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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유감
야베스의 기도/브루스 윌킨슨/마영례/디모데/[뉴스앤조이 제공]
요즘도 ‘야베스(Jabez)의 축복 기도’가 인기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브루스 윌킨스 著)라는 책이 나와서 미국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아직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축복을 좋아하나 봅니다. 야베스에 대한 성경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일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야베스에 대한 구약 성경은 여기와 역대상 2장 55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나머지 야베스라는 이름이 구약에 많이 나오는데 한글로 번역하면서 야베스로 번역했기 때문이며 나머지 야베스는 모두 원 이름이 이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역대상 4장 9, 10절에 나와 있는 것이 전부이고 동 책 장 55절의 야베스까지 동일 인물이라 해도 2장 55절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없는 절입니다. 따라서 야베스에 대한 성경에서의 언급은 역대상 4장 9절과 10절이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핵심은 그가 받은 ‘축복’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다
저는 이 책에서 야베스가 구하여 얻은 것보다는 오히려 그 앞에 오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즉 '그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는 것과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그의 인품이나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성품이나 그의 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데 오직 그처럼 기도하여 축복을 받자고 하는 것은 뭔가 설득력이 모자랍니다.
그 이외의 것은 매우 평범한 구약적인 기도입니다. 즉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와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매우 평범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그의 기도에서 몇 번 묵상 해 보아도 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읽어보아도 특별히 더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저는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성이 그 책 저자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깨달음이 모자란다 해도 무엇인가 허전합니다. 오히려 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는 큰 이상을 품고 미래의 나를 그리면서 활기 있게 믿음을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나에게는 도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축복을 받았다는 결과보다는 은혜의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 즉 바울의 목숨을 걸었던 기도, 모세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고통 받고 있을 때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스데반 목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한 기도, 베드로 사도의 고난을 기뻐하는 기도에서 오히려 더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린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통하여서나 앞서 가신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나 지금 믿음의 경주를 하시는 분들 중에 매우 많다고 믿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존귀하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존귀한 자라는 뜻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가 축복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존귀한 자 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으로 간 것과 같은 축복을 누렸음 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지경을 넓히사' 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시대인 구약시대와 은혜의 시대인 신약시대에 분명 그 축복의 개념을 달리 했습니다. 구약의 축복은 주시는 축복이지만 신약에서는 오히려 가져가십니다. 주셨던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받는 축복의 시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시대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축복,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축복,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받는 온갖 외로움과 고통과 손해 받음과 멸시와 조롱을 당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는 축복이 아닙니까? 새로운 약속은 낡은 약속보다 우선 합니다. 낡은 계약서를 가지고 새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대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야베스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만이 갖고 있던 성품이나 무슨 훌륭한 행동이나 모세나 다윗처럼 본을 보인 것이 있어서 그를 본받자고 하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나의 인생여정에서 그를 본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와 바울이 이야기한 축복은 영적 축복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를 보면 “복(blessing)이란 단어는 본문에(시 128편) 나타난 대로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복이란 결코 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뜻밖의 운수대통이나 길일(吉日)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영혼의 내적인 힘이다. 행복도 거기서 창출되고. 어떤 생명체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인간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의 외부가 아닌 영혼의 중심부를 겨냥한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에너지요, 그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결국 복이란 가장 깊고도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삶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복은 어떤 생명체도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의 활력을 말한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없이 추구하게 하고 결국은 파멸케 하고 죄를 짓게 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능력 등의 외적인 것들을 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이요, 쉼이요, 만족이요, 함께 하심 다시 말하면 동행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것이요, 비웃는 것이요, 하찮은 것이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도 부러워하는 것이요, 멋있다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요, 닮고 싶으나 닮을 수 없어서 오히려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에는 눈이 멀면서 축복을 받았다는 「야베스의 기도」에는 흥분하고 열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나 많은 성경말씀을 기록한 바울의 주장을 보면 오히려 '십자가를 지라, 제자의 삶을 살아라, 심하게는 군사처럼 살아가라' 하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축복을 얘기했고 사도 바울도 축복을 얘기했지만 대부분은 영적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공짜로 받은 구원의 축복 대신에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서 주를 위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주님은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폐하여졌지만 주님께서는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죄와 상관이 없으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림으로 율법을 완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를 위하여 예수님의 도와 그의 부탁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믿음에 맞게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율법을 완성한 예수 따라 우리도 자신을 떠맡기는 삶 살아야
