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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투어린 신학함의 결과물
개혁신학 탐구/이승구/하나/박상돈
이승구교수의 『개혁 신학 탐구』에서는 전반적으로 현대 신학의 제 오류들이 지적되면서 개혁 신학의 입장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우리의 신학함의 자세에서부터 고난, 생명 윤리, 그리고 기독교적 자아됨과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떠한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깊이 있게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 저자 이승구
총신대학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가치교육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합동신학원3년 재학중 영국으로 건너가 현재 스코틀랜드에 있는 University of St.Andrews신학부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국제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서평
본서에서는 여러 다양한 신학적 논제(논제(論題)들을 다루고 있는데 제 1부에서는 오늘의 신학적 상황가운데서의 개혁 신학을 정리함으로써 현재 우리네 신학과 신앙적 삶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먼저 '종말신학의 프롤레고메나(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하여)'에서는 그 동안 종말론 논제들에 있어서 소홀히 다루었던 "신약 성경적 종말 개념은 우리의 신학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임하게 되어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진행되고 있는 종말의 개념을 중요시하게 된다면 교의 신학에서 그 마지막으로 다루는 소위 '종말'론 정도에서 그 신학적 범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더 넓은 범주의 차원으로서 종말론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는 교의학적 시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런 종말 신학은 그리스도 종말론적 사역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끄신다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은 그 주권하에서 종말론적인 실존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종말 신학은 현세와 내세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오던 기존의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 삶의 전 영역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것이기에 매우 포괄적이며 균형잡힌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의 맥이 되기 때문에 신학 전체를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는 논점은 매우 창의적이고 탁월한 견해라고 할 수 있어 그 제안대로 조직 신학을 전체적으로 재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복음주의와 성경'에서는 복음주의자의 성경관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인정 여부가 그 시금석이 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먼저 성경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뜻을 찾으려고 하며 그 의미의 계시사적 위치를 고려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 자체에서 제시하는 하나님, 인간, 세계 이해로부터 우리의 사유를 바꾸는 계시의존적인 사색이 중요하며 우리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 역시도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부터 근거한 사유를 생활 속에서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참다운 복음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보면서 사상은 행동과의 관계를 역설하였던 쉐퍼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결국 우리 생각이 성경에 정초된 것이며,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에서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불변적으로 삼위일체적 관계를 가지신 분으로서 창조와 역사의 진행 속에서도 존재하시는 그대로 삼위일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주장한다든지, 혹은 그것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개념이 가변적으로 발전하거나 완성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에 대한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한쪽만을 편향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특별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에 근거한 신학들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고난과 기독교:"고난의 신학'을 위한 한 시론에서는 고난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기계적인 적용을 해서는 안됨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고난에 대처하는 방식과 고난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답게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특히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영광스러워지고 덕보려는 것에서 벗어나 예수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고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뜻의 구현을 위해 싸워나가며,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구현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들을 내어놓고 자신들을 다 허비하는 그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즉 영광의 신학만을 말하는 우리네 풍토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그 신앙적 삶의 본질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반성하고 개선되어야할 가중 중요한 대목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도의 삶'에서는 성령은 신적 주체이시며 내적 모순이 없으시고 성경을 늘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인격적으로 만드시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게 하심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모든 인격적 기능을 사용하여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받아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비추어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를 성령과의 교제가운데 해결해 가는 삶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자아 중심적인 욕심과 태도로 성령의 은사와 인도를 구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되기 쉬운 우리네 신앙적 패턴과 오류에 대하여 돌이켜 먼저 성령하나님께 삶의 모든 과정들을 겸허하게 여쭙고 그 뜻에 따라 순복하면서 인격적으로 아름답게 사는 삶의 중요성이 올바르게 강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제 2부에서는 과거의 신학적 전통들과 대화하는 개혁 신학이 정리되어 있는데 첫 번째, 중세적 종합을 이룬 천사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고찰에서는 아퀴나스가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원론적 체계를 세우고 이성과 인간의 의지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그의 신학을 정리함으로써 이성과 인간 의지의 기능이 하나님 앞에서 공적적 선도낼 수 있는 것으로 논의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타락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 