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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스런 시원 (始原)으로의 초대

사람은 3차원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 세계에서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진행하는 하나의 선(線)이다. 과거의 미래 사이의 긴장과 연속적 왕복에서 인간에게 자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러나 현재는 무엇일까? 과연 시간은 무엇일까?
물리적이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의 시간은 사실 “사람”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시간을 체험한다. 인간 의식의 수준에서 시간은 늘어가기도 하고 가속화되기도 하며, 순간의 기분에 따라 망락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시간은 주관적이며 질적이며 전혀 다른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캐롤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시간은 인격”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프레드릭 뷰크너가 하나님을 향한 여정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부터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공간과 시간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철학에서 고전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왔다. 데카르트나 뉴턴 같은 이들은, 차이는 있으나 시간을 실재하며 이상적인 시간으로서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으로 논했으며, 반면 라이프니츠나 칸트 같은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관념적 존재로서, 또는 우리 지각의 선천적 틀로서 이야기한다.
본서에서 루이스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와 같은 철학적 논증들을 기반으로 한 듯 하다. 그러나 다만 철학의 분야로만 그것을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을 하는 인간은 여전히 3차원에 머물러 제한된 사고와 제한된 인식을 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시간을 실재하나 물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물리적이지 않다고 해서 전혀 관념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실재하며 현존하는, 또한 인간의 차원 그 이상의 신비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격일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를 실재하며 현존하는 신비스러운 시간과 공간으로 이끌어준다. 그리고 그곳은 시간의 공간의 시원(始原)으로서 우리 앞에 펼쳐진다. 또한 그곳은 전혀 3차원의 시공간과는 다른 신비이기에, 마법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사실 그 자체가 실상(實像)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기에, 본서에서 등장하는 마법이나 새로운 세계 등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내부적으로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을 환타지 문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데, 환타지 문학이 전제하고 있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새 세계에 대한 타당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환타지 문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은 단순한 창조물이 아니라 인격과 연관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3차원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이란 그것이 아무리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전혀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고 또한 느끼는 그 순간도 그것을 지각하는 순간 이미 흘러간 과거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사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이미 흘러간 것은 시간이 아니다. 인간은 소멸해 왔으나 시간은 여전하다. 시간이 이러한 속성을 갖고 있는 이유는 시간을 창조해낸, 시간보다 더 앞서 있던 존재자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간의 창조자가 ‘있다’! 그는 항상 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라고 거리낌 없이 선포할 수 있는 권위자이다. 그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다. 시간 이전에 그가 있었으며, 시간 이후에도 그가 있을 것이니,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다. 그의 이전도 그 이후도 없다. 그는 절대적으로 있는, 절대적인 실재이다. 그의 생명은 절대적인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이다.
따라서 본서에서 그에게 속한 시간과 공간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중간 세계에 관한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나 새롭게 건국된 나니아 나라에 대한 대목이다.
디고리는 어디에도 서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앉거나 누워 있는 듯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몸에 닿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p.44
이 숲은 너무나 생기 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p.45
만약 누가 디고리에게 “어디서 왔니?”라고 묻는다면, 디고리는 아마도 “난 항상 여기 있었어.”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전혀 지루할 것 같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p.47
“지금 우린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가로등까지 생명을 갖고 자라는 세계에 있는 거야,” p. 145
“나니아여, 나니아여, 나니아여, 깨어나라. 사랑하라. 생각하라. 말하라. 걸어다니는 나무가 되어라. 말하는 동물이 되어라. 성스러운 물이 되어라.” p.153
“창조물들아, 내가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리라. 너희에게 이 땅, 나니아를 영원히 주리라. 너희에게 숲과 과일과 강을 주리라. 너희에게 별도 줄 것이며, 나 자신을 주겠노라,...” p. 156
이처럼 창조자에 대한 루이스의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빚어낸 언어를 통해 우리는 감격스런 창조의 세계로 이끌림을 받는다. 그 세계의 시간은 흐르나 현재이며, 공간은 생명으로 충만하다. 그 세계는 그 자신이다. 나니아 건국자는 “깨어나라! 사랑하라! 생각하라! 말하라!” 등의 명령을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나니아 나라 그 자체에게 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 즉 시간과 공간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갈망을 품게 된다.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 살아있듯 인격적인 세계를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으랴? 이것이 말 그대로 신비(mystery)가 아니고서 또 무엇이랴? 한갓 백일몽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환상이요, 비전인 것이다.
이 환상적이고 신비스런 동화는 비단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시공간을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위한 책이다. 사랑하고 생각하고 거룩하게 될 명령을 받았으나,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하여 탄식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동화이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 옛 창조를 훨씬 초월한 새 창조를 바라고 소망하는 모든 인생들을 위한 동화일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을 이루며,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실 창조자의 영광(beauty)을 위한 동화이다.
● 저자 C. S. 루이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고, 그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고전학과 철학을 전공하였고, 1922년에는 최고 우등생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영어로 전공을 바꾸어 또 다시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옥스포드의 모들린 대락의 평의원(FELLOW)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1954년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신설된 중세 및 르네상스 영어 교수직에 머물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관한 전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시집, 문학비평, 우화, 과학소설, 일반소설, 아동도서 등 매우 광범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그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즉,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기가 지닌 지식으로 방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게 해주는 훌륭한 전도자요, 신학자요, 변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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