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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타인이라는 지옥, 타인이라는 천국
재즈처럼 하나님은/도널드 밀러/윤종석/복있는 사람/[뉴스앤조이제공]
지겨운, 혹은 지겨울 것 같은 편견
언젠가 수잔 손탁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발랄한 경구 한 줄. “인간을 선한 인간, 악한 인간으로 나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세상에는 다만 매력적인 인간과 지겨운 인간이 있을 뿐이다.”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잡다한 책읽기를 해오면서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는 착한 글, 못된 글이 있는 게 아니라 매력적인 글과 지겨운 글이 있을 뿐이라고. 평소 기독교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데, 그 이유 역시 그 부류의 책들이 대체로 ‘지겨울 것’이라는 다소 교만한 판단 때문이다.
신앙적 글쓰기, 혹은 신앙인들의 글쓰기라는 게 대략 날로 악해져 가는 세상에 대한 장탄식으로 시작해서 결국 진부하고 우울한 자책형 둔사(遁辭)로 빠지거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대개 겪기 마련인 상처와 고통을 자신만의 것인 양 온통 울부짖으며 과장한 뒤 지금은 이렇게 저렇게 치유한데다가 남달리 ‘성공’까지 해서 잘 나가고 있다는 지극히 사사로운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일쑤이다.
나는 번번이 무슨 지도책이나 전화번호부를 펼쳐든 것처럼 지겹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교라는 소금물에 침수당한 듯 활력과 생기가 빠져나간 글,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거세당한 채 텅 빈 활자 혹은 몇 단계의 앙상한 공식만 남은 글, 누구 눈치를 보는지 겸손을 가장한 비굴함이 행간에서 묻어나는 글, 불특정 다수에게 감동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적당히 허리쯤에서 타협하는 글, 이제는 세상에서 물러나 ‘도’를 ‘득’한 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다시 세상을 굽어보며 가르치려 드는 글.
나는 그렇게 마냥 무릎 꿇거나 자책하거나 남 걱정이 지나친 글들이 솔직히 좀 지겹다. 싸워야 할 문제들은 고스란히 놔둔 채 너무 빨리 화해(사실은 봉합)와 치유(사실은 망각)의 영성 속으로 투항해 버리는 글도 지겹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한탄하던 비트겐슈타인에 기대어 말한다면, 신앙인들이 쓰는 언어의 한계가 곧 그 신앙의 한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신앙을 표현하는 도구인 동시에 그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글들이 틀렸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비슷해서 싫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신앙의 ‘차이’를 만드는 언어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타의에 의한 책읽기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은 타의에 의해 읽기 시작했다가 자의로 마무리한 책이다. 타의라 함은 다소 거절하기 힘든 서평원고 청탁을 말함이고, 자의로 마무리했다 함은 얼떨결에 끌려나간 맞선 자리에서 뜻밖에도 대화가 잘 풀리는 상대를 만나 자발적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는 뜻이다. 이래저래 끼어드는 일 때문에 단숨에 읽어 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는 일에 쫓겨 덮었다가도 곧 다시 펼쳐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황홀한 매혹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면서도 조곤조곤 대화를 계속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지나치게 비슷하면 지루해지고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나기 마련인데, 도널드 밀러의 고백적 글쓰기에는 그 공감과 차이를 절묘하게 조율하는 균형추가 두루 산포되어 있었다. 화가 나서 등 돌리려는 순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글의 자력에 휘말릴 때면, 확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길에 들어선 자들이 건네는 위로를 새삼 느끼곤 했다. 반면 중간 중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생각의 차이,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 차이야말로 내 스스로 나를 뛰어넘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와의 마찰이 없으면 내 품이 어디까지인지조차 알 수 없는 바, 낯선 것과 만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진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동일한 출발점
바람직한 창작과 비평이란 두루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일한 대상에 다른 해석을 가하는 것, 수동적인 텍스트에 능동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 그래서 다시 더 새롭고 더 의미 있는 차이를 토해내는 일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무한히 펼쳐지는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가다머의 말처럼 시선의 변화, 해석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없다면 모든 존재는 너무 익숙해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혹은 비평)이란 해방이기도 하고 훼방이기도 하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진부한 비유와 일의적인 해석에 갇히기 쉬운 하나님이란 존재를 계속해서 다른 시각, 다른 언어로 해석/해방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자 교회에 다니는 가난한 집이었고 그래서 내 상상 속의 하나님은 돈 많고 큰 차를 모는 남자였다.”(12쪽) “지금도 나는 하나님이 애초에 왜 자기를 ‘아버지’로 칭하셨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아버지상에 비추어, 내게 이것은 마케팅의 실수로 보인다.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아버지로 자처하시는 걸까?”(14쪽) “좋은 일이 생기면 나는 하나님의 답이라 생각했고,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다시 슬롯머신으로 돌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손잡이를 몇 번 더 당겼다. 나는 이런 하나님이 아주 좋았다.” (20쪽)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팔고 있었다. 칼을 파는 사람이나, 로미오를 새사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줄리엣과 한 통속이었다.”(42쪽) “하나님을 광고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 제품을 쓰지 않는 사람이 접니다.”(116쪽)