종합주의적 혼합사상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중세 교회가 부패의 길로 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명분까지라도 채용할 수 있는 죄악된 근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연마된 비평 의식을 지녀야 하며 그것으로 먼저 자신의 내면적 삶과 동기를 성찰하고, 이 세상의 문화와 그 양태의 이면에 있는 잘못된 정신을 통찰해내어서 올바른 방향을 향해 돌이키게 할 수 있는 분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의 복음에 충실한 개혁 사상과 우리'에서는 루터의 회심과 복음의 자유하게 함을 깨달은 그 점이 감동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성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서 그 쟁송(Anfectung)가운데 복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려고 하지 않게 되며 이러한 복음이해는 모든 비성경적 규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이 복음 자체의 풍성함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고,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만 우리 삶 전체를 아주 책임감 있게 한다는 균형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된 지극히 풍성하고 폭넓은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고 체험한 그리스도안에서의 루터처럼 그 복음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또한 '종교개혁 주간에 가까이 하면서'에서는 개개인의 성도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에 의지하여 자신들이 연합하여 교회를 이룬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 개개인이 교회에 필수적인 성원인 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성숙한 교회의 특성은 교회의 성원들 간에 유대 관계가 매우 깊은 그 공동체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시간을 좀더 내어 교제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논지는 특히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으며 교제의 견고함이 결여되어 있는 우리네 상황을 돌이켜 볼 때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저술동기를 통해 본 신학의 과제'에서는 칼빈의 '강요' 작성 목적이 교육적 동기, 변증적 동기에 기인한 것이며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 일에 대해 준비를 시키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동기로부터 우리 역시 신학함의 동기와 목적을 정리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성경에 근거한 고백적 삶을 가르치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 성경적 가르침과 전통에 일치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 신학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학적 작업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립하도록 하게 하는 매우 논리성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한편 제 3부에서는 생명윤리를 위한 개혁 신학을 다루고 있는데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서는 생명의 과정에 관한 계시사적 고찰을 통해 생명에 대한 분류적 정의를 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으로 이끌어 가야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특히 신학적, 의학적 주장을 근거로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과 수정되었을 때에 태아는 존엄한 생명인 것을 직시해야함을 강조한 주장은 상술적 의료 윤리가 만연되어 함부로 낙태를 실행하는 잘못된 풍토에 계속적인 경종으로 남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인공수정에 대한 한 고찰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혼인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주의 문화사명을 이루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쾌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인공 수정의 제 종류들 중에 어떤 것이 가하고 어떤 것이 문제이며 어떤 것이 안되는 것인지 윤리적으로, 의학적으로 잘 밝혀지고 있다.
제 4부에서는 현재주의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판이 논의되고 있는데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몰트만과 융엘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들은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수립된다라고 보고 있어 삼위일체관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우리가 송영 중에 언급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역사의 종국에 가서야 완성될 삼위일체에 대한 선취적 고백이라고 주장하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존재론적 순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그들은 성경 계시 자체에 근거하기 보다는 본질보다 실존과 역사가 선행된다는 인본주의 철학에서 자신의 논거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또한 '헨드리쿠스 베르코프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베르코프가 여전히 슐라마허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만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베르코프는 삼위일체란 사람을 향해 계속적이고 개방된 사건을 지시하는 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성령에 대한 이해도 관계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성자에 대해서도 역사적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의해 충만케 된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있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심각하게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질문'에서는 판넨베르크가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부활에 대한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는 부활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음을 밝히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간성 자체의 승귀로 대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며 개혁주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과정 신학에 대한 서론적 비판'에서는 과정신학의 내용과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즉 과정신학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우주적 과정이 신이라 불리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사건은 다 신의 경험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과정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동시에 절대적이며 상대적이고 동시에 무한하고 유한하며, 동시에 창조자이고 창조함을 받는 양극적인 신으로 묘사되어 있어 정통 신학의 신론에서 완전히 빗나가는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과정신학에서 구원이란 각 개인을 참된 가치의 참된 수용을 향해 계속해서 유인하시는 신의 자발성, 준비되어 있음이라고 말하며 기독론에 있어서도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고, 성경도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철저하게 성경 계시 의존적인 신학과는 거리가 먼 자기 나름의 신학이라고 하겠다.
