대 퇴직금을 학교에 전액 기부한다.
그런 희생과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한동대와 김 총장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냉혹하기만 했다. 결국 2001년 5월 11일, 김영길 총장과 오성연 부총장이 재정비리의 죄명으로 법정 구속되어 경주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김 총장이 구속된지 나흘째 되는 날, <스승의 날>을 맞은 한동대 학생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학교 채플에 모여들었다. 학생 1500여명은 "총장님, 부총장님, 사랑합니다!" 라는 현수막을 버스에 두르고 30대의 버스에 몸을 싣고 김 총장이 수감되어 있는 경주구치소로 향했다. 거기에 교수와 학부형까지 합쳐 1800여명은 구치소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교육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상을 초월한 행렬이 구치소 앞으로 이어졌다.
<갈대상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김 총장의 수감 번호 433이었다. 그는 인간적인 수모를 느낄만한 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헤를 체험했다. 그는 수첩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고 질주해 온 나를 주님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이런 기이한 장소에서 이런 방법으로 나를 자유케 하시며 나와 독대하고 계신다. 이곳은 나의 기도 처소요, 주님과 만나는 골방이다.” 그는 수갑을 겹으로 차고 포승줄에 묶여서 주님이 당하신 고통의 무게를 느꼈다. 본서에서 독자는 “한국의 새로운 기적의 산실”인 한동대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저자 김영애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 뉴욕주립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1993년까지 이화여대 특수교육과에서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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