그리고 비록 폐하여진 율법에서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율법이나 다른 사람의 거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얻기 위하여, 믿음을 키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 완성에 우리 자신도 떠맡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원도 얻고 축복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야베스와 같이 매우 드물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섬기는 자는 세상이 너를 미워할 것이다 하는 말씀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목사님이 야베스 보다 못해서 돌에 맞는 죽음을 당했을까요? 오히려 천국 시민훈련을 통하여 믿음의 성장(growth)을 위하여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5) 분명히 율법에서 이제는 자유 하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은혜를 깨달은 자의 감사로 스스로 자원하여 종이 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왕자가 백성들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었다면 그 종은 비참한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봉사의 기쁨이나 주는 자의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었다면, 가난해서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종이 되었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처럼 어쩔 수없이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원하여 종이 된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자유하나 스스로 기쁘게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축복은 구약적인 축복이요, 율법적인 축복이요 값싼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라면 많은 나라의 대통령이나 세계 100대 부자들이 이미 다 갖고 갔습니다. 조그만 것을 얻었다고 축복이라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만 값싼 축복에 만족해 자만하거나 거만하거나 우리 사랑하는 이웃, 연약한 이웃의 거침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받았다는 축복이 많을수록 더욱 겸손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의 분량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복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그런 값싼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축복은 이 세상에서 계속 목마르게 하고 끝도 없이 추구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거침이 되는 그런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축복은 감격의 축복이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아우슈비츠 독 가스실에서도 위로를 받으며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축복이요, 카타콤(고대 로마의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지하 교회 또는 그들의 지하 공동묘지)의 어두움 속에서도 기뻐 찬송할 수 있는 그런 축복이요, 우리 주님 모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할 수 있는 축복이요, 주님이 나 때문에 영광을 받는다면 멸시 천대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복음 밖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축복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후 6:10)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저서 「기도」에서 “알다시피, 예수님은 사람들을 속박해 두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해방시키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로써, 사람들을 우리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금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복 받는 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그만큼 거짓된 믿음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행 7:55~56)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온 몸에 감동적인 전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이 스데반의 순교 순간에 우편에서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벌떡 일어나 양손을 크게 벌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때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스데반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하면서 "오, 내 사랑하는 스데반아, 이제 네가 땅에서의 사명을 다 했으므로 어서 오너라. 너는 나를 위하여 너의 소명을 다하였구나. 이제 이곳에서 네가 뿌린 씨앗들이 어떻게 싹이 나서 새로운 열매를 맺는지 함께 보자꾸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꾸나"하면서 진정 기쁘게 그를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축복은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고전 10:16, 표준새번역)라고 말씀하시면서 값싼 축복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축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축복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이 온 후로는 스데반이 받은 축복이, 사도 바울이 살아간 축복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이 우리들이 이 인생에서 본받기를 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야베스가 받은 축복보다는 더 멋진 축복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저자 브루스 윌킨슨 (Bruce H. Wilkinson)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경 교사로서, 뉴욕 타임즈 넘버원 베스트셀러인 <야베스의 기도>, <포도나무의 비밀>, <영적 도약의 경험>의 저자이며, 그 외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또한 Walk Thru the Bible사역과 Global Vision Resources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2004년 현재 조지아 주에 살고 있다.
뉴스앤조이 제공
정성은 기자
요즘도 ‘야베스(Jabez)의 축복 기도’가 인기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브루스 윌킨스 著)라는 책이 나와서 미국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아직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축복을 좋아하나 봅니다. 야베스에 대한 성경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일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야베스에 대한 구약 성경은 여기와 역대상 2장 55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나머지 야베스라는 이름이 구약에 많이 나오는데 한글로 번역하면서 야베스로 번역했기 때문이며 나머지 야베스는 모두 원 이름이 이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역대상 4장 9, 10절에 나와 있는 것이 전부이고 동 책 장 55절의 야베스까지 동일 인물이라 해도 2장 55절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없는 절입니다. 따라서 야베스에 대한 성경에서의 언급은 역대상 4장 9절과 10절이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핵심은 그가 받은 ‘축복’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다
저는 이 책에서 야베스가 구하여 얻은 것보다는 오히려 그 앞에 오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즉 '그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는 것과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그의 인품이나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성품이나 그의 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데 오직 그처럼 기도하여 축복을 받자고 하는 것은 뭔가 설득력이 모자랍니다.
