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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전기작가가 쓴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 삶과 신앙/이안 머레이/윤상문,전광규/이레서원/[권지성]
만약 단 한 권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전기문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이 책을 당신에게 권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통하여,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문이 소개되었으나, 이 책의 저자가 이안 머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이 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답게 책의 모든 것에서 그의 20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성실함과 노력이 구석구석에 배여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은 1867년 7월 21일에 쓰여진 것이다.) 그는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 아더 핑크, 존 머레이,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그리고 이 책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신앙의 거인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또한, 그의 해박한 역사와 부흥에 대한 지식은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부흥과 바로 세우기’와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부흥과 부흥주의’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사실 지난 20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로이드 존스였고, 이러한 관심을 대중적인 출판물로 펼쳐 낸 사람이 “The Banner of Truth Trust”의 이안 머레이임을 생각해 볼 때, 진작 나왔어야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물이 이제라도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참 신앙인이요, 그리스도인으로, 2번의 대 부흥을 경험한 목회자이자, 최고의 부흥 신학자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끝없는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끝이 없다. 예일대학의 전집이 거의 대부분 출간 됨으로써 이제 그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인 활기를 띤 것 같다. 그에 대한 평가는 비단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책과는 다르게 그를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의 하나로 생각하거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선생님으로 생각했던 니고데모의 영적인 무지함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일대의 에드워즈 전집이 불신자의 그룹에서 시작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인 것 같다.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이틀이 붙어 있고, 그에 대한 세미나를 한다면 그는 엄청나게 많은 타이틀이 붙을 것이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며, 신학자, 탁월한 목회자이며 철학자, 부흥사, 선교사등이다. 책 뒷면의 국내의 유명 교수와 목회자들의 추천과 더불어 서론 부분 전에 들어가는 여러 사람들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평가는 그를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여기서 2명의 인물의 말을 들어 보자. 먼저, 20세기 최고의 설교가이자, ‘부흥’이라는 저서로 한국인에게 유명한 로이드 존스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실력 있는 신학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전도자였다. 그는 뛰어난 부흥 신학자였다. 만약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에드워즈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부흥 운동은 두 권짜리 에드워즈 전집과 같은 책들을 읽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P.20)
또한, 에드워즈와 동시대를 살았고, 함께 동역하기도 하였던 바울 이후의 최고의 전도자이며, 부흥사인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에드워즈는 믿을 수 있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다. 지금까지 모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없다.’(P.18)
이렇게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을 통하여 그의 진면목을 소개해 준다. 그러나, 전기문이라는 형식은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여 그 시대의 역사를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당대의 인물들의 생각과 사상을 읽을 수 있으며, 그들이 가졌던 영적인 고민들과 갈등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안 머레이는 단순히 에드워즈의 삶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신앙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그 접촉점을 찾아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과 인간 중심적인 신앙관을 지적해 낸다. 이것이 바로 다른 에드워즈의 전기문과 이 책의 다른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간단히 몇 가지 다루고자 한다.
조화와 균형이 필요성
신앙은 늘 균형을 가지고 있다. 참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성주의와 거리가 멀며, 체험만을 애기하는 체험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또한, 행동만을 강요하는 율법주의적인 행동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3가지의 조화가 필요하다. 에드워즈의 신앙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이라서 이해하기가 힘들다라는 평가는 옳으면서도, 잘못된 것이다. 그의 신앙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치 오순절 교파의 체험가처럼 그는 바울과 같이 많은 영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체험을 옹호한다는 비판까지 들은 사람이다. 또한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서 13시간씩 공부만 했던 수도원의 영성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 잘못된 인본주의의 신학사상을 대적하기 위해서 용감히 맞서서 싸웠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실천하는 지성이 자신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신앙 감정론, 참된 미덕의 본질, 부흥론과 같은 명저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성찬에 대한 견해를 끝내 굽히지 않음으로써 해임까지 당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젊은이들의 신앙의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젊은이들은 경배와 찬양에 열광한다. 각종 찬양 집회와 열린 예배에는 청년 젊은이들이 들끓는다. 그리고 각종 찬양 집회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한 마디로 강단은 이제 음악과 콘서트 문화를 즐기는 대중의 선호도에 의해 지배된 듯이 보인다. 거기에는 십자가와 진리의 선포를 보기 힘들다. 그래도 믿음이 있다 하는 선교 단체의 젊은이들에게는 행동과 열정은 있으나, 차가운 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앙 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고 사고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몇이나 되는가? 반면 한국의 무수한 신학생들에게는 행동도 열정도 보기 힘들며, 다만 죽은 정통, 잠자는 지성만이 있을 뿐이다. 교회는 샤머니즘적인 주술과 성공주의 신학의 논리가 전체로 장악한 듯이 보인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과 그 본질에는 늘 신앙의 균형이라는 중요한 본질이 있다. 그는 어느 한가지에 기울어 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의 위대한 면모이다.
