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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며,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쉐퍼/생명의 말씀사/신동수
쉐퍼 박사의 기독교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Schaeffer's triology(그의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세 가지 책)의 마지막 책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으로의 도피"에서 다루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의 서구철학과 문명, 그리고 비합리적 신비주의와 '도약'의 믿음을 야기했던 이원론적 체계를 비판했던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는 두 책의 결론을 약술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알며,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저자 프란시스 쉐퍼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일생을 헌신한 전도자였다.
● 서평
쉐퍼 박사의 기독교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Schaeffer's triology(그의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세 가지 책)의 마지막 책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으로의 도피"에서 다루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의 서구철학과 문명, 그리고 비합리적 신비주의와 '도약'의 믿음을 야기했던 이원론적 체계를 비판했던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는 두 책의 결론을 약술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알며,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언어'에 대한 현대철학의 회의와 거부는 극에 달해 있다. 쉐퍼의 말처럼 동양철학(도교와 불교)의 파급과 기존철학적 질서의 파괴를 기초로 그 위상을 정립한 서양의 '해체주의'(데리다) 등은 기독교적 전제와는 정반대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구분되어진 '은총'과 '자연'의 구분은 더 이상 '계시'와 '믿음'이 합리적인 영역에 머물지 못하고 비합리적 영역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합리적 믿음을 추구하지 못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의 영역은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 버렸을 때, 그 자리에는 온갖 '비합리적 대상'(도, 초월, 물자체 등)이 정의될 수 없는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믿었던 '자연'은 '은총'을 잠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존재'의 문제를 말할 수 없고, '윤리'를 말할 수 없으며, '주체와 객체의 인식'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철학적 주제이지만, 오직 '성경'만이 해답을 줄 수 있는 문제이다.
쉐퍼는 강변한다. '성경의 체제'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유일한' 답변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더 이상 '은총'과 '자연'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상층부와 하층부 모두에 담지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더 이상 '은총'과 '자연'의 단절, 혹은 '계시'와 '세상'의 단절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자연'의 창조주가 계시며, 그 분이 말씀하심으로 '계시'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원이 되신다. 그 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삼위로 계시지만 한 분이신 그분이 있기에, 우리는 '다양성'과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기에,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개별자인 인간 하나 하나가 사랑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규정하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출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사랑의 보편적 근원으로부터 그 사랑을 규정하고 말하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은 '보편적 제일 원인'이요,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개별자'들 가운데 '보편적 원인'을 찾으려고 시도하지만, 절망의 심연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대의 비극과 절망의 '유일한 해답'은 기독교적 전제뿐이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계시기에 우리는 존재하며, 인식하며, 관계하며,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해답: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쉐퍼 박사의 기독교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Schaeffer's triology(그의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세 가지 책)의 마지막 책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으로의 도피"에서 다루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의 서구철학과 문명, 그리고 비합리적 신비주의와 '도약'의 믿음을 야기했던 이원론적 체계를 비판했던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는 두 책의 결론을 약술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알며,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저자 프란시스 쉐퍼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일생을 헌신한 전도자였다.
● 서평
쉐퍼 박사의 기독교 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Schaeffer's triology(그의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세 가지 책)의 마지막 책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으로의 도피"에서 다루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의 서구철학과 문명, 그리고 비합리적 신비주의와 '도약'의 믿음을 야기했던 이원론적 체계를 비판했던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는 두 책의 결론을 약술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알며,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언어'에 대한 현대철학의 회의와 거부는 극에 달해 있다. 쉐퍼의 말처럼 동양철학(도교와 불교)의 파급과 기존철학적 질서의 파괴를 기초로 그 위상을 정립한 서양의 '해체주의'(데리다) 등은 기독교적 전제와는 정반대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구분되어진 '은총'과 '자연'의 구분은 더 이상 '계시'와 '믿음'이 합리적인 영역에 머물지 못하고 비합리적 영역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합리적 믿음을 추구하지 못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의 영역은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 버렸을 때, 그 자리에는 온갖 '비합리적 대상'(도, 초월, 물자체 등)이 정의될 수 없는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믿었던 '자연'은 '은총'을 잠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존재'의 문제를 말할 수 없고, '윤리'를 말할 수 없으며, '주체와 객체의 인식'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철학적 주제이지만, 오직 '성경'만이 해답을 줄 수 있는 문제이다.
쉐퍼는 강변한다. '성경의 체제'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유일한' 답변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더 이상 '은총'과 '자연'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상층부와 하층부 모두에 담지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더 이상 '은총'과 '자연'의 단절, 혹은 '계시'와 '세상'의 단절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자연'의 창조주가 계시며, 그 분이 말씀하심으로 '계시'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원이 되신다. 그 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삼위로 계시지만 한 분이신 그분이 있기에, 우리는 '다양성'과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기에, 우리는 '사랑'을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개별자인 인간 하나 하나가 사랑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규정하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출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사랑의 보편적 근원으로부터 그 사랑을 규정하고 말하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은 '보편적 제일 원인'이요,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개별자'들 가운데 '보편적 원인'을 찾으려고 시도하지만, 절망의 심연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대의 비극과 절망의 '유일한 해답'은 기독교적 전제뿐이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계시기에 우리는 존재하며, 인식하며, 관계하며,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해답: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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