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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판타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C.S. 루이스/홍성사/조영민
루이스의 이야기들은 환상일뿐만 아니라 비유이기도 하다. 그의 책은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흥미가 있다.
본서는 국내 최초로 번역하여 소개되는,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이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쓴 윌리엄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의 결합을 시도했으나, C. S. 루이스는 블레이크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무리 조금이라도, 지옥과 공존하는 천국이란 없다!" 본서는 판타지를 읽는 재미와 함께, 일상적 행위가 낳는 궁극적 결과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준다. 루이스 특유의 비범한 글재주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써 내려간 천국 여행에서 모든 독자들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저자 C. S. 루이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고, 그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고전학과 철학을 전공하였고, 1922년에는 최고 우등생이 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에는 영어로 전공을 바꾸어 또 다시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옥스포드의 모들린 대락의 평의원(FELLOW)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1954년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신설된 중세 및 르네상스 영어 교수직에 머물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관한 전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시집, 문학비평, 우화, 과학소설, 일반소설, 아동도서등 매우 광범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한편의 꿈을 꾼 듯한 작품이었다. 심심풀이로 읽다가 어느덧 그 사색의 깊이 가운데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저자의 상상력에 대해서 경이를 표하게 되었고, 밀턴의 실낙원, 복락원에서 느꼈던 진지함과 장엄함의 감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밀턴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독교 판타지라는 특별한 장르를 택한 저자의 수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저자는 의자에서 잠깐 조는 사이에 지옥에서 천국을 향해 떠나는 버스를 타게 된다. 그리고 그 버스의 종착역인 천국의 주변에서 갖가지 ‘유령들’이 그들을 이끄는 ‘영’과 대화를 통해서 천국의 주변부에서 중앙으로 함께 가기를 초청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유령들은 영과의 대화를 통해서 결국 자신이 본래 있었던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된다. 천국의 완전함과 온전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보다 지옥에서 누릴 수 있는 ‘자기중심성’에 대한 집착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령들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만나는 지옥에서 천국을 향하는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죄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 듯한 이들도 있다. 머리로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성직자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원하며 은혜의 품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윤리주의자도 있다. 또 사랑과 집착으로 자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품에서 돌려받겠다는 목적을 품은 어머니도 등장한다. 법적으로 살인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살인의 마음을 품게 한 실업가도 나오고,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하지만 천국에서는 화가의 그림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금 지옥으로 돌아가는 화가의 모습도 나온다. 모두가 자기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찾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천국은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로 채워야 한다는 것에서 ‘지옥보다 못한 곳’이 되어 버리고 있다. 결국 이들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천국의 주변에서 다시금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게 된다.
저자는 몇 가지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던 사후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비교대상으로서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이다. 저자는 지옥을 천국과 비교하기를 거부한다. 지옥은 천국의 티끌의 크기도 되지 못하며, 지옥의 깊은 심연은 천국의 땅바닥에 작은 틈보다 작은 틈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일회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닌 지옥에 있는 이들도 어떠한 선택을 통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연옥’설을 인정하는 듯한 내용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인 차이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말하는 신학서가 아닌 판타지로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저자가 생각한 지옥의 조건이 “자기집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지옥의 조건’ 앞에서 이 판타지를 읽는 동안 지옥에서 올라온 유령들의 모습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고한 것보다 오늘 내게 필요한 가치들로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 바로 지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유령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놓으셨음에도 자발적으로 그 문에서 도망치는 이 유령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길’을 명확히 앎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보다 ‘나의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기회를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고 ‘자기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자신의 중심을 채운 이에게 천국이 주어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신학적인 부분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기 힘든 한국에서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같은 판타지 문학에 포함된 신학이 어떻게 평가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글들이 신학적 입장을 밝히려는 책이기 전에 철저하게 후기 기독교 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을 위해 쓰여졌음을 고려할 때, 신학을 뛰어넘어 실천의 책으로 이 책이 읽히기 원한다.
