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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
차별당하는 여성의 존재성에서 길어내는 영성의 잔잔함
따뜻하고 촉촉하고 짭쪼롬한 하느님/에드위나 게이틀리/분도출판사
이 책의 장점은 첫째는 생활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특히 여성으로서의 감성이 풍부히 느껴진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러고도 신학적 문제제기가 매우 치열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그러는 중에 깊은 영성에로 우리를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가 천백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학술서로서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이 책은 이백페이지가 채 못되는 볼륨으로써 여러 가지 감동이 줄줄이로 나온다. 책을 읽는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다.
●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
영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나서 활동은 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펼쳤다. 1969년 VMM(a volunteer missionary movement)를 창립하여 개발도상국들에 보낼 선교사를 준비시키고 또 파송하였다. 스스로도 그 소속의 선교사 활동을 하였다. 이 책에는 그 때의 경험도 들어있다. 또 매매춘 여성 쉼터인 창조의 집도 창립하였다. 역시 이곳에서도 활동하였고, 이 책은 주로 창조의 집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들어차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차별당해서 작아지고 눈물흘려야했던 그 매매춘 여성들의 모습에서 무릇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읽어낸 것이다. 현재는 시카고의 카톨릭 신학연맹에서 신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 시장,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등이 그녀의 활동을 요청할 만큼 여성 문제에 있어서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서평
여성신학은 그야말로 껄쩍지근한 주제이다.
입만 벌리면 할 말도 적잖이 있지만, 교회라는 배경에서 무엇인지 무리를 해야만 하는 것 같고, 그런 무리를 무릅쓰고 감행하고 나면 공연히 설레발을 쳤나 싶은 느낌도 들고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에게서 참으로 한 수를 배웠다. 아니 여성의 존재, 그것도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의 존재를 배웠다. 참으로 심오하고, 그리고 매우 인간적이고, 그러면서 아주 처절하기도 하고, 다시 내가 남성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뭔지 무척 부끄럽고 그리고 죄송스럽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Ethwina Gateley)는 영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나서 활동은 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펼쳤다. 1969년 VMM(a volunteer missionary movement)를 창립하여 개발도상국들에 보낼 선교사를 준비시키고 또 파송하였다. 스스로도 그 소속의 선교사 활동을 하였다. 이 책에는 그 때의 경험도 들어있다. 또 매매춘 여성 쉼터인 창조의 집도 창립하였다. 역시 이곳에서도 활동하였고, 이 책은 주로 창조의 집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들어차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차별당해서 작아지고 눈물흘려야했던 그 매매춘 여성들의 모습에서 무릇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읽어낸 것이다. 현재는 시카고의 카톨릭 신학연맹에서 신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 시장,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등이 그녀의 활동을 요청할 만큼 여성 문제에 있어서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는 생활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특히 여성으로서의 감성이 풍부히 느껴진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러고도 신학적 문제제기가 매우 치열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그러는 중에 깊은 영성에로 우리를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가 천백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학술서로서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이 책은 이백페이지가 채 못되는 볼륨으로써 여러 가지 감동이 줄줄이로 나온다. 책을 읽는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첫 글은 대뜸 자신의 아프리카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영성수련을 한 것이지만, 영성수련보다는 물 한 모금이라는 생활 감각이 거기 나타나며, 또 그 물 한 모금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도 한 이교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아주 생활적인 주제로 드러난다. 그렇게 생활적이다. 여러 개의 이야기가 이어져 가는데, 거기에는 내내 자신의 생활이 나온다. 가까운 한 두 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평생에 걸치는 생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생활을 들먹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가까워서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 주섬주섬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분명했고, 그래서 사람도 하나님도 분명해지는 그런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경험들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책에 자신을 쏟아놓는 것이라 한다면, 그녀는 참으로 자신의 삶을 거기 잘 쏟아놓았다. 그런 면에서는 성경 해석도 참 독특하다.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성경을 해석해야할지 하는 생각을 더러 한다. 전자는 복음주의자고 후자는 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이런 차별성을 허여하지 않는다. 꼭 분류를 하라면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유주의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따뜻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녀의 감성은 참으로 솔직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뜻 촉촉 짭쪼롬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두려움을 가지면서 바라본 것은 그녀의 남성을 향한 감성이다. 