이는 말이 쉽지 실제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첫째로는 언어가 딸리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배짱이 딸리기 때문이다. 언어의 문제야 부단한 훈련을 통해 감수성을 벼리고 어휘력을 연마하면 되겠지만, 배짱의 문제는 사뭇 다른 차원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현실 기독교의 권력이 금 그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비유와 해석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다시는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널드 밀러는 가끔씩이나마 자유롭고 유쾌한 행보로 그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기독교적이라고 공인받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기독교적인 질문과 회의를 풀어내는데 별로 막힘이 없다. 애당초 그가 기독교 안에서 별로 잃을 게 없는 주변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잃을 게 많을수록, 자리가 확고해질수록 사용하는 언어가 진부해지는 건 새로운 언어가 지닌 도발성과 낡은 기득권의 보수성 사이의 적대관계를 그야말로 ‘은유적으로’ 설명해 주는 증거일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체계, 어떤 언어에 의해서도 완전히 이해되거나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풍성한 은유의 언어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은유의 언어는 언제나 은유의 대상보다 작지만, 고정된 관념을 무찌르고 새롭게 대상에 접근하는 또 다른 출구이자 입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우리는 저마다 짧고 좁은 언어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내가 알아야 할 하나님보다 언제나 작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이 지닌 두 번째 매력은 도널드 밀러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숱하게 거쳐왔던 의문과 불만, 혼란과 염증을 다분히 소탈하고 정직하게 쏟아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모두가 느끼면서도 아무도 말하려들지 않는 것들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솔직하게 답을 구한다. 그래서 정작 교회에 나가면서도 교회라면 질색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기독교라면 치를 떠는, 아주 이상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말문을 열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전체가 아닌 일부만 수용할 수 있다면 좋을 듯 싶었다.”(43쪽) “내가 기독교에 마음을 줄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가 지성이 떨어지는 자들을 위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으려면 엄청난 신학적 억지들을 아이들 이야기로 전락시키거나 무시해야 했다. 내 지성으로는 수용하기가 몹시 힘들었다.”(44쪽) “그녀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보수, 위선자, 속 좁은 인간들이었다.”(59쪽) “이렇게 친절하고 너그러운 여자가 십자군을 결성하고 공화당에 돈을 대고 종교 텔레비전을 창시한 바로 그 종교에 동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 믿어지지 않았다.”(61쪽) “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부분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지성의 반추가 없는 맹렬한 믿음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답변이 완결된 자기 확신 또한 사람을 협량하게 만든다. 그 확신에 동조하지 않는 인간을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칫 괴이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신적 행태는 그나마 문지방에 서서 기웃거리던 수많은 초신자들과 비기독교인들을 등 돌리게 만든다. 밀러의 글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지점도 바로 그러한 염증과 회의를 진솔하게 표현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경청하지 않는 종교, 차이를 밀어내는 신앙, 믿음을 갖는 순간 지성을 폐기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의 언어를 불통시키는 장애요인들이다. 어쩌면 지젝의 주장대로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앎’에의 욕구가 아니라 ‘무지’에의 욕구인지도 모른다. 무지 상태의 평화가 알면 알수록 더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드는 혼돈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몇 가지 질문만 던져도 금방 깨지기 쉬운 얇고 허약한 믿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있는 현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밀러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 역시 기독교의 그러한 ‘질문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쉬운 분기점
