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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된 부흥주의와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
부흥과 부흥주의/이안 머레이/부흥과개혁사/[권지성]
이안 머레이의 충격적인 부흥에 대한 증언들이 담겨 있는 <부흥과 부흥주의>가 부흥과 개혁사에서 새롭게 나왔다. 이안 머레이(1931~)는 로이드 존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했으며, <The Banner of Truth Trust>를 세워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와 전기문의 발행으로 개혁 신학의 붐을 일으킨 신학자이다. 그는 이미 전작 <Pentecost, today>로 올바른 부흥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있던 부흥관과 18세기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부흥관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은혜와 부흥이라는 것이 상당한 부분에서 교묘히 계산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나면 씁쓸함과 함께 칼빈주의에 대적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의 거짓된 부흥주의를 폭로한다. 이안 머레이는 그 근원이 되는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알미니안주의와 19세기 초반의 찰스 피니의 소위 강단 초청과 그의 사상 배후에 깔려 있는 근원을 조사하여 이 후, 미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흐름이 인간 중심 사상으로 바뀌었음을 역설한다. 바로 인간 편에서 믿기로 결정하고 행동을 보여주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5분, 10분, 5분 내에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카운트를 하며 회중들을 선동하여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이 당시 복음 전도 방식은 경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부흥과 부흥주의의 차이점, 발생과 그 원인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당시의 미국 복음주의의 생성 과정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부흥의 변천 단계를 크게 3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부흥이 유일한 부흥관인 시기이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광대하신 영이 편만히 부어짐으로써, 교회에 믿는 무리가 더해지는 역사라는 견해를 따른 시기이다. 즉, 부흥은 소낙비와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하나님의 강권적인 분출과 강림으로 묘사되어진다. 둘째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부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흥주의의 등장이다. 1830년 이전의 분별없는 야외 집회와 일정기간 계속되는 신앙 부흥 집회에서 그들은 구도좌석에 즉각적으로 앉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여기었다. 셋째, 1958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부흥과 부흥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어주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노버의 부흥을 주도한 새무엘 데이비스(1723~1761년)의 사역은 바로 참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으심과 역사하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과 펜실베니아 서부 지역의 부흥, 1780년대 버지니아 부흥, 아키발더 알렉산더와 그레이엄에 의한 장로교의 부흥은 제 2차 영적 대각성 운동(1800~1825)과 함께 참 부흥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준다. 특히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이 시기의 경건한 하나님의 설교자들이었다. "나에게는 아주 적은, 정말 아주 적은 신앙이 있습니다. 나는 아마도 3~4개월에 한 번 정도 정말 내가 소원하는 만큼의 능력으로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은혜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주 변덕부리는 나로서는 정말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나는 기껏해야 그리스도 교회의 촛대에 연기 나는 심지이며 꺼져 가는 촛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이 타락한 마음의 심지에 임할 때 그것은 떨리게 되고 새롭게 되고 감화되며 가끔씩 생명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변덕스럽고 작은 신앙만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꺼져가는 촛불”에 비유한 사무엘 데이비서의 겸손한 고백은 교만한 나의 마음을 꾸짖는 듯하다. “참된 경건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 교훈에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실어준다. 거룩한 삶은 심장에 전달되며 심장을 사로잡는다.”라는 프린스턴 학장이었던 위더스푼의 말을 통하여 나는 거룩한 삶과 경건이 학문적인 지식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역자들과 설교자들의 요건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그레이엄의 사역은 또한 나에게 목석 같은 설교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는 분명 1789년 부흥을 경험하기 이전에도 능력 있는 목회자 였으나, 알렉산더의 증언과 같이 부흥의 시기에 그는 그 어떠한 당대의 설교자보다 더욱 강력한 설교자가 되었다. 페이슨은 위대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설교자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는 내 마음이 통회하기 전까지, 회개함으로 내 마음이 복종 되고 녹기 전까지, 마치 내 영혼이 지금 막 용서를 받은 것 같이 느끼지 전까지 그리고 내 마음이 부드러움과 연민으로 가득 차기 전까지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페이슨의 이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느낀다. 특별히 이 시기에는 어떤 특별한 부흥을 위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한 죄인의 각성과 중생과 회심의 급진적인 진행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과 이 시기 사람들이 생각한 부흥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인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부으심이 부흥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시기였다. 둘째, 부흥은 인간에 의해서 다시 반복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부흥부의(1858~1958)가 지배한 시기이다. 이것은 켄터키의 부흥(1800년)으로 인하여 발현한 부흥주의의 영향이다. 켄터키의 야외 집회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야외 집회에 신령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이른바 “강단 초청”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의 수를 세기 시작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회심론을 바탕으로 한 알미니안 주의가 미국 교회 내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찰스 피니는 “당신이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설교가들이 부흥을 원하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부흥이 오지 않은 것으로 구학파의 견해를 따르던 설교가들을 매도해 버렸다. 이것은 결국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었던 것이다. 