그야말로 더런 놈들이야! 그녀는 남성을 향해 이런 감성을 분명히 가졌다. 그러나 그런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 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지? 왜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차별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런 말을 수없이 던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이 우월성을 당연한 듯이 주장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오히려 당혹해하는 남성들을 향해서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그녀는 가졌다. 그녀가 자신의 교구 주교를 찾아가서 여성인 자신이 부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 주교가 보였던 당혹감, 거기에 대해서 그녀는 분노한다기보다는 저 멀뚱멀뚱한 남자들.... 하면서 지켜봐주고 있다. 멤버십을 위한 전례에서 꼭 세족식만은 사제인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주교를 향하여도 참 애처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의 절충안을 받아들인다. 남성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남성들의 허위에 대하여 비분강개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딱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남성으로서의 우월성을 지키는 것이 마치 삶의 목적인 것처럼 되어버린 이 불쌍한 존재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감성의 원류는 남성을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한 여성을 향한 것이다. 반드시 불쌍해 죽겠다는 것은 아니다. 대체 이 땅에 와서 살다가는 우리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고 보니, 여성의 삶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고, 그러고보니 사회구조는 뒤틀린 것이고, 의당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염두에 둔 이 분노가 여성을 향한 그녀의 감성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에게서 독특한 창조성을 느끼며, 실제성을 느끼며, 그래서 또 신비성까지 느낀다. 그녀는 이미 온 세계를 뒤덮어버린 남성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을 해방한다기보다는 그런 여성성이 드러남으로써 인류가 풍성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녀는 사실 이것을 설득하려는 것 같고, 나로서는 거기 설득됨을 느낀다.
그녀의 신학은 이미 말한 대로 독특하다. 읽다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옆집 아저씨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라고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 옆집 아저씨의 아버지쯤으로 생각한다고나 할까?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처음에는 잘못 생각하였다가 여성성에 부딪힌 다음에 그 여성성을 수용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성 예수는 그만큼 여성성을 몰랐던 것이고, 그러나 그 수용성에서는 제1호 페미니스트의 작위를 허락하는 것이다. 이러는 그녀의 성경 해석은 한편은 지나치게 탈신학적이지만 한편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신선하다. 각각 그 글에 따라서 비교적 온건한 것도 있고, 때로는 매우 과격한가하면, 어떤 것은 정말 난데없는 해석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진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강변한다. 다 맞지는 않다 하더라도 많이 맞는 이야기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교리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과거 바리새인들이 하던 그런 일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여간 그녀는 이런 이야기책 속에서 성경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녀 나름의 여성신학을 그런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해방의 기쁨으로 이 글들을 보게 될 것이지만, 남성의 눈으로서는 새로운 배움으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녀의 성경해석은 매우 독특하고 그리고 매우 유익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대체 신학을 창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이야기해 준다. 그리스도 고백을 한 베드로는 이 땅에서 하늘문을 여는 열쇠를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고백한 마르다는 왜 그런 열쇠를 받지 못했느냐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힐난하는 것 같이도 보인다. 그런데 참 중요한 문제제기인 것 같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도 제기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들린 여자가 있었는데,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그 남자는 어디 갔느냐는 문제. 하여간 내가 남성이어서, 사회가 남성 위주여서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많은 문제들을 들추어 내어서,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남녀 성차별적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때로는 성경이 대체 왜 이렇게 씌었나라는 의문도 제기하고, 엄청나게 뒤틀린 성경해석도 이야기한다. 책 자체가 신학 책은 아닌데도, 어떤 여성신학 책보다도 신학적인 문제제기가 많다. 신학적 문제제기가 많으니 이 책은 분명 신학 서적이다.
이런 장치들 속에서 벌이는 그녀의 영성의 깊이는 대단하다. 일단 폭이 넓지 않은가? 나를 하나님께로 던지는 영성 생활에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계급의 매매춘 여성의 삶에까지 펼쳐진다. 그 폭이 넓어서인지, 그 깊은 아래서 벌어지는 영성의 자리가 매우 힘차다. 예수님을 옆집 아저씨처럼 이야기하는 대담성은 사실은 그녀의 영성에서 비롯한다. 그만큼 예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따뜻 촉촉 짭쪼롬하다고 수식할 수 있는 것도 영성적 깊이에서 나온다. 그만큼 하나님이 그녀의 혀끝에 와서 닿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와 절망과 여백은 모두 그녀의 영성의 소산이다.
지적이라 하면 그 논리가 너무 조밀하고, 영적이라 하면 그 신령함이 너무 요란하고, 현실적이라 하면 삶이 너무 척박하여, 우리는 휴식을 얻지 못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휴식을 제공하고, 많은 이해들 가운데서도 진리는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성신학을 구하는 자,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성경 해석을 구하는 자는 꼭 읽어볼 책이다.