그 이외의 것은 매우 평범한 구약적인 기도입니다. 즉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와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매우 평범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그의 기도에서 몇 번 묵상 해 보아도 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읽어보아도 특별히 더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저는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성이 그 책 저자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깨달음이 모자란다 해도 무엇인가 허전합니다. 오히려 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는 큰 이상을 품고 미래의 나를 그리면서 활기 있게 믿음을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나에게는 도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축복을 받았다는 결과보다는 은혜의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 즉 바울의 목숨을 걸었던 기도, 모세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고통 받고 있을 때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스데반 목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한 기도, 베드로 사도의 고난을 기뻐하는 기도에서 오히려 더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보다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린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통하여서나 앞서 가신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나 지금 믿음의 경주를 하시는 분들 중에 매우 많다고 믿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존귀하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존귀한 자라는 뜻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가 축복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존귀한 자 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으로 간 것과 같은 축복을 누렸음 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지경을 넓히사' 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시대인 구약시대와 은혜의 시대인 신약시대에 분명 그 축복의 개념을 달리 했습니다. 구약의 축복은 주시는 축복이지만 신약에서는 오히려 가져가십니다. 주셨던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받는 축복의 시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시대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축복,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축복,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받는 온갖 외로움과 고통과 손해 받음과 멸시와 조롱을 당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는 축복이 아닙니까? 새로운 약속은 낡은 약속보다 우선 합니다. 낡은 계약서를 가지고 새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대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야베스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만이 갖고 있던 성품이나 무슨 훌륭한 행동이나 모세나 다윗처럼 본을 보인 것이 있어서 그를 본받자고 하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나의 인생여정에서 그를 본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와 바울이 이야기한 축복은 영적 축복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를 보면 “복(blessing)이란 단어는 본문에(시 128편) 나타난 대로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복이란 결코 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뜻밖의 운수대통이나 길일(吉日)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영혼의 내적인 힘이다. 행복도 거기서 창출되고. 어떤 생명체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력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인간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의 외부가 아닌 영혼의 중심부를 겨냥한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에너지요, 그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결국 복이란 가장 깊고도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삶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복은 어떤 생명체도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의 활력을 말한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없이 추구하게 하고 결국은 파멸케 하고 죄를 짓게 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능력 등의 외적인 것들을 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이요, 쉼이요, 만족이요, 함께 하심 다시 말하면 동행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것이요, 비웃는 것이요, 하찮은 것이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도 부러워하는 것이요, 멋있다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요, 닮고 싶으나 닮을 수 없어서 오히려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에는 눈이 멀면서 축복을 받았다는 「야베스의 기도」에는 흥분하고 열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나 많은 성경말씀을 기록한 바울의 주장을 보면 오히려 '십자가를 지라, 제자의 삶을 살아라, 심하게는 군사처럼 살아가라' 하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축복을 얘기했고 사도 바울도 축복을 얘기했지만 대부분은 영적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공짜로 받은 구원의 축복 대신에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서 주를 위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주님은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폐하여졌지만 주님께서는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죄와 상관이 없으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림으로 율법을 완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를 위하여 예수님의 도와 그의 부탁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믿음에 맞게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율법을 완성한 예수 따라 우리도 자신을 떠맡기는 삶 살아야
그리고 비록 폐하여진 율법에서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율법이나 다른 사람의 거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얻기 위하여, 믿음을 키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 완성에 우리 자신도 떠맡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원도 얻고 축복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야베스와 같이 매우 드물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섬기는 자는 세상이 너를 미워할 것이다 하는 말씀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목사님이 야베스 보다 못해서 돌에 맞는 죽음을 당했을까요? 오히려 천국 시민훈련을 통하여 믿음의 성장(growth)을 위하여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5) 분명히 율법에서 이제는 자유 하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은혜를 깨달은 자의 감사로 스스로 자원하여 종이 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왕자가 백성들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었다면 그 종은 비참한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봉사의 기쁨이나 주는 자의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었다면, 가난해서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종이 되었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처럼 어쩔 수없이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원하여 종이 된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자유하나 스스로 기쁘게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축복은 구약적인 축복이요, 율법적인 축복이요 값싼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라면 많은 나라의 대통령이나 세계 100대 부자들이 이미 다 갖고 갔습니다. 조그만 것을 얻었다고 축복이라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지만 값싼 축복에 만족해 자만하거나 거만하거나 우리 사랑하는 이웃, 연약한 이웃의 거침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받았다는 축복이 많을수록 더욱 겸손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의 분량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복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그런 값싼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축복은 이 세상에서 계속 목마르게 하고 끝도 없이 추구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거침이 되는 그런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축복은 감격의 축복이요,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아우슈비츠 독 가스실에서도 위로를 받으며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축복이요, 카타콤(고대 로마의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지하 교회 또는 그들의 지하 공동묘지)의 어두움 속에서도 기뻐 찬송할 수 있는 그런 축복이요, 우리 주님 모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할 수 있는 축복이요, 주님이 나 때문에 영광을 받는다면 멸시 천대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복음 밖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축복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후 6:10)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저서 「기도」에서 “알다시피, 예수님은 사람들을 속박해 두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해방시키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로써, 사람들을 우리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금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복 받는 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그만큼 거짓된 믿음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행 7:55~56)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온 몸에 감동적인 전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이 스데반의 순교 순간에 우편에서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벌떡 일어나 양손을 크게 벌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때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스데반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하면서 "오, 내 사랑하는 스데반아, 이제 네가 땅에서의 사명을 다 했으므로 어서 오너라. 너는 나를 위하여 너의 소명을 다하였구나. 이제 이곳에서 네가 뿌린 씨앗들이 어떻게 싹이 나서 새로운 열매를 맺는지 함께 보자꾸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꾸나"하면서 진정 기쁘게 그를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축복은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고전 10:16, 표준새번역)라고 말씀하시면서 값싼 축복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축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축복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이 온 후로는 스데반이 받은 축복이, 사도 바울이 살아간 축복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이 우리들이 이 인생에서 본받기를 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야베스가 받은 축복보다는 더 멋진 축복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저자 브루스 윌킨슨 (Bruce H. Wilkinson)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경 교사로서, 뉴욕 타임즈 넘버원 베스트셀러인 <야베스의 기도>, <포도나무의 비밀>, <영적 도약의 경험>의 저자이며, 그 외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또한 Walk Thru the Bible사역과 Global Vision Resources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2004년 현재 조지아 주에 살고 있다.
뉴스앤조이 제공
정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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