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서평
개혁신학의 뿌리를 알려면 이 책을 읽으라!
저자인 주도홍 교수님에게 신대원 3년 동안 역사신학을 사사 받았던 제자로서 실로 20여 년 만에 선생님의 책을 특별한 선물로 받아 읽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역사가이면서도 목회자인 교수님은 신대원 수업 시절 교의학과 사료 사이의 치열한 1차 자료 읽기와 해석 중에도 개혁파 선진들의 믿음의 각성과 영적 교훈을 부각하시며 자주 그것을 "천국 맛뵈기"라고 하셨고, 예의 이 책에서도 츠빙글리 읽기의 결론 부분을 "천국 맛보기"라 명명합니다(pp. 352-3).
최근 신학 서적을 거의 읽지 못하던 게으른 목사인 저에게 본서가 간만에 츠빙글리를 통해 깊은 신학적 사색과 통찰을 곱씹으며 천국의 맛을 되새길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이 책은 처음 손에 잡자마자 그 미덕과 장점이 두드러지는 책입니다.
첫째, 한국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개혁신학의 뿌리요 원조인 츠빙글리를 본격적으로 "읽는" 책입니다. 한국 교회와 신학계가 종교개혁이라면 루터만 생각하고 개혁파 신학도 칼빈 중심으로 치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츠빙글리를 통해 개혁신학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그 다양성과 장단점을 짚어볼 수 있는 의미있는 책입니다.
둘째, 저자는 충실한 역사학자답게 츠빙글리의 1차 저작물로부터 길어올린 텍스트와 츠빙글리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해설로 16세기 츠빙글리와 최대한 대화할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그래서인지 논쟁과 츠빙글리가 이랬대더라 저랬대더라 하는 소위 학자들의 의견들은 극도로 줄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하는 것 같은 날 것의 느낌이 많습니다.
셋째, 책의 디자인과 글의 폰트와 크기가 일반 신학서적들에 비해 읽기 좋은 폰트에 시원시원하여 오래 읽고 있어도 눈에 피로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백도 적당하여 책을 읽다가 드는 여러 생각들을 메모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츠빙글리만의 독특한 신학적 주제에 대해 두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츠빙글리의 공공신학의 가능성과 한계
저자는 "츠빙글리의 신학은 한마디로 공적 삶(public life)까지를 포함한다"(34)라고 바르게 지적합니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스위스 개혁파 진영 기수로 떠오르던 1523년 [67개조 논제]에서 츠빙글리는 이미 state-church(국가 교회)의 원형이라 할 세속정부의 교회 관할권을 이야기 합니다 (69). 폭군을 만난다면 "모든 백성이 일치 단결하여 폭군을 제거해야 한다"(123)는 급진적 선포를 하기도 하지만, "의로운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매우 악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권력자의 감시가 필요"하다(158)라고 말하며 정부의 필요성을 교회의 상위에서 확인합니다. 그래서 말년에는 "그리스도인은 국가가 그것을 요구하는 한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하나님은 재화에 대해 판결권을 국가에 위임했기 때문"(221)이라고 말하며 교회보다는 국가에 힘을 실어줍니다. 이는 그가 바라보는 교회가 악하고 부패했기 때문이었고 하나님께서 주권과 섭리 가운데 쓰시는 국가권력의 의의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기 한 해 전 쓴 그의 [기독교 신앙 선언]에서는 "보이는 교회에는 매우 교만하고 분쟁을 일삼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함께 있는데, 그들은 교회에서 수천 번 추방되어도 마땅하고, 국가권력은 마땅히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328)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어거스틴 신학과 교회의 오랜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대 세속 나라를 구분하고 둘 모두를 하나님의 통치로 설명하면서도 세속 정부와 권세에 영권과 교권을 넘기지 않습니다. 물론, 독일 귀족들을 독려하여 만인 대제사장이라고 띄워주며 타락한 교황권을 무너뜨리는데 활용하지만 교회가 가진 영적 권세는 교회만이 가져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원칙을 따라 제네바 세속 의회와 제네바 교회 목사회(노회) 치리 사이를 칼날처럼 구분하고 도리어 교회의 자치권을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츠빙글리의 공공 신학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세속정부의 권력의 의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교회가 심지어 그 관할하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가야 할 정부-교회 통합 시스템으로서의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할 일이 있지만, 세속 정부의 통치 권한에 십일조나 출교까지 맡겨 따라가는 국가 교회를 주장합니다. 이는 아마도 스위스 취리히 출신인 츠빙글리의 애국심이 한 몫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츠빙글리의 글에는 취리히 시민들과 동포들, 그리고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변호가 넘칩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시며 아테네 시민들을 깨우치려 한 이유는 그가 아테네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냐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테네에 전쟁이 났을 때 도망을 쳤다고 하죠. 츠빙글리는 그래서 취리히를 지키기 위한 카펠 전쟁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츠빙글리의 공공신학과 그의 국가-교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같은 정황 속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체계라고 여겨집니다. 한국 교회만큼 애국적인 교회가 없을 것인데, 국가가 교회의 십일조를 대신 걷어 공공의 유익과 불편부당한 나눔으로 분배하고, 수 없이 나타나는 교권주의자들의 비도덕과 성범죄, 그리고 신자들의 불법을 다스려 준다면 오히려 더 건강하고 개혁된 한국교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둘째, 츠빙글리의 성례 신학과 그 의의