부흥주의는 계산적인 방법으로 부흥이 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쓰고 힘쓰고 갖가지 전도 집회와 간증집회와 행사 프로그램과 인간의 활동과 의지로 다시 하나님을 동원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부흥주의는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방언하고 예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능히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찰스 피니의 생각이 나에게 상당 부분이 녹아 있음을 알고 참으로 놀랍고 공포스러웠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그 뿌리에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흥주의의 시대 정신은 반지성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성경의 교리와 진리는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다. 지성만을 추구하고 경험을 멸시하는 시대 풍조도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의 분별없는 경험은 광신주의로 흐를 것이다. 이러한 피니로 인한 부흥주의 광범위한 유포는 장로교와 침례교의 분열을 가져왔고, 잘못된 방법임에도 결과적인 사역의 성공으로 인하여 부흥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부흥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영혼을 얻는 것이지만,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기의 동북부 지역 지도자 5인의 삶과 사역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인위적인 방법에 의한 사람의 수적 증가가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죄인된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였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르짖음 속에도,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효과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리는 단지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는 소리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령 내부 깊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위의 글은 페이슨이 행한 설교에서 인용한 것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뭔지 모를 마음의 짖누르는 듯한 부담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이러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논쟁은 내 영혼 안에서 거짓되고 쓸데없는 에너지만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논쟁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다.”라는 한 설교자의 말은 내 안에 논쟁을 위한 끝없는 논쟁을 종식시키게 한다. 이 책을 읽고 지나치게 논쟁에 집착하기 보다는 올바른 하나님의 부어주심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였다. 진리에 대한 투철하고 직접적인 논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과 성령의 충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 일의 근본을 들었으므로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서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멸망 당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주님처럼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나의 철광석 같은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부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확장되어지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저자의 바탕에 깔려 있는 청교도적인 사상은 우리가 믿기 위해 선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생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현대 복음 증거 방식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선교 단체 출신으로 “사영리”와 같은 전도의 방식을 굳게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전도하면서 한 번도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으면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하나님의 빛의 비추심에 의한 중생과 거듭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 부를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견고히 믿고 있다. 다만, 부흥이 지나간 자리에 형식적인 부흥주의만 남은 것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전도의 방법만 성행하는 현재의 행태는 부끄러운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부흥주의의 발현과 폐해에 대해 동의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등장이 마치 새로운 학문의 조류와 부흥주의로 인해서 야기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 사역자들의 두드러진 출현은 선교와 전도를 향한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과 부흥으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 수많은 평신도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은 바로 부흥의 소산물들이며, 그들은 목회자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들의 영향력의 약화에 부흥주의의 폐단이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자만, 평신도 사역자 시대의 도래를 이러한 폐단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된다. 저자는 참 훌륭한 부흥 신학자이며, 전기 작가임에 분명하다. 저자가 신학적인 논증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금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바라기는 학문적인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대립 구조나 구학파와 신학파의 대립으로 몰고 가지 말고 칼빈주의의 바탕에서 알미니안주의 속에 있는 칼빈주의를 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했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찰스 피니, D.L. 무디, 빌리 그래함 모두 부흥의 시대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전체 삶을 놓고 평가되어야지 부흥주의라는 부분 하나만을 놓고 칼질하려 해서는 안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방대한 미국 교회 역사 속에 일어난 부흥을 다루는 이 책은 부흥주의의 근원을 살펴, 오늘날의 상황을 진단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통찰력 있는 중요한 저서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오염된 교리와 잘못된 부흥관에 수긍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부흥의 이야기를 듣고 분별이 끝난 성도라면, 하나님의 손에 의한 하늘을 가르며 임하실 성령의 부으심을 간절히 구하자. 우리가 오게 할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조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부흥이기에 이것을 달라고 이 땅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시기 때문이다. 저자 이안 머리(Iain H. Murray)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전기 작가이자 부흥신학자로서 로이드 존스, 존 머리,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여러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청교도 종말관]등의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했다. 1931년 영국 랭커셔에서 출생해 더람 대학교에서 수학한 이안 머리는 청교도와 부흥신학에 해박하나 지식을 가진 장래성 있는 인재로 주목받아 로이드 존스에게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하기도 했고,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 년 목회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안 머리는 1957년, 잭 쿠럼과 함께 '진리의 깃발사'를 공동 설립하여, 지금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개혁 및 청교도 전문서적 출판을 통해 20세기 후반 개혁신학, 청교도 신학, 부흥신학의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이안 머레이의 충격적인 부흥에 대한 증언들이 담겨 있는 <부흥과 부흥주의>가 부흥과 개혁사에서 새롭게 나왔다. 