흥미로운 유년기의 기억에서부터 청년기 때 가졌던 온갖 불평불만과 문제제기의 행로까지 마치 동병상련하는 투덜이처럼 유쾌하게 동행하던 나는 아쉽게도 어느 순간 그가 너무 쉽게 해답을 얻는 게 아닐까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참 사랑은 다른 뺨을 돌려대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상대의 냉담함이나 적의에 아랑곳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나는 배웠다.”(58쪽)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니 인간관계의 모든 면이 황홀하게 다가왔고, 정교하고 복잡한 자연환경은 그 완벽함을 뽐냈다.”(78쪽) “자기 훈련으로는 절대 의나 깨끗함을 느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된다.”(101쪽) “예수님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신앙과 정치를 섞지 않았습니다.”(147쪽)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우리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믿으면 크리스천이 되는 거지요.”(149) “이제 나는 그 별난 공화당 근본주의자들을 아주 따뜻하게 생각하며, 그들도 나를 사랑함을 안다.”(163)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의미의 종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거대하고 복잡한 질문의 출발점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은 만 가지 질문에 한 가지 응답을 선물꾸러미처럼 준비해 놓았다가 우리의 태도변경을 조건으로 냉큼 건네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러했듯 끝없이 자기갱신을 거듭하는 삶의 물음 속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 고통스러운 궁지 속에서 해결책을 얻기 위해 궁극까지 질문을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중간에 주저앉는 행위는 대개 타협이다. 밀러는 그가 제기했던 질문의 다양함과 깊이에 비해 너무 작고 진부한 대답을 제시한다. 여러 층위의 문제들을 던져놓고는 ‘결국 문제는 모두 나에게 있다’라는 식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환원론적인 답변을 내놓고 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대가로 한 큐에 모든 것을 얻은 듯 다시금 세상과의 밀월관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이는 대단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은 세상에서 얻은 질문의 피로를 풀기 위해 들이키는 박카스가 아니다. 오히려 좀 다른 차원의, 훨씬 더 두렵고 훨씬 더 위험한 질문 앞에 서는 일이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성세계의 질서를 거스를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 저항의 언어 대신 인증된 언어를 택하는 것,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여 대면해 보지도 않은 채 재빨리 손닿는 데서 치유책을 찾는 것, 내 뺨은 그렇다 치고 이웃의 뺨을 돌려치는 인간에 대해서까지 다른 뺨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임에도 ‘사랑’이라는 관념의 이불로 모든 구체적 차이를 덮어버리는 것. 나는 그런 맹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차이를 억압하는 차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존중할 수 없는 차이로서의 억압적 권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가차 없는 독설을 내뱉던 예수께서 언제 ‘조지 부시를 지지하는 공화당 근본주의자들’을 아주 따뜻하게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세상에 대한 저항력도 커지는 법.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지혜는 사랑의 이름으로 따뜻하게 품어야 할 상대/때와 사랑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싸워야 할 상대/때를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문제임에도 늘 너희들이 문제라고 우겨대는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문제임에도 늘 내가 문제라고 오버하는 것도 문제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늘 그 둘 가운데 하나로 기울어져 있는 게 불만이다. 다소의 반가움으로 시작했던 책읽기가 씁쓸한 아쉬움으로 끝난 데는 이 책의 저자 역시 그 둘 가운데 하나로 기울어지면서 어느덧 질문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남는 이야기
우리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알기 위해 꼭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었던 이웃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나는 도널드 밀러라는 타인과 만남으로 내가 어디가 아프고 그는 또 어디가 아픈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어느 한 쪽만 문제를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문제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한 문제의 원인과 크기를 알아야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생성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별자리를 별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듯, 의미는 책 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읽는 이가 불러내는 것이다. 청탁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펼쳐보지 않았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나는 타인과 싸우지 않고 만나는 법에 대해 배웠다. 밀러 스스로 고백하듯 타인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신앙은 그렇게 수많은 차이를 지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이웃과 부딪쳐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 27:17)는 말씀처럼 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많은 타인을 이웃으로 불러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읽으면서 건져 올린 가장 큰 지혜다.
* 이 글은 <기독교사상> 12월호 책마당에 실린 글이다.
뉴스앤조이 제공
이신정 기자
저자 도널드 밀러
캠퍼스 사역자이자 강사, 작가다. 지은 책으로 <재즈처럼 하나님은(Blue Like Jazz)>, <Searching for God Knows What>, <Through the Painted Deserts> 등이 있다.
