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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
거기 계시는 하나님/쉐퍼/생명의 말씀사/신동수
이 책은 쉐퍼 전집 제1집의 제1권의 책제목이다.
내용은 '기독교 인식론' 혹은 '기독교 지식론'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 혹은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저자 프란시스 쉐퍼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일생을 헌신한 전도자였다.
● 서평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인식'과 '지식'이 나올 수는 없다. 인식의 기원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의 '비극'이 생겼다고 쉐퍼는 강변한다.
이 책은 쉐퍼 전집 제1집의 제1권의 책제목이다. 내용은 '기독교 인식론' 혹은 '기독교 지식론'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 혹은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인식'과 '지식'이 나올 수는 없다. 인식의 기원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의 '비극'이 생겼다고 쉐퍼는 강변한다.
서구 철학의 토대 위에 신학을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총'과 '자연'이다.
은총/ 상층부 / 하나님
_____________________
자연/ 하층부 / 세상
이러한 구분은 분명 희랍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과 '세상'은 이성적 합리성으로 설명되고 자율적으로 운영되지만, '은총'과 '하나님'의 영역은 합리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우선 '철학'과 '미술' 그리고 '문화'의 분야에서 나타난 비극은 이런 것이다. 철저히 합리적인 '자연'만이 그 표현의 대상이 되며, '합리적이지 않은',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상층부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관심'의 표면적 구분점뿐이 아닌, '은총' 혹은 '하나님'의 상층부에 대한 '자연적' 해석의 시대의 개막이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가치 발견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은총'과 '하나님'의 상층부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단지 믿음의 도약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비합리적 영역으로 간주되면서, '자연'은 '은총'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자연'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그 안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 (자연신학, 계몽주의, 실용주의, 공산주의 등)이 우리에게 준 해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망'밖에 없는 것이다.
쉐퍼는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인식론의 해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이다. 하나님은 결코 '비합리성'에 둘러싸여 인간이 절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계시를 보이심으로 인간과 교제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여기 계시는 분'이 아니라 '저기 계시는 분'으로서의 '초월성'을 가지신다. 그 분은 초월하시는 '거기 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다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 분이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이 거기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지식'의 기독교적 기원은 모든 '자연'의 지식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지식'에 대한 기원이 합리적으로 밝혀지지 않을 때, 자연에 나타난 지식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현대철학, 동양철학의 노자 혹은 불교의 선문답 등은 바로 기독교 '인식론'과의 단절에 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지식'의 기원이다. 단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의 나이브한 명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가 정확하다.
그러므로 믿음은 비합리적 상층부에 대한 도약(자유주의 신신학, 신비주의, 동양철학)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충분히 합리적인 체계 속에 구체적인 계시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진리란 비합리적인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의 구분점을 가진다. 기독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말할 수 있고,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쉐퍼 박사 스스로도 지적했던 것처럼, 기독교계 내에는 '청소해야 할 먼지들'이 많다. 바로 그 '먼지들'이 무엇인지 기독교는 알고 말할 수 있고, '청소'할 수 있는 '체제'인 것이 분명한 강점이다.
쉐퍼를 통해, 바른 기독교 체계를 알고 바른 '믿음'을 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쉐퍼 전집 제1집의 제1권의 책제목이다.
내용은 '기독교 인식론' 혹은 '기독교 지식론'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 혹은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저자 프란시스 쉐퍼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일생을 헌신한 전도자였다.
● 서평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인식'과 '지식'이 나올 수는 없다. 인식의 기원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의 '비극'이 생겼다고 쉐퍼는 강변한다.
이 책은 쉐퍼 전집 제1집의 제1권의 책제목이다. 내용은 '기독교 인식론' 혹은 '기독교 지식론'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 혹은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인식'과 '지식'이 나올 수는 없다. 인식의 기원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의 '비극'이 생겼다고 쉐퍼는 강변한다.
서구 철학의 토대 위에 신학을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총'과 '자연'이다.
은총/ 상층부 / 하나님
_____________________
자연/ 하층부 / 세상
이러한 구분은 분명 희랍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과 '세상'은 이성적 합리성으로 설명되고 자율적으로 운영되지만, '은총'과 '하나님'의 영역은 합리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우선 '철학'과 '미술' 그리고 '문화'의 분야에서 나타난 비극은 이런 것이다. 철저히 합리적인 '자연'만이 그 표현의 대상이 되며, '합리적이지 않은',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상층부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구분된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관심'의 표면적 구분점뿐이 아닌, '은총' 혹은 '하나님'의 상층부에 대한 '자연적' 해석의 시대의 개막이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가치 발견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은총'과 '하나님'의 상층부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단지 믿음의 도약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비합리적 영역으로 간주되면서, '자연'은 '은총'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자연'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그 안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 (자연신학, 계몽주의, 실용주의, 공산주의 등)이 우리에게 준 해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망'밖에 없는 것이다.
쉐퍼는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인식론의 해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이다. 하나님은 결코 '비합리성'에 둘러싸여 인간이 절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계시를 보이심으로 인간과 교제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여기 계시는 분'이 아니라 '저기 계시는 분'으로서의 '초월성'을 가지신다. 그 분은 초월하시는 '거기 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다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 분이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이 거기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지식'의 기독교적 기원은 모든 '자연'의 지식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지식'에 대한 기원이 합리적으로 밝혀지지 않을 때, 자연에 나타난 지식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현대철학, 동양철학의 노자 혹은 불교의 선문답 등은 바로 기독교 '인식론'과의 단절에 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지식'의 기원이다. 단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의 나이브한 명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가 정확하다.
그러므로 믿음은 비합리적 상층부에 대한 도약(자유주의 신신학, 신비주의, 동양철학)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충분히 합리적인 체계 속에 구체적인 계시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진리란 비합리적인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의 구분점을 가진다. 기독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말할 수 있고,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쉐퍼 박사 스스로도 지적했던 것처럼, 기독교계 내에는 '청소해야 할 먼지들'이 많다. 바로 그 '먼지들'이 무엇인지 기독교는 알고 말할 수 있고, '청소'할 수 있는 '체제'인 것이 분명한 강점이다.
쉐퍼를 통해, 바른 기독교 체계를 알고 바른 '믿음'을 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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