이안 머레이(1931~)는 로이드 존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했으며, <The Banner of Truth Trust>를 세워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와 전기문의 발행으로 개혁 신학의 붐을 일으킨 신학자이다. 그는 이미 전작 <Pentecost, today>로 올바른 부흥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있던 부흥관과 18세기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부흥관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은혜와 부흥이라는 것이 상당한 부분에서 교묘히 계산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나면 씁쓸함과 함께 칼빈주의에 대적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의 거짓된 부흥주의를 폭로한다. 이안 머레이는 그 근원이 되는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알미니안주의와 19세기 초반의 찰스 피니의 소위 강단 초청과 그의 사상 배후에 깔려 있는 근원을 조사하여 이 후, 미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흐름이 인간 중심 사상으로 바뀌었음을 역설한다. 바로 인간 편에서 믿기로 결정하고 행동을 보여주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5분, 10분, 5분 내에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카운트를 하며 회중들을 선동하여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이 당시 복음 전도 방식은 경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부흥과 부흥주의의 차이점, 발생과 그 원인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당시의 미국 복음주의의 생성 과정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부흥의 변천 단계를 크게 3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부흥이 유일한 부흥관인 시기이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광대하신 영이 편만히 부어짐으로써, 교회에 믿는 무리가 더해지는 역사라는 견해를 따른 시기이다. 즉, 부흥은 소낙비와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하나님의 강권적인 분출과 강림으로 묘사되어진다. 둘째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부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흥주의의 등장이다. 1830년 이전의 분별없는 야외 집회와 일정기간 계속되는 신앙 부흥 집회에서 그들은 구도좌석에 즉각적으로 앉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여기었다. 셋째, 1958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부흥과 부흥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어주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노버의 부흥을 주도한 새무엘 데이비스(1723~1761년)의 사역은 바로 참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으심과 역사하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과 펜실베니아 서부 지역의 부흥, 1780년대 버지니아 부흥, 아키발더 알렉산더와 그레이엄에 의한 장로교의 부흥은 제 2차 영적 대각성 운동(1800~1825)과 함께 참 부흥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준다. 특히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이 시기의 경건한 하나님의 설교자들이었다. "나에게는 아주 적은, 정말 아주 적은 신앙이 있습니다. 나는 아마도 3~4개월에 한 번 정도 정말 내가 소원하는 만큼의 능력으로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은혜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주 변덕부리는 나로서는 정말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나는 기껏해야 그리스도 교회의 촛대에 연기 나는 심지이며 꺼져 가는 촛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이 타락한 마음의 심지에 임할 때 그것은 떨리게 되고 새롭게 되고 감화되며 가끔씩 생명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변덕스럽고 작은 신앙만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꺼져가는 촛불”에 비유한 사무엘 데이비서의 겸손한 고백은 교만한 나의 마음을 꾸짖는 듯하다. “참된 경건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 교훈에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실어준다. 거룩한 삶은 심장에 전달되며 심장을 사로잡는다.”라는 프린스턴 학장이었던 위더스푼의 말을 통하여 나는 거룩한 삶과 경건이 학문적인 지식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역자들과 설교자들의 요건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그레이엄의 사역은 또한 나에게 목석 같은 설교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는 분명 1789년 부흥을 경험하기 이전에도 능력 있는 목회자 였으나, 알렉산더의 증언과 같이 부흥의 시기에 그는 그 어떠한 당대의 설교자보다 더욱 강력한 설교자가 되었다. 페이슨은 위대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설교자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는 내 마음이 통회하기 전까지, 회개함으로 내 마음이 복종 되고 녹기 전까지, 마치 내 영혼이 지금 막 용서를 받은 것 같이 느끼지 전까지 그리고 내 마음이 부드러움과 연민으로 가득 차기 전까지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페이슨의 이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느낀다. 특별히 이 시기에는 어떤 특별한 부흥을 위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한 죄인의 각성과 중생과 회심의 급진적인 진행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과 이 시기 사람들이 생각한 부흥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인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부으심이 부흥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시기였다. 둘째, 부흥은 인간에 의해서 다시 반복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부흥부의(1858~1958)가 지배한 시기이다. 이것은 켄터키의 부흥(1800년)으로 인하여 발현한 부흥주의의 영향이다. 켄터키의 야외 집회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야외 집회에 신령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이른바 “강단 초청”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의 수를 세기 시작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회심론을 바탕으로 한 알미니안 주의가 미국 교회 내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찰스 피니는 “당신이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설교가들이 부흥을 원하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부흥이 오지 않은 것으로 구학파의 견해를 따르던 설교가들을 매도해 버렸다. 이것은 결국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었던 것이다. 부흥주의는 계산적인 방법으로 부흥이 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쓰고 힘쓰고 갖가지 전도 집회와 간증집회와 행사 프로그램과 인간의 활동과 의지로 다시 하나님을 동원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부흥주의는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방언하고 예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능히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찰스 피니의 생각이 나에게 상당 부분이 녹아 있음을 알고 참으로 놀랍고 공포스러웠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그 뿌리에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흥주의의 시대 정신은 반지성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성경의 교리와 진리는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다. 