지겨운, 혹은 지겨울 것 같은 편견
언젠가 수잔 손탁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발랄한 경구 한 줄. “인간을 선한 인간, 악한 인간으로 나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세상에는 다만 매력적인 인간과 지겨운 인간이 있을 뿐이다.”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잡다한 책읽기를 해오면서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는 착한 글, 못된 글이 있는 게 아니라 매력적인 글과 지겨운 글이 있을 뿐이라고. 평소 기독교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데, 그 이유 역시 그 부류의 책들이 대체로 ‘지겨울 것’이라는 다소 교만한 판단 때문이다.
신앙적 글쓰기, 혹은 신앙인들의 글쓰기라는 게 대략 날로 악해져 가는 세상에 대한 장탄식으로 시작해서 결국 진부하고 우울한 자책형 둔사(遁辭)로 빠지거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대개 겪기 마련인 상처와 고통을 자신만의 것인 양 온통 울부짖으며 과장한 뒤 지금은 이렇게 저렇게 치유한데다가 남달리 ‘성공’까지 해서 잘 나가고 있다는 지극히 사사로운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일쑤이다.
나는 번번이 무슨 지도책이나 전화번호부를 펼쳐든 것처럼 지겹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교라는 소금물에 침수당한 듯 활력과 생기가 빠져나간 글,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거세당한 채 텅 빈 활자 혹은 몇 단계의 앙상한 공식만 남은 글, 누구 눈치를 보는지 겸손을 가장한 비굴함이 행간에서 묻어나는 글, 불특정 다수에게 감동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적당히 허리쯤에서 타협하는 글, 이제는 세상에서 물러나 ‘도’를 ‘득’한 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다시 세상을 굽어보며 가르치려 드는 글.
나는 그렇게 마냥 무릎 꿇거나 자책하거나 남 걱정이 지나친 글들이 솔직히 좀 지겹다. 싸워야 할 문제들은 고스란히 놔둔 채 너무 빨리 화해(사실은 봉합)와 치유(사실은 망각)의 영성 속으로 투항해 버리는 글도 지겹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한탄하던 비트겐슈타인에 기대어 말한다면, 신앙인들이 쓰는 언어의 한계가 곧 그 신앙의 한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신앙을 표현하는 도구인 동시에 그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글들이 틀렸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비슷해서 싫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신앙의 ‘차이’를 만드는 언어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타의에 의한 책읽기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은 타의에 의해 읽기 시작했다가 자의로 마무리한 책이다. 타의라 함은 다소 거절하기 힘든 서평원고 청탁을 말함이고, 자의로 마무리했다 함은 얼떨결에 끌려나간 맞선 자리에서 뜻밖에도 대화가 잘 풀리는 상대를 만나 자발적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는 뜻이다. 이래저래 끼어드는 일 때문에 단숨에 읽어 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는 일에 쫓겨 덮었다가도 곧 다시 펼쳐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황홀한 매혹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면서도 조곤조곤 대화를 계속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지나치게 비슷하면 지루해지고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나기 마련인데, 도널드 밀러의 고백적 글쓰기에는 그 공감과 차이를 절묘하게 조율하는 균형추가 두루 산포되어 있었다. 화가 나서 등 돌리려는 순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글의 자력에 휘말릴 때면, 확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길에 들어선 자들이 건네는 위로를 새삼 느끼곤 했다. 반면 중간 중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생각의 차이,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 차이야말로 내 스스로 나를 뛰어넘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경계 바깥에 있는 존재와의 마찰이 없으면 내 품이 어디까지인지조차 알 수 없는 바, 낯선 것과 만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진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동일한 출발점
바람직한 창작과 비평이란 두루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일한 대상에 다른 해석을 가하는 것, 수동적인 텍스트에 능동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 그래서 다시 더 새롭고 더 의미 있는 차이를 토해내는 일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무한히 펼쳐지는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가다머의 말처럼 시선의 변화, 해석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없다면 모든 존재는 너무 익숙해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혹은 비평)이란 해방이기도 하고 훼방이기도 하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진부한 비유와 일의적인 해석에 갇히기 쉬운 하나님이란 존재를 계속해서 다른 시각, 다른 언어로 해석/해방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부자 교회에 다니는 가난한 집이었고 그래서 내 상상 속의 하나님은 돈 많고 큰 차를 모는 남자였다.”(12쪽) “지금도 나는 하나님이 애초에 왜 자기를 ‘아버지’로 칭하셨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아버지상에 비추어, 내게 이것은 마케팅의 실수로 보인다.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아버지로 자처하시는 걸까?”(14쪽) “좋은 일이 생기면 나는 하나님의 답이라 생각했고,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다시 슬롯머신으로 돌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손잡이를 몇 번 더 당겼다. 나는 이런 하나님이 아주 좋았다.” (20쪽)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팔고 있었다. 칼을 파는 사람이나, 로미오를 새사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줄리엣과 한 통속이었다.”(42쪽) “하나님을 광고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 제품을 쓰지 않는 사람이 접니다.”(116쪽)