(조영민)
루이스의 이야기들은 환상일뿐만 아니라 비유이기도 하다. 그의 책은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흥미가 있다.
본서는 국내 최초로 번역하여 소개되는,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이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쓴 윌리엄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의 결합을 시도했으나, C. S. 루이스는 블레이크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무리 조금이라도, 지옥과 공존하는 천국이란 없다!" 본서는 판타지를 읽는 재미와 함께, 일상적 행위가 낳는 궁극적 결과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준다. 루이스 특유의 비범한 글재주와 놀라운 상상력으로 써 내려간 천국 여행에서 모든 독자들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저자 C. S. 루이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고, 그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고전학과 철학을 전공하였고, 1922년에는 최고 우등생이 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에는 영어로 전공을 바꾸어 또 다시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옥스포드의 모들린 대락의 평의원(FELLOW)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1954년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신설된 중세 및 르네상스 영어 교수직에 머물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관한 전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시집, 문학비평, 우화, 과학소설, 일반소설, 아동도서등 매우 광범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한편의 꿈을 꾼 듯한 작품이었다. 심심풀이로 읽다가 어느덧 그 사색의 깊이 가운데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저자의 상상력에 대해서 경이를 표하게 되었고, 밀턴의 실낙원, 복락원에서 느꼈던 진지함과 장엄함의 감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밀턴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독교 판타지라는 특별한 장르를 택한 저자의 수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저자는 의자에서 잠깐 조는 사이에 지옥에서 천국을 향해 떠나는 버스를 타게 된다. 그리고 그 버스의 종착역인 천국의 주변에서 갖가지 ‘유령들’이 그들을 이끄는 ‘영’과 대화를 통해서 천국의 주변부에서 중앙으로 함께 가기를 초청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유령들은 영과의 대화를 통해서 결국 자신이 본래 있었던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된다. 천국의 완전함과 온전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보다 지옥에서 누릴 수 있는 ‘자기중심성’에 대한 집착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유령들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만나는 지옥에서 천국을 향하는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죄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 듯한 이들도 있다. 머리로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성직자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원하며 은혜의 품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윤리주의자도 있다. 또 사랑과 집착으로 자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품에서 돌려받겠다는 목적을 품은 어머니도 등장한다. 법적으로 살인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살인의 마음을 품게 한 실업가도 나오고,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하지만 천국에서는 화가의 그림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금 지옥으로 돌아가는 화가의 모습도 나온다. 모두가 자기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찾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천국은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로 채워야 한다는 것에서 ‘지옥보다 못한 곳’이 되어 버리고 있다. 결국 이들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천국의 주변에서 다시금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게 된다.
저자는 몇 가지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던 사후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비교대상으로서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이다. 저자는 지옥을 천국과 비교하기를 거부한다. 지옥은 천국의 티끌의 크기도 되지 못하며, 지옥의 깊은 심연은 천국의 땅바닥에 작은 틈보다 작은 틈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일회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닌 지옥에 있는 이들도 어떠한 선택을 통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연옥’설을 인정하는 듯한 내용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인 차이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말하는 신학서가 아닌 판타지로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저자가 생각한 지옥의 조건이 “자기집착”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지옥의 조건’ 앞에서 이 판타지를 읽는 동안 지옥에서 올라온 유령들의 모습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고한 것보다 오늘 내게 필요한 가치들로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 바로 지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유령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놓으셨음에도 자발적으로 그 문에서 도망치는 이 유령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길’을 명확히 앎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는 것보다 ‘나의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기회를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고 ‘자기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자신의 중심을 채운 이에게 천국이 주어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신학적인 부분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기 힘든 한국에서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같은 판타지 문학에 포함된 신학이 어떻게 평가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글들이 신학적 입장을 밝히려는 책이기 전에 철저하게 후기 기독교 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을 위해 쓰여졌음을 고려할 때, 신학을 뛰어넘어 실천의 책으로 이 책이 읽히기 원한다.
(조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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