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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와 침묵의 기도
예수의 기도/무명/대한기독교서회/[서중한]
이 책은 이름 없는 러시아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믿음의 성인들을 만나 말씀의 의미를 전해 듣는 중 ‘예수의 기도’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야 말로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이후 14년 동안 ‘예수의 기도’를 통해 이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사건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기도(The Jesus Prayer)를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제법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한 동안 ‘예수기도’를 새벽기도 시간에 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교회 현실에서 ‘예수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반복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읊조리는 예수의 기도는 적어도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고요와 침묵을 요구하기 때문에 ‘소리기도vocal prayer’에 익숙한 우리네 교회에서는 부적합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아니라 호흡이 형성되는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려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오늘 우리와는 현격한 거리가 있는 기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이 책의 「이름 없는 순례자」도 항상 예수기도를 올릴 수 있던 고요와 침묵의 상황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주어진 시간들을 기도에 적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기도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공적인 인정을 받는 것은 13-4세기 경이지만 그 기원은 4-5세기 사막 압바들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기도는 1500년 이상을 그리스도교 안에서 흘러 온 것입니다. 짧은 집중기도가 갖는 힘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전해진 기도의 형태들이 개신교에 잘 알려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개신교 신학과 신앙이 그리스도교 전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없는 시간 속에 퇴적(堆積)된 신앙의 유산들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직 말씀’이란 모토를 보다 풍요롭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예수기도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기도의 상(像)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에 대한 헌신과 내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에 집중하는 반복적인 기도훈련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처럼 자연의 모든 것을 통해 도달하는 관상(觀想)의 형태가 아니라 기도의 핵심이 되는 한 마디 고백을 통해 그 분과 하나 됨을 이루려는 무념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 주변 사람들의 심원의 냉기(冷氣)를 가르며 소리쳤던 그 한 마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가 예수 기도의 전부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 하나를 붙잡고 스물의 나이에 집을 나서 14년간의 순례의 길을 떠난 이사람, 팔 하나를 쓸 수 없었던 불구자, 나는 이 사람에게서 구도의 길을 만납니다. 말씀을 품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길을 떠나는 일, 그래서 웅대한 시내산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 삶의 작은 멧부리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이루어야할 일생의 과업임을 생각해 봅니다. 책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었던 기도의 순례를 엿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도시 목회 속에 상실된 순례의 길은 사람들을 대하는 넉넉함을 허락합니다. 사람을 헤아려주고 사람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나 이 땅위에서 순례자임을 기억케 합니다.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동방정교의 한 기도형태를 엿보는 일이어서 좀 색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도 이름 없는 순례자와 함께 예수의 기도를 가슴에 품고 러시아의 낯선 동네로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책은 이름 없는 러시아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믿음의 성인들을 만나 말씀의 의미를 전해 듣는 중 ‘예수의 기도’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야 말로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이후 14년 동안 ‘예수의 기도’를 통해 이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사건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기도(The Jesus Prayer)를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제법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한 동안 ‘예수기도’를 새벽기도 시간에 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교회 현실에서 ‘예수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반복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읊조리는 예수의 기도는 적어도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고요와 침묵을 요구하기 때문에 ‘소리기도vocal prayer’에 익숙한 우리네 교회에서는 부적합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아니라 호흡이 형성되는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려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오늘 우리와는 현격한 거리가 있는 기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이 책의 「이름 없는 순례자」도 항상 예수기도를 올릴 수 있던 고요와 침묵의 상황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주어진 시간들을 기도에 적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기도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공적인 인정을 받는 것은 13-4세기 경이지만 그 기원은 4-5세기 사막 압바들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기도는 1500년 이상을 그리스도교 안에서 흘러 온 것입니다. 짧은 집중기도가 갖는 힘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전해진 기도의 형태들이 개신교에 잘 알려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개신교 신학과 신앙이 그리스도교 전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없는 시간 속에 퇴적(堆積)된 신앙의 유산들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직 말씀’이란 모토를 보다 풍요롭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예수기도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기도의 상(像)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에 대한 헌신과 내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에 집중하는 반복적인 기도훈련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처럼 자연의 모든 것을 통해 도달하는 관상(觀想)의 형태가 아니라 기도의 핵심이 되는 한 마디 고백을 통해 그 분과 하나 됨을 이루려는 무념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 주변 사람들의 심원의 냉기(冷氣)를 가르며 소리쳤던 그 한 마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가 예수 기도의 전부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 하나를 붙잡고 스물의 나이에 집을 나서 14년간의 순례의 길을 떠난 이사람, 팔 하나를 쓸 수 없었던 불구자, 나는 이 사람에게서 구도의 길을 만납니다. 말씀을 품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길을 떠나는 일, 그래서 웅대한 시내산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 삶의 작은 멧부리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이루어야할 일생의 과업임을 생각해 봅니다. 책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었던 기도의 순례를 엿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도시 목회 속에 상실된 순례의 길은 사람들을 대하는 넉넉함을 허락합니다. 사람을 헤아려주고 사람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나 이 땅위에서 순례자임을 기억케 합니다.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동방정교의 한 기도형태를 엿보는 일이어서 좀 색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도 이름 없는 순례자와 함께 예수의 기도를 가슴에 품고 러시아의 낯선 동네로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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