저명한 종교개혁사 학자인 하이코 오버만(Heiko Oberman)은 칼빈의 신학에서 과연 오리지날리티(자기만의 신학)이 있느냐고 물으며 그나마 유일하다면 칼빈이 말한 성찬에 있어서 “영적 임재”를 꼽으며 Extra Calvinisticum(칼빈주의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신학)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츠빙글리의 성찬 신학을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드러내어 츠빙글리의 개혁파 정통 성찬론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칼빈의 독특한 성찬이해라 여기던 모든 것들이 츠빙글리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오버만의 제자였던 또 다른 종교개혁사 대가 데이빗 스타인메츠(Daivd Steinmetz)가 이렇게 말했죠: “extra Zwinglianum, since Zwingli taught it first.”(츠빙글리가 먼저 가르쳤으니 엑스트라 츠빙글리아눔이라 해야 한다).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의 핵심은 요한복음 6장의 한 구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에 있습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그것을 부인하면서도 여전히 성찬의 떡과 포도주와 “함께” 주님의 몸이 떡과 잔 (위와 옆에) 임재하여 그 몸을 먹게 된다는 루터의 해설에 츠빙글리는 자신이 사랑하고 인정하는 개혁의 동료였지만 그를 “비성경적”이라고 분명하게 거부합니다(256). 가톨릭이나 루터나 무익한 육(몸)에 천착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혼돈하지 않고 구분하여,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몸(인성)은 하나님 우편에 가 계시기에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편재(ubiquity)할 수 없고, 다만, 예수님의 신성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기에,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하실 때, 그 몸은 진짜 몸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몸을 “상징”(symbol) 하는 것이고, 다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신성으로서 우리는 그 몸으로 행하신 희생을 기념하고 영적으로 그 신성의 임재를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츠빙글리의 성령 사역의 강조가 필연적이 됩니다(258). 칼빈은 후에 이러한 츠빙글리의 이해를 따르고 심화합니다.
1529년 루터쪽 진영과 츠빙글리쪽 진영이 만났던 마부르크 회담은 총 15개 신학적 논제 중 14개의 합의점에 이르렀으나 결국 성찬 이해에 관한 마지막 논제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바람에 개신교의 화합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자는 츠빙글리의 사뭇 개인적이고 승리에 도취된 듯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루터나 츠빙글리나 역사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한계적인 인간들일 수밖에 없음을 조금은 슬프게 보여줍니다(418-21).
논쟁에서는 츠빙글리가 이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루터에게 배제된 츠빙글리와 개혁파 진영은 츠빙글리의 때 이른 죽음뿐만 아니라 100여년 동안 구교와 루터교 사이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후에 칼빈의 멘토이기도 했던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쩌의 중재를 받아 마부르크 회담에서 츠빙글리가 ‘이쯤에서, 그래, 같이 가자’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츠빙글리 학자의 글에 “에라스무스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작했고, 루터가 교황권에 맞서는 일을 시작했다면, 나(츠빙글리)는 성찬 이해를 가장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개혁가로의 삶 가운데서도 성찬의 이해와 해설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이유일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모로, 츠빙글리의 원글과 그의 사상의 백미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게 해주신 저자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쉽게도 초판이어서인지 몇몇 타이포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교정이 있었습니다만, 개정판이 나올 때 시정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론 [서문]에서 상당히 총체적으로 츠빙글리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의 개혁신학의 뿌리로서의 의의를 설명하였으나, 상당히 아쉬웠던 부분은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츠빙글리의 개혁신학이 우리 시대 한국교회와 한국 개혁신학에 가지는 의의와 과제 등에 대해 고견을 피력하였더라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자의 목적이 츠빙글리의 어깨 위에 올라 한국 교회를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바른 길을 제시함에 있었던 것이라면, 독자 개개인의 몫이기도 하겠으나, 저자의 고견이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언이 개정판에는 꼭 들어가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