제 5부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개혁 신학적 한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자아됨의 의미'에서는 기독교 입장에서의 자아됨과 윤리적 자아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가 명쾌하게 드러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이해된 절망에 대한 철저한 개념을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 절망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를 믿는 사람만이 영(spirit)이며 자아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성경의 진리를 담아낸 사색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기독교적 자아됨은 윤리적 자아됨과 비연속적인 것인데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잘 인식하면서 윤리적인 단계에서 자아가 되는 방식과 기독교적 자아됨의 방식은 다르며 기독교적 자아는 오직 하나님과 연관해서만 자아가 된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자아됨은 자신의 절망적인 쟁송을 철저하게 깨달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철저하게 간구하는 성경적 가난한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아됨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승구 교수님의 본 논문을 통하여 기독교적 자아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한 '교육가능성에 대한 한 연구: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 한 접근'에서는 실존 철학을 근거로 교육학 이론을 구성한 이들의 교육철학을 소개하면서 그 제시점들이 더 진정한 것일 되려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의 실존과 그 의미, 그리고 교육관을 깊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언급되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를 정신(spirit)으로 알지 못하는 실존은 결국 절망이며 그러한 절망을 철저히 인식하며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두는 때에만 자아는 건강하고, 절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에 참교육은 참 실존에의 길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신의 조건으로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수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참된 자아의 회복이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앙함으로써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회복의 길이 있다는 복음에 기초한 것이기에 교육의 진정한 목적을 밝혀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교육의 방법까지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 6부에서는 개혁신학적 서평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포이 뜨리스 교수의 모세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에서는 포이뜨리스의 모세의 장막에 대한 이해가 율법이 상징과 그림자로 보여주던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는 점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 의미있는 것이지만 그 해석의 구체적인 부분들에 있어서는 책에서 언급된대로 신풍유주의에 흐를 수 있는 소지도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김균진 교수의 『기독교 조직신학Ⅳ』을 서평한 '과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교회론인가?'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는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특히 마태복음 16:18-19에 대하여 이 구절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후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도외시할 수 있는 개연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여자 사제직의 문제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 성례전에 대한 이해 등 교회론 전반에 있어서 성경의 진술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서평되어 있다.
이외에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정통주의 기독교에의 추구'에서는 복음주의가 현대적 물결에 예속되어 가는 것에 대해 개혁의 경종을 울리면서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신학적 비전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실증적인 논의는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배타주의의 강력한 변증을 칭송하며'에서는 로날드 내쉬가 그의 저서에서 다원주의적 구원관과 내포주의를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단, 내쉬의 책에서 존 샌더스가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복음주의적 내포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한 샌더스의 말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20세기 신학에 대한 평가'에서는 20세기 신학들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본 스텐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저서가 서평되어 있는데 학문함에 있어서 잘못된 양극단을 지양하는 균형 잡힌 접근의 중요성을 생각나게 하였다. 또한 '현대 상황에서의 개혁파 교회론의 제시를 칭송하며'에서는 클라우니의 교회론이 개혁파 교회론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를 잘 제시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러나 주해에 있어서 몇가지 오류에 가까운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의 한 준비'에서는 통합 윤리학회의 논문집에서 '생명', '문화', '복지', '미래'라는 네가지 주제로 나누어 각 학자들의 기독교적 대응을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한국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잘 언급되어 있지만 노영상 교수의 경우에는 몰트만의 이해에 근거하여 생태 신학을 정리했다는 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승구교수의 『개혁 신학 탐구』에서는 전반적으로 현대 신학의 제 오류들이 지적되면서 개혁 신학의 입장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학함의 자세에서부터 고난, 생명 윤리, 그리고 기독교적 자아됨과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떠한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깊이 있게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상은 행동을 낳는 것이기에 성경에 철저하게 의존된 균형 잡힌 그 개혁 신학 사상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실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 체계나 인본주의적인 신학 체계에 근거한 제반 논리와 담론들은 반드시 비평적으로 점검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책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그러한 비평적 안목의 틀을 깊이 있게 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지성적인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향한 따뜻한 열정을 품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실천적인 삶에로의 결단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이승구교수의 『개혁 신학 탐구』에서는 전반적으로 현대 신학의 제 오류들이 지적되면서 개혁 신학의 입장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우리의 신학함의 자세에서부터 고난, 생명 윤리, 그리고 기독교적 자아됨과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떠한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깊이 있게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 저자 이승구