(안영혁)
이 책의 장점은 첫째는 생활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특히 여성으로서의 감성이 풍부히 느껴진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러고도 신학적 문제제기가 매우 치열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그러는 중에 깊은 영성에로 우리를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가 천백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학술서로서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이 책은 이백페이지가 채 못되는 볼륨으로써 여러 가지 감동이 줄줄이로 나온다. 책을 읽는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다.
●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
영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나서 활동은 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펼쳤다. 1969년 VMM(a volunteer missionary movement)를 창립하여 개발도상국들에 보낼 선교사를 준비시키고 또 파송하였다. 스스로도 그 소속의 선교사 활동을 하였다. 이 책에는 그 때의 경험도 들어있다. 또 매매춘 여성 쉼터인 창조의 집도 창립하였다. 역시 이곳에서도 활동하였고, 이 책은 주로 창조의 집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들어차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차별당해서 작아지고 눈물흘려야했던 그 매매춘 여성들의 모습에서 무릇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읽어낸 것이다. 현재는 시카고의 카톨릭 신학연맹에서 신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 시장,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등이 그녀의 활동을 요청할 만큼 여성 문제에 있어서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서평
여성신학은 그야말로 껄쩍지근한 주제이다.
입만 벌리면 할 말도 적잖이 있지만, 교회라는 배경에서 무엇인지 무리를 해야만 하는 것 같고, 그런 무리를 무릅쓰고 감행하고 나면 공연히 설레발을 쳤나 싶은 느낌도 들고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에게서 참으로 한 수를 배웠다. 아니 여성의 존재, 그것도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의 존재를 배웠다. 참으로 심오하고, 그리고 매우 인간적이고, 그러면서 아주 처절하기도 하고, 다시 내가 남성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뭔지 무척 부끄럽고 그리고 죄송스럽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저자 에드위나 게이틀리(Ethwina Gateley)는 영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나서 활동은 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펼쳤다. 1969년 VMM(a volunteer missionary movement)를 창립하여 개발도상국들에 보낼 선교사를 준비시키고 또 파송하였다. 스스로도 그 소속의 선교사 활동을 하였다. 이 책에는 그 때의 경험도 들어있다. 또 매매춘 여성 쉼터인 창조의 집도 창립하였다. 역시 이곳에서도 활동하였고, 이 책은 주로 창조의 집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들어차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차별당해서 작아지고 눈물흘려야했던 그 매매춘 여성들의 모습에서 무릇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읽어낸 것이다. 현재는 시카고의 카톨릭 신학연맹에서 신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 시장,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등이 그녀의 활동을 요청할 만큼 여성 문제에 있어서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첫째는 생활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특히 여성으로서의 감성이 풍부히 느껴진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러고도 신학적 문제제기가 매우 치열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그러는 중에 깊은 영성에로 우리를 몰고 간다는 것이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가 천백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학술서로서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이 책은 이백페이지가 채 못되는 볼륨으로써 여러 가지 감동이 줄줄이로 나온다. 책을 읽는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첫 글은 대뜸 자신의 아프리카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영성수련을 한 것이지만, 영성수련보다는 물 한 모금이라는 생활 감각이 거기 나타나며, 또 그 물 한 모금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도 한 이교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아주 생활적인 주제로 드러난다. 그렇게 생활적이다. 여러 개의 이야기가 이어져 가는데, 거기에는 내내 자신의 생활이 나온다. 가까운 한 두 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평생에 걸치는 생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생활을 들먹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가까워서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 주섬주섬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분명했고, 그래서 사람도 하나님도 분명해지는 그런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경험들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책에 자신을 쏟아놓는 것이라 한다면, 그녀는 참으로 자신의 삶을 거기 잘 쏟아놓았다. 그런 면에서는 성경 해석도 참 독특하다.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성경을 해석해야할지 하는 생각을 더러 한다. 전자는 복음주의자고 후자는 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이런 차별성을 허여하지 않는다. 꼭 분류를 하라면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유주의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따뜻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녀의 감성은 참으로 솔직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뜻 촉촉 짭쪼롬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두려움을 가지면서 바라본 것은 그녀의 남성을 향한 감성이다. 그야말로 더런 놈들이야! 그녀는 남성을 향해 이런 감성을 분명히 가졌다. 그러나 그런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 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지? 왜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차별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런 말을 수없이 던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이 우월성을 당연한 듯이 주장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오히려 당혹해하는 남성들을 향해서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그녀는 가졌다. 그녀가 자신의 교구 주교를 찾아가서 여성인 자신이 부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 주교가 보였던 당혹감, 거기에 대해서 그녀는 분노한다기보다는 저 멀뚱멀뚱한 남자들.... 하면서 지켜봐주고 있다. 멤버십을 위한 전례에서 꼭 세족식만은 사제인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주교를 향하여도 참 애처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의 절충안을 받아들인다. 남성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남성들의 허위에 대하여 비분강개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딱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남성으로서의 우월성을 지키는 것이 마치 삶의 목적인 것처럼 되어버린 이 불쌍한 존재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감성의 원류는 남성을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한 여성을 향한 것이다. 반드시 불쌍해 죽겠다는 것은 아니다. 대체 이 땅에 와서 살다가는 우리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고 보니, 여성의 삶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고, 그러고보니 사회구조는 뒤틀린 것이고, 의당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염두에 둔 이 분노가 여성을 향한 그녀의 감성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에게서 독특한 창조성을 느끼며, 실제성을 느끼며, 그래서 또 신비성까지 느낀다. 그녀는 이미 온 세계를 뒤덮어버린 남성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을 해방한다기보다는 그런 여성성이 드러남으로써 인류가 풍성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녀는 사실 이것을 설득하려는 것 같고, 나로서는 거기 설득됨을 느낀다.