신앙 감정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한 마디로 ‘참된 신앙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안이다. 보통 어떤 사람을 향해 신앙이 좋다고 말할 때, 이 신앙이라는 말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참된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더 나아가,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표지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의 이 책은 부흥의 결과물로써 나타난 여러가지 영적인 현상들을 모두 싸잡아 오류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부흥이라고 옹호한다. 또한, 부흥에 함께 뒤섞여 있는 거짓된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부흥의 열광주의자들을 향하여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것을 요구하며, 사단이 이러한 거짓된 현상들의 원인으로써 분열케 하려 한다고 하였다. 신앙 감정론은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좋은 입문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에 너무나 많은 거짓된 영적 감정들이 우상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13시간
정말 하루에 에드워즈는 13시간씩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 것일까? 한국에서 가장 제대로 된 연구를 한다는 국립 연구원인 ETRI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에게서 8시간 이상씩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터넷 서핑, 전화, 회의, 워드작성을 제외) 에드워즈의 13시간에 걸친 성경 연구를 나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턱없이 부족한 말씀 연구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에드워즈가 지나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작업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상아탑의 상층부에서 몸을 사리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주일의 설교와 영혼을 향한 애틋한 심정이 늘 담기워져 있었다.
잠자는 영혼의 깨어남
우리 시대의 수 많은 설교와 비교하여 에드워즈와 당대의 설교가들이 지양한 설교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회개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단순히 증거하여 구원을 취사 선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죄인들이 양심이 자신에게 정죄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음을 이야기 했을 때의 반응은 ‘마음에 찔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이었다. 설교의 최고, 최상의 지향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이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마귀의 자식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그들의 상태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깊이 알고,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식이 없이는 십자가로 나아오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참된 설교란, 회중들이 가진 죄악과 그 형벌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평안과 안전”이라는 수면제를 회중들에게 먹이고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이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죄 중에 있다는 사실을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은 죄의 고통과 형벌을 보게 하여야 한다. 회중들이 죄 중에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설교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붙들도록 심판과 죽음의 엄중함을 보게 하자. 이것이 부흥의 시대와 에드워즈의 설교의 주요 메시지였다.
에드워즈의 영향력
에드워즈의 작품들과 서적들은 늘 부흥의 시기의 많은 설교가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탐독하는 도서 목록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베네트 타일러, 아사헬 네틀튼, 조엘 호스, 에드워드 페이슨, 에드워드 그리핀드과 같은 설교가들이 바로 그들이며, 이러한 설교가들의 특징은 죄에 대한 지적과 체험적이며 교리적인 설교를 하였다는 데에 있다. 1840년 던디에서의 놀라운 부흥과 각성을 경험한 로버트 머리 맥체인의 사역 역시 조나단 에드워즈의 열렬한 독자이자, 연구가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20세기최고의 설교가로 일컬어지는 로이드 존스 역시,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여 준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철저히 칼빈주의적이었다. 이 말은 곧, 철저히 성경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주권의 사상을 반영하였다는 뜻이다. 칼빈주의가 복음의 증거와 선교에 오히려 독약이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선교의 지평을 연 윌리엄 캐리를 파송한 영국 중부 지방의 침례교도들은 스코틀랜드에 출판된 에드워즈의 “특별한 기도를 촉진시키는 겸손한 시도”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으며, 캐리 역시 이러한 에드워즈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에드워즈로부터 알미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존 웨슬리의 경우에도 1738년 “회심 이야기”, “부흥에 괸한 고찰”, “신앙의 정서”와 같은 책들을 요약하여 출간할 정도로 에드워즈의 신앙과 삶에 큰 감명을 받았다.