총신대학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가치교육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합동신학원3년 재학중 영국으로 건너가 현재 스코틀랜드에 있는 University of St.Andrews신학부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국제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서평
본서에서는 여러 다양한 신학적 논제(논제(論題)들을 다루고 있는데 제 1부에서는 오늘의 신학적 상황가운데서의 개혁 신학을 정리함으로써 현재 우리네 신학과 신앙적 삶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먼저 '종말신학의 프롤레고메나(하나님 나라 신학을 지향하여)'에서는 그 동안 종말론 논제들에 있어서 소홀히 다루었던 "신약 성경적 종말 개념은 우리의 신학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임하게 되어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진행되고 있는 종말의 개념을 중요시하게 된다면 교의 신학에서 그 마지막으로 다루는 소위 '종말'론 정도에서 그 신학적 범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더 넓은 범주의 차원으로서 종말론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는 교의학적 시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런 종말 신학은 그리스도 종말론적 사역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끄신다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은 그 주권하에서 종말론적인 실존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종말 신학은 현세와 내세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오던 기존의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 삶의 전 영역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것이기에 매우 포괄적이며 균형잡힌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의 맥이 되기 때문에 신학 전체를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는 논점은 매우 창의적이고 탁월한 견해라고 할 수 있어 그 제안대로 조직 신학을 전체적으로 재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복음주의와 성경'에서는 복음주의자의 성경관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인정 여부가 그 시금석이 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먼저 성경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뜻을 찾으려고 하며 그 의미의 계시사적 위치를 고려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 자체에서 제시하는 하나님, 인간, 세계 이해로부터 우리의 사유를 바꾸는 계시의존적인 사색이 중요하며 우리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 역시도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부터 근거한 사유를 생활 속에서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참다운 복음주의자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보면서 사상은 행동과의 관계를 역설하였던 쉐퍼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결국 우리 생각이 성경에 정초된 것이며,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에서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불변적으로 삼위일체적 관계를 가지신 분으로서 창조와 역사의 진행 속에서도 존재하시는 그대로 삼위일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주장한다든지, 혹은 그것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개념이 가변적으로 발전하거나 완성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에 대한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한쪽만을 편향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특별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에 근거한 신학들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고난과 기독교:"고난의 신학'을 위한 한 시론에서는 고난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기계적인 적용을 해서는 안됨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고난에 대처하는 방식과 고난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답게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특히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영광스러워지고 덕보려는 것에서 벗어나 예수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고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뜻의 구현을 위해 싸워나가며,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구현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들을 내어놓고 자신들을 다 허비하는 그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즉 영광의 신학만을 말하는 우리네 풍토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그 신앙적 삶의 본질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반성하고 개선되어야할 가중 중요한 대목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도의 삶'에서는 성령은 신적 주체이시며 내적 모순이 없으시고 성경을 늘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인격적으로 만드시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게 하심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모든 인격적 기능을 사용하여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받아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비추어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를 성령과의 교제가운데 해결해 가는 삶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자아 중심적인 욕심과 태도로 성령의 은사와 인도를 구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되기 쉬운 우리네 신앙적 패턴과 오류에 대하여 돌이켜 먼저 성령하나님께 삶의 모든 과정들을 겸허하게 여쭙고 그 뜻에 따라 순복하면서 인격적으로 아름답게 사는 삶의 중요성이 올바르게 강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제 2부에서는 과거의 신학적 전통들과 대화하는 개혁 신학이 정리되어 있는데 첫 번째, 중세적 종합을 이룬 천사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고찰에서는 아퀴나스가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원론적 체계를 세우고 이성과 인간의 의지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그의 신학을 정리함으로써 이성과 인간 의지의 기능이 하나님 앞에서 공적적 선도낼 수 있는 것으로 논의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타락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 종합주의적 혼합사상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중세 