지성만을 추구하고 경험을 멸시하는 시대 풍조도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의 분별없는 경험은 광신주의로 흐를 것이다. 이러한 피니로 인한 부흥주의 광범위한 유포는 장로교와 침례교의 분열을 가져왔고, 잘못된 방법임에도 결과적인 사역의 성공으로 인하여 부흥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부흥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영혼을 얻는 것이지만,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기의 동북부 지역 지도자 5인의 삶과 사역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인위적인 방법에 의한 사람의 수적 증가가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죄인된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였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르짖음 속에도,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효과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리는 단지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는 소리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령 내부 깊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위의 글은 페이슨이 행한 설교에서 인용한 것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뭔지 모를 마음의 짖누르는 듯한 부담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이러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논쟁은 내 영혼 안에서 거짓되고 쓸데없는 에너지만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논쟁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다.”라는 한 설교자의 말은 내 안에 논쟁을 위한 끝없는 논쟁을 종식시키게 한다. 이 책을 읽고 지나치게 논쟁에 집착하기 보다는 올바른 하나님의 부어주심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였다. 진리에 대한 투철하고 직접적인 논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과 성령의 충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 일의 근본을 들었으므로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서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멸망 당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주님처럼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나의 철광석 같은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부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확장되어지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저자의 바탕에 깔려 있는 청교도적인 사상은 우리가 믿기 위해 선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생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현대 복음 증거 방식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선교 단체 출신으로 “사영리”와 같은 전도의 방식을 굳게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전도하면서 한 번도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으면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하나님의 빛의 비추심에 의한 중생과 거듭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 부를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견고히 믿고 있다. 다만, 부흥이 지나간 자리에 형식적인 부흥주의만 남은 것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전도의 방법만 성행하는 현재의 행태는 부끄러운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부흥주의의 발현과 폐해에 대해 동의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등장이 마치 새로운 학문의 조류와 부흥주의로 인해서 야기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 사역자들의 두드러진 출현은 선교와 전도를 향한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과 부흥으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 수많은 평신도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은 바로 부흥의 소산물들이며, 그들은 목회자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들의 영향력의 약화에 부흥주의의 폐단이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자만, 평신도 사역자 시대의 도래를 이러한 폐단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된다. 저자는 참 훌륭한 부흥 신학자이며, 전기 작가임에 분명하다. 저자가 신학적인 논증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금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바라기는 학문적인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대립 구조나 구학파와 신학파의 대립으로 몰고 가지 말고 칼빈주의의 바탕에서 알미니안주의 속에 있는 칼빈주의를 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했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찰스 피니, D.L. 무디, 빌리 그래함 모두 부흥의 시대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전체 삶을 놓고 평가되어야지 부흥주의라는 부분 하나만을 놓고 칼질하려 해서는 안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방대한 미국 교회 역사 속에 일어난 부흥을 다루는 이 책은 부흥주의의 근원을 살펴, 오늘날의 상황을 진단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통찰력 있는 중요한 저서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오염된 교리와 잘못된 부흥관에 수긍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부흥의 이야기를 듣고 분별이 끝난 성도라면, 하나님의 손에 의한 하늘을 가르며 임하실 성령의 부으심을 간절히 구하자. 우리가 오게 할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조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부흥이기에 이것을 달라고 이 땅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시기 때문이다. 저자 이안 머리(Iain H. Murray)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전기 작가이자 부흥신학자로서 로이드 존스, 존 머리,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여러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청교도 종말관]등의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했다. 1931년 영국 랭커셔에서 출생해 더람 대학교에서 수학한 이안 머리는 청교도와 부흥신학에 해박하나 지식을 가진 장래성 있는 인재로 주목받아 로이드 존스에게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하기도 했고,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 년 목회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안 머리는 1957년, 잭 쿠럼과 함께 '진리의 깃발사'를 공동 설립하여, 지금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개혁 및 청교도 전문서적 출판을 통해 20세기 후반 개혁신학, 청교도 신학, 부흥신학의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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