위대한 그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을 이력이 된 노샘프턴 교회의 해임 사건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는지를 가르쳐 준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는 알미니안 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대한 변론을 피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붓을 집어 들었던 진리의 수호자였다. 그의 생전에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에 더욱 알미니안주의의 영향력은 미국 복음주의를 지배하는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며, 찰스 피니의 등장은 이러한 대세를 완전히 따르게 만들게 되었다. 후대의 그의 계승자라고 자칭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에드워즈는 복잡한 제 2의 사상을 창안해 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칼빈과 청교도들의 영적인 체험적인 신학의 사상 위에 자신의 독특한 신학의 체계를 구축해 나아갔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에드워즈의 시대보다 더욱 더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혼란한 시대이다. 성공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이용하게 하며, 복음은 싼 값으로 팔리고 있으며, 강단은 흥분된 음악의 선율과 콘서트로 채워지고 있다. 대중 문화의 변종과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이 판 치는 세대이다. 그러나, 부흥의 시대는 늘 언제나 진리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철저하게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는 죄인이라는 단순한 이 한가지의 명제가 우리의 영혼에 스파크처럼 임할 때 비로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열망하였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거룩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에드워즈의 전기문과 그의 글들을 읽게 되면, 희미하고 뿌옇게 가리워졌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성경의 본질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게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전기문이 한국 성도들에게 참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거룩과 성화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분명히 알게 해 주기를 기도한다. 아래의 글은 대단한 도전이 될 것이다. 1808년경에 출간된 북아메리카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8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후에 존 토드 목사에 의해 그 당시에 뉴잉글랜드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묘사한 글이다.
“내가 젊은 학생이었을 때, 남캐롤라이나의 뜨거운 논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의 신학 지식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당황케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휠씬 뛰어나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 비결은 그녀가 여러 해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들을 읽으며 살았다는 데 있었다. 얼마 후 케이프 코드 반도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늙은 집사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아주 심오하고 정교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서 신학 교수를 했어도 될 사람으로, 나는 그 앞에서 깜짝 놀라 서 있었다. 그 역시 수년 동안 일련의 에드워즈의 저작을 읽으며 성장해 왔다. 그 후에, 나는 에드워즈의 “신앙의 정서에 관하여”를 여섯 번이나 읽은 한 교구민을 만났다. 그는 신학의 거장이었다.”(P. 654)
저자 이안 머레이
청교도의 고전 작가이자 전기 작가. 1931년 영국 랭커셔 지방에서 출생하여 더람 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서 수학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했으며,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 년 동안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 1957년, 잭 쿨럼과 함께 ‘진리의 깃발사’(The Banner of Truth Trust)를 공동 설립했다.
현재는 은퇴하여 명예대표로 있으면서 에든버러에서 순회 설교자로 주님의 교회를 돕고 있으며, ‘진리의 깃발사’에서 개혁신학 및 청교도 전문서적 출판을 통해 20세기 후반 개혁신학, 청교도신학, 부흥신학의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조나단 에드워즈(18세기)>, <찰스 스펄전(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 <존 머리(20세기)> 등 교회사에 탁월한 영적 거장들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부흥과 개혁사), <부흥과 부흥주의>(부흥과 개혁사), <청교도 종말관> 등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만약 단 한 권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전기문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이 책을 당신에게 권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통하여,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문이 소개되었으나, 이 책의 저자가 이안 머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이 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답게 책의 모든 것에서 그의 20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성실함과 노력이 구석구석에 배여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은 1867년 7월 21일에 쓰여진 것이다.) 