이는 말이 쉽지 실제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첫째로는 언어가 딸리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배짱이 딸리기 때문이다. 언어의 문제야 부단한 훈련을 통해 감수성을 벼리고 어휘력을 연마하면 되겠지만, 배짱의 문제는 사뭇 다른 차원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현실 기독교의 권력이 금 그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비유와 해석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다시는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널드 밀러는 가끔씩이나마 자유롭고 유쾌한 행보로 그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기독교적이라고 공인받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기독교적인 질문과 회의를 풀어내는데 별로 막힘이 없다. 애당초 그가 기독교 안에서 별로 잃을 게 없는 주변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잃을 게 많을수록, 자리가 확고해질수록 사용하는 언어가 진부해지는 건 새로운 언어가 지닌 도발성과 낡은 기득권의 보수성 사이의 적대관계를 그야말로 ‘은유적으로’ 설명해 주는 증거일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체계, 어떤 언어에 의해서도 완전히 이해되거나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풍성한 은유의 언어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은유의 언어는 언제나 은유의 대상보다 작지만, 고정된 관념을 무찌르고 새롭게 대상에 접근하는 또 다른 출구이자 입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우리는 저마다 짧고 좁은 언어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내가 알아야 할 하나님보다 언제나 작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이 지닌 두 번째 매력은 도널드 밀러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숱하게 거쳐왔던 의문과 불만, 혼란과 염증을 다분히 소탈하고 정직하게 쏟아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모두가 느끼면서도 아무도 말하려들지 않는 것들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솔직하게 답을 구한다. 그래서 정작 교회에 나가면서도 교회라면 질색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기독교라면 치를 떠는, 아주 이상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말문을 열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전체가 아닌 일부만 수용할 수 있다면 좋을 듯 싶었다.”(43쪽) “내가 기독교에 마음을 줄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가 지성이 떨어지는 자들을 위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으려면 엄청난 신학적 억지들을 아이들 이야기로 전락시키거나 무시해야 했다. 내 지성으로는 수용하기가 몹시 힘들었다.”(44쪽) “그녀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보수, 위선자, 속 좁은 인간들이었다.”(59쪽) “이렇게 친절하고 너그러운 여자가 십자군을 결성하고 공화당에 돈을 대고 종교 텔레비전을 창시한 바로 그 종교에 동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 믿어지지 않았다.”(61쪽) “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부분은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지성의 반추가 없는 맹렬한 믿음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답변이 완결된 자기 확신 또한 사람을 협량하게 만든다. 그 확신에 동조하지 않는 인간을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칫 괴이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신적 행태는 그나마 문지방에 서서 기웃거리던 수많은 초신자들과 비기독교인들을 등 돌리게 만든다. 밀러의 글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지점도 바로 그러한 염증과 회의를 진솔하게 표현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질문을 경청하지 않는 종교, 차이를 밀어내는 신앙, 믿음을 갖는 순간 지성을 폐기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의 언어를 불통시키는 장애요인들이다. 어쩌면 지젝의 주장대로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앎’에의 욕구가 아니라 ‘무지’에의 욕구인지도 모른다. 무지 상태의 평화가 알면 알수록 더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드는 혼돈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몇 가지 질문만 던져도 금방 깨지기 쉬운 얇고 허약한 믿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있는 현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밀러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 역시 기독교의 그러한 ‘질문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쉬운 분기점