교회가 부패의 길로 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명분까지라도 채용할 수 있는 죄악된 근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연마된 비평 의식을 지녀야 하며 그것으로 먼저 자신의 내면적 삶과 동기를 성찰하고, 이 세상의 문화와 그 양태의 이면에 있는 잘못된 정신을 통찰해내어서 올바른 방향을 향해 돌이키게 할 수 있는 분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의 복음에 충실한 개혁 사상과 우리'에서는 루터의 회심과 복음의 자유하게 함을 깨달은 그 점이 감동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성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서 그 쟁송(Anfectung)가운데 복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려고 하지 않게 되며 이러한 복음이해는 모든 비성경적 규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이 복음 자체의 풍성함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고,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만 우리 삶 전체를 아주 책임감 있게 한다는 균형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된 지극히 풍성하고 폭넓은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고 체험한 그리스도안에서의 루터처럼 그 복음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또한 '종교개혁 주간에 가까이 하면서'에서는 개개인의 성도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에 의지하여 자신들이 연합하여 교회를 이룬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 개개인이 교회에 필수적인 성원인 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성숙한 교회의 특성은 교회의 성원들 간에 유대 관계가 매우 깊은 그 공동체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시간을 좀더 내어 교제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논지는 특히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으며 교제의 견고함이 결여되어 있는 우리네 상황을 돌이켜 볼 때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저술동기를 통해 본 신학의 과제'에서는 칼빈의 '강요' 작성 목적이 교육적 동기, 변증적 동기에 기인한 것이며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 일에 대해 준비를 시키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동기로부터 우리 역시 신학함의 동기와 목적을 정리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성경에 근거한 고백적 삶을 가르치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 성경적 가르침과 전통에 일치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 신학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학적 작업의 목표를 명확하게 정립하도록 하게 하는 매우 논리성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한편 제 3부에서는 생명윤리를 위한 개혁 신학을 다루고 있는데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서는 생명의 과정에 관한 계시사적 고찰을 통해 생명에 대한 분류적 정의를 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으로 이끌어 가야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특히 신학적, 의학적 주장을 근거로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과 수정되었을 때에 태아는 존엄한 생명인 것을 직시해야함을 강조한 주장은 상술적 의료 윤리가 만연되어 함부로 낙태를 실행하는 잘못된 풍토에 계속적인 경종으로 남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인공수정에 대한 한 고찰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혼인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주의 문화사명을 이루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쾌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인공 수정의 제 종류들 중에 어떤 것이 가하고 어떤 것이 문제이며 어떤 것이 안되는 것인지 윤리적으로, 의학적으로 잘 밝혀지고 있다.
제 4부에서는 현재주의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판이 논의되고 있는데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몰트만과 융엘의 신학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들은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수립된다라고 보고 있어 삼위일체관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은 우리가 송영 중에 언급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역사의 종국에 가서야 완성될 삼위일체에 대한 선취적 고백이라고 주장하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존재론적 순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그들은 성경 계시 자체에 근거하기 보다는 본질보다 실존과 역사가 선행된다는 인본주의 철학에서 자신의 논거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또한 '헨드리쿠스 베르코프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베르코프가 여전히 슐라마허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만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베르코프는 삼위일체란 사람을 향해 계속적이고 개방된 사건을 지시하는 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성령에 대한 이해도 관계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성자에 대해서도 역사적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의해 충만케 된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있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심각하게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질문'에서는 판넨베르크가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부활에 대한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는 부활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음을 밝히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간성 자체의 승귀로 대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며 개혁주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과정 신학에 대한 서론적 비판'에서는 과정신학의 내용과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즉 과정신학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우주적 과정이 신이라 불리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사건은 다 신의 경험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과정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동시에 절대적이며 상대적이고 동시에 무한하고 유한하며, 동시에 창조자이고 창조함을 받는 양극적인 신으로 묘사되어 있어 정통 신학의 신론에서 완전히 빗나가는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과정신학에서 구원이란 각 개인을 참된 가치의 참된 수용을 향해 계속해서 유인하시는 신의 자발성, 준비되어 있음이라고 말하며 기독론에 있어서도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고, 성경도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철저하게 성경 계시 의존적인 신학과는 거리가 먼 자기 나름의 신학이라고 하겠다.