그는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 아더 핑크, 존 머레이,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그리고 이 책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신앙의 거인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또한, 그의 해박한 역사와 부흥에 대한 지식은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부흥과 바로 세우기’와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부흥과 부흥주의’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사실 지난 20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로이드 존스였고, 이러한 관심을 대중적인 출판물로 펼쳐 낸 사람이 “The Banner of Truth Trust”의 이안 머레이임을 생각해 볼 때, 진작 나왔어야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물이 이제라도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참 신앙인이요, 그리스도인으로, 2번의 대 부흥을 경험한 목회자이자, 최고의 부흥 신학자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끝없는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끝이 없다. 예일대학의 전집이 거의 대부분 출간 됨으로써 이제 그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인 활기를 띤 것 같다. 그에 대한 평가는 비단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책과는 다르게 그를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의 하나로 생각하거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선생님으로 생각했던 니고데모의 영적인 무지함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일대의 에드워즈 전집이 불신자의 그룹에서 시작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인 것 같다.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이틀이 붙어 있고, 그에 대한 세미나를 한다면 그는 엄청나게 많은 타이틀이 붙을 것이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며, 신학자, 탁월한 목회자이며 철학자, 부흥사, 선교사등이다. 책 뒷면의 국내의 유명 교수와 목회자들의 추천과 더불어 서론 부분 전에 들어가는 여러 사람들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평가는 그를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여기서 2명의 인물의 말을 들어 보자. 먼저, 20세기 최고의 설교가이자, ‘부흥’이라는 저서로 한국인에게 유명한 로이드 존스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실력 있는 신학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전도자였다. 그는 뛰어난 부흥 신학자였다. 만약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에드워즈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부흥 운동은 두 권짜리 에드워즈 전집과 같은 책들을 읽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P.20)
또한, 에드워즈와 동시대를 살았고, 함께 동역하기도 하였던 바울 이후의 최고의 전도자이며, 부흥사인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에드워즈는 믿을 수 있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다. 지금까지 모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없다.’(P.18)
이렇게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을 통하여 그의 진면목을 소개해 준다. 그러나, 전기문이라는 형식은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여 그 시대의 역사를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당대의 인물들의 생각과 사상을 읽을 수 있으며, 그들이 가졌던 영적인 고민들과 갈등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안 머레이는 단순히 에드워즈의 삶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신앙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그 접촉점을 찾아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과 인간 중심적인 신앙관을 지적해 낸다. 이것이 바로 다른 에드워즈의 전기문과 이 책의 다른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간단히 몇 가지 다루고자 한다.
조화와 균형이 필요성
신앙은 늘 균형을 가지고 있다. 참 신앙의 특징은 지나치게 머리로만 이해하는 지성주의와 거리가 멀며, 체험만을 애기하는 체험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또한, 행동만을 강요하는 율법주의적인 행동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3가지의 조화가 필요하다. 에드워즈의 신앙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이라서 이해하기가 힘들다라는 평가는 옳으면서도, 잘못된 것이다. 그의 신앙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치 오순절 교파의 체험가처럼 그는 바울과 같이 많은 영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체험을 옹호한다는 비판까지 들은 사람이다. 또한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서 13시간씩 공부만 했던 수도원의 영성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 잘못된 인본주의의 신학사상을 대적하기 위해서 용감히 맞서서 싸웠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실천하는 지성이 자신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신앙 감정론, 참된 미덕의 본질, 부흥론과 같은 명저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성찬에 대한 견해를 끝내 굽히지 않음으로써 해임까지 당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젊은이들의 신앙의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젊은이들은 경배와 찬양에 열광한다. 각종 찬양 집회와 열린 예배에는 청년 젊은이들이 들끓는다. 그리고 각종 찬양 집회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한 마디로 강단은 이제 음악과 콘서트 문화를 즐기는 대중의 선호도에 의해 지배된 듯이 보인다. 거기에는 십자가와 진리의 선포를 보기 힘들다. 그래도 믿음이 있다 하는 선교 단체의 젊은이들에게는 행동과 열정은 있으나, 차가운 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앙 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고 사고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몇이나 되는가? 반면 한국의 무수한 신학생들에게는 행동도 열정도 보기 힘들며, 다만 죽은 정통, 잠자는 지성만이 있을 뿐이다. 교회는 샤머니즘적인 주술과 성공주의 신학의 논리가 전체로 장악한 듯이 보인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과 그 본질에는 늘 신앙의 균형이라는 중요한 본질이 있다. 그는 어느 한가지에 기울어 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의 위대한 면모이다.