흥미로운 유년기의 기억에서부터 청년기 때 가졌던 온갖 불평불만과 문제제기의 행로까지 마치 동병상련하는 투덜이처럼 유쾌하게 동행하던 나는 아쉽게도 어느 순간 그가 너무 쉽게 해답을 얻는 게 아닐까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참 사랑은 다른 뺨을 돌려대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상대의 냉담함이나 적의에 아랑곳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나는 배웠다.”(58쪽)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니 인간관계의 모든 면이 황홀하게 다가왔고, 정교하고 복잡한 자연환경은 그 완벽함을 뽐냈다.”(78쪽) “자기 훈련으로는 절대 의나 깨끗함을 느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된다.”(101쪽) “예수님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신앙과 정치를 섞지 않았습니다.”(147쪽) “예수님이 죽으셨으니 우리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믿으면 크리스천이 되는 거지요.”(149) “이제 나는 그 별난 공화당 근본주의자들을 아주 따뜻하게 생각하며, 그들도 나를 사랑함을 안다.”(163)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의미의 종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거대하고 복잡한 질문의 출발점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은 만 가지 질문에 한 가지 응답을 선물꾸러미처럼 준비해 놓았다가 우리의 태도변경을 조건으로 냉큼 건네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러했듯 끝없이 자기갱신을 거듭하는 삶의 물음 속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 고통스러운 궁지 속에서 해결책을 얻기 위해 궁극까지 질문을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중간에 주저앉는 행위는 대개 타협이다. 밀러는 그가 제기했던 질문의 다양함과 깊이에 비해 너무 작고 진부한 대답을 제시한다. 여러 층위의 문제들을 던져놓고는 ‘결국 문제는 모두 나에게 있다’라는 식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환원론적인 답변을 내놓고 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대가로 한 큐에 모든 것을 얻은 듯 다시금 세상과의 밀월관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이는 대단한 아이러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은 세상에서 얻은 질문의 피로를 풀기 위해 들이키는 박카스가 아니다. 오히려 좀 다른 차원의, 훨씬 더 두렵고 훨씬 더 위험한 질문 앞에 서는 일이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성세계의 질서를 거스를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 저항의 언어 대신 인증된 언어를 택하는 것,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여 대면해 보지도 않은 채 재빨리 손닿는 데서 치유책을 찾는 것, 내 뺨은 그렇다 치고 이웃의 뺨을 돌려치는 인간에 대해서까지 다른 뺨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임에도 ‘사랑’이라는 관념의 이불로 모든 구체적 차이를 덮어버리는 것. 나는 그런 맹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차이를 억압하는 차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존중할 수 없는 차이로서의 억압적 권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가차 없는 독설을 내뱉던 예수께서 언제 ‘조지 부시를 지지하는 공화당 근본주의자들’을 아주 따뜻하게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던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세상에 대한 저항력도 커지는 법.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지혜는 사랑의 이름으로 따뜻하게 품어야 할 상대/때와 사랑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싸워야 할 상대/때를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문제임에도 늘 너희들이 문제라고 우겨대는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문제임에도 늘 내가 문제라고 오버하는 것도 문제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늘 그 둘 가운데 하나로 기울어져 있는 게 불만이다. 다소의 반가움으로 시작했던 책읽기가 씁쓸한 아쉬움으로 끝난 데는 이 책의 저자 역시 그 둘 가운데 하나로 기울어지면서 어느덧 질문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남는 이야기
우리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알기 위해 꼭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었던 이웃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나는 도널드 밀러라는 타인과 만남으로 내가 어디가 아프고 그는 또 어디가 아픈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어느 한 쪽만 문제를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문제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한 문제의 원인과 크기를 알아야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생성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별자리를 별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듯, 의미는 책 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읽는 이가 불러내는 것이다. 청탁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펼쳐보지 않았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나는 타인과 싸우지 않고 만나는 법에 대해 배웠다. 밀러 스스로 고백하듯 타인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신앙은 그렇게 수많은 차이를 지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이웃과 부딪쳐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 27:17)는 말씀처럼 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많은 타인을 이웃으로 불러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읽으면서 건져 올린 가장 큰 지혜다.
* 이 글은 <기독교사상> 12월호 책마당에 실린 글이다.
뉴스앤조이 제공
이신정 기자
저자 도널드 밀러
캠퍼스 사역자이자 강사, 작가다. 지은 책으로 <재즈처럼 하나님은(Blue Like Jazz)>, <Searching for God Knows What>, <Through the Painted Desert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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