제 5부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개혁 신학적 한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자아됨의 의미'에서는 기독교 입장에서의 자아됨과 윤리적 자아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가 명쾌하게 드러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이해된 절망에 대한 철저한 개념을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 절망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를 믿는 사람만이 영(spirit)이며 자아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성경의 진리를 담아낸 사색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기독교적 자아됨은 윤리적 자아됨과 비연속적인 것인데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잘 인식하면서 윤리적인 단계에서 자아가 되는 방식과 기독교적 자아됨의 방식은 다르며 기독교적 자아는 오직 하나님과 연관해서만 자아가 된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자아됨은 자신의 절망적인 쟁송을 철저하게 깨달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철저하게 간구하는 성경적 가난한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아됨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승구 교수님의 본 논문을 통하여 기독교적 자아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한 '교육가능성에 대한 한 연구: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 한 접근'에서는 실존 철학을 근거로 교육학 이론을 구성한 이들의 교육철학을 소개하면서 그 제시점들이 더 진정한 것일 되려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의 실존과 그 의미, 그리고 교육관을 깊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언급되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를 정신(spirit)으로 알지 못하는 실존은 결국 절망이며 그러한 절망을 철저히 인식하며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두는 때에만 자아는 건강하고, 절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에 참교육은 참 실존에의 길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신의 조건으로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수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참된 자아의 회복이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앙함으로써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회복의 길이 있다는 복음에 기초한 것이기에 교육의 진정한 목적을 밝혀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참된 교육의 방법까지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 6부에서는 개혁신학적 서평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포이 뜨리스 교수의 모세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에서는 포이뜨리스의 모세의 장막에 대한 이해가 율법이 상징과 그림자로 보여주던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는 점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 의미있는 것이지만 그 해석의 구체적인 부분들에 있어서는 책에서 언급된대로 신풍유주의에 흐를 수 있는 소지도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김균진 교수의 『기독교 조직신학Ⅳ』을 서평한 '과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교회론인가?'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는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특히 마태복음 16:18-19에 대하여 이 구절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후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도외시할 수 있는 개연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여자 사제직의 문제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 성례전에 대한 이해 등 교회론 전반에 있어서 성경의 진술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서평되어 있다.
이외에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정통주의 기독교에의 추구'에서는 복음주의가 현대적 물결에 예속되어 가는 것에 대해 개혁의 경종을 울리면서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신학적 비전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실증적인 논의는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배타주의의 강력한 변증을 칭송하며'에서는 로날드 내쉬가 그의 저서에서 다원주의적 구원관과 내포주의를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단, 내쉬의 책에서 존 샌더스가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복음주의적 내포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한 샌더스의 말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20세기 신학에 대한 평가'에서는 20세기 신학들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본 스텐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저서가 서평되어 있는데 학문함에 있어서 잘못된 양극단을 지양하는 균형 잡힌 접근의 중요성을 생각나게 하였다. 또한 '현대 상황에서의 개혁파 교회론의 제시를 칭송하며'에서는 클라우니의 교회론이 개혁파 교회론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를 잘 제시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러나 주해에 있어서 몇가지 오류에 가까운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의 한 준비'에서는 통합 윤리학회의 논문집에서 '생명', '문화', '복지', '미래'라는 네가지 주제로 나누어 각 학자들의 기독교적 대응을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한국 기독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잘 언급되어 있지만 노영상 교수의 경우에는 몰트만의 이해에 근거하여 생태 신학을 정리했다는 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승구교수의 『개혁 신학 탐구』에서는 전반적으로 현대 신학의 제 오류들이 지적되면서 개혁 신학의 입장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학함의 자세에서부터 고난, 생명 윤리, 그리고 기독교적 자아됨과 교육 문제 등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떠한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깊이 있게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상은 행동을 낳는 것이기에 성경에 철저하게 의존된 균형 잡힌 그 개혁 신학 사상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실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 체계나 인본주의적인 신학 체계에 근거한 제반 논리와 담론들은 반드시 비평적으로 점검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책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그러한 비평적 안목의 틀을 깊이 있게 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지성적인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향한 따뜻한 열정을 품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실천적인 삶에로의 결단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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