그녀의 신학은 이미 말한 대로 독특하다. 읽다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옆집 아저씨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라고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 옆집 아저씨의 아버지쯤으로 생각한다고나 할까?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처음에는 잘못 생각하였다가 여성성에 부딪힌 다음에 그 여성성을 수용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성 예수는 그만큼 여성성을 몰랐던 것이고, 그러나 그 수용성에서는 제1호 페미니스트의 작위를 허락하는 것이다. 이러는 그녀의 성경 해석은 한편은 지나치게 탈신학적이지만 한편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신선하다. 각각 그 글에 따라서 비교적 온건한 것도 있고, 때로는 매우 과격한가하면, 어떤 것은 정말 난데없는 해석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진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강변한다. 다 맞지는 않다 하더라도 많이 맞는 이야기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교리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과거 바리새인들이 하던 그런 일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여간 그녀는 이런 이야기책 속에서 성경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녀 나름의 여성신학을 그런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해방의 기쁨으로 이 글들을 보게 될 것이지만, 남성의 눈으로서는 새로운 배움으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녀의 성경해석은 매우 독특하고 그리고 매우 유익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대체 신학을 창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이야기해 준다. 그리스도 고백을 한 베드로는 이 땅에서 하늘문을 여는 열쇠를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고백한 마르다는 왜 그런 열쇠를 받지 못했느냐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힐난하는 것 같이도 보인다. 그런데 참 중요한 문제제기인 것 같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도 제기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들린 여자가 있었는데,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그 남자는 어디 갔느냐는 문제. 하여간 내가 남성이어서, 사회가 남성 위주여서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많은 문제들을 들추어 내어서, 그것이 당연하지 않고 남녀 성차별적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때로는 성경이 대체 왜 이렇게 씌었나라는 의문도 제기하고, 엄청나게 뒤틀린 성경해석도 이야기한다. 책 자체가 신학 책은 아닌데도, 어떤 여성신학 책보다도 신학적인 문제제기가 많다. 신학적 문제제기가 많으니 이 책은 분명 신학 서적이다.
이런 장치들 속에서 벌이는 그녀의 영성의 깊이는 대단하다. 일단 폭이 넓지 않은가? 나를 하나님께로 던지는 영성 생활에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계급의 매매춘 여성의 삶에까지 펼쳐진다. 그 폭이 넓어서인지, 그 깊은 아래서 벌어지는 영성의 자리가 매우 힘차다. 예수님을 옆집 아저씨처럼 이야기하는 대담성은 사실은 그녀의 영성에서 비롯한다. 그만큼 예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따뜻 촉촉 짭쪼롬하다고 수식할 수 있는 것도 영성적 깊이에서 나온다. 그만큼 하나님이 그녀의 혀끝에 와서 닿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와 절망과 여백은 모두 그녀의 영성의 소산이다.
지적이라 하면 그 논리가 너무 조밀하고, 영적이라 하면 그 신령함이 너무 요란하고, 현실적이라 하면 삶이 너무 척박하여, 우리는 휴식을 얻지 못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휴식을 제공하고, 많은 이해들 가운데서도 진리는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성신학을 구하는 자,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성경 해석을 구하는 자는 꼭 읽어볼 책이다.
(안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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