신앙 감정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한 마디로 ‘참된 신앙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안이다. 보통 어떤 사람을 향해 신앙이 좋다고 말할 때, 이 신앙이라는 말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참된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더 나아가,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표지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의 이 책은 부흥의 결과물로써 나타난 여러가지 영적인 현상들을 모두 싸잡아 오류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부흥이라고 옹호한다. 또한, 부흥에 함께 뒤섞여 있는 거짓된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부흥의 열광주의자들을 향하여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것을 요구하며, 사단이 이러한 거짓된 현상들의 원인으로써 분열케 하려 한다고 하였다. 신앙 감정론은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좋은 입문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에 너무나 많은 거짓된 영적 감정들이 우상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13시간
정말 하루에 에드워즈는 13시간씩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 것일까? 한국에서 가장 제대로 된 연구를 한다는 국립 연구원인 ETRI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에게서 8시간 이상씩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터넷 서핑, 전화, 회의, 워드작성을 제외) 에드워즈의 13시간에 걸친 성경 연구를 나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턱없이 부족한 말씀 연구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에드워즈가 지나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작업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상아탑의 상층부에서 몸을 사리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주일의 설교와 영혼을 향한 애틋한 심정이 늘 담기워져 있었다.
잠자는 영혼의 깨어남
우리 시대의 수 많은 설교와 비교하여 에드워즈와 당대의 설교가들이 지양한 설교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회개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단순히 증거하여 구원을 취사 선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죄인들이 양심이 자신에게 정죄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였음을 이야기 했을 때의 반응은 ‘마음에 찔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이었다. 설교의 최고, 최상의 지향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이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마귀의 자식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그들의 상태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깊이 알고,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식이 없이는 십자가로 나아오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참된 설교란, 회중들이 가진 죄악과 그 형벌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평안과 안전”이라는 수면제를 회중들에게 먹이고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이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죄 중에 있다는 사실을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은 죄의 고통과 형벌을 보게 하여야 한다. 회중들이 죄 중에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설교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붙들도록 심판과 죽음의 엄중함을 보게 하자. 이것이 부흥의 시대와 에드워즈의 설교의 주요 메시지였다.
에드워즈의 영향력
에드워즈의 작품들과 서적들은 늘 부흥의 시기의 많은 설교가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탐독하는 도서 목록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베네트 타일러, 아사헬 네틀튼, 조엘 호스, 에드워드 페이슨, 에드워드 그리핀드과 같은 설교가들이 바로 그들이며, 이러한 설교가들의 특징은 죄에 대한 지적과 체험적이며 교리적인 설교를 하였다는 데에 있다. 1840년 던디에서의 놀라운 부흥과 각성을 경험한 로버트 머리 맥체인의 사역 역시 조나단 에드워즈의 열렬한 독자이자, 연구가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20세기최고의 설교가로 일컬어지는 로이드 존스 역시,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여 준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철저히 칼빈주의적이었다. 이 말은 곧, 철저히 성경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주권의 사상을 반영하였다는 뜻이다. 칼빈주의가 복음의 증거와 선교에 오히려 독약이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선교의 지평을 연 윌리엄 캐리를 파송한 영국 중부 지방의 침례교도들은 스코틀랜드에 출판된 에드워즈의 “특별한 기도를 촉진시키는 겸손한 시도”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으며, 캐리 역시 이러한 에드워즈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에드워즈로부터 알미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존 웨슬리의 경우에도 1738년 “회심 이야기”, “부흥에 괸한 고찰”, “신앙의 정서”와 같은 책들을 요약하여 출간할 정도로 에드워즈의 신앙과 삶에 큰 감명을 받았다.
위대한 그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을 이력이 된 노샘프턴 교회의 해임 사건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는지를 가르쳐 준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는 알미니안 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대한 변론을 피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붓을 집어 들었던 진리의 수호자였다. 그의 생전에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에 더욱 알미니안주의의 영향력은 미국 복음주의를 지배하는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며, 찰스 피니의 등장은 이러한 대세를 완전히 따르게 만들게 되었다. 후대의 그의 계승자라고 자칭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에드워즈는 복잡한 제 2의 사상을 창안해 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칼빈과 청교도들의 영적인 체험적인 신학의 사상 위에 자신의 독특한 신학의 체계를 구축해 나아갔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에드워즈의 시대보다 더욱 더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혼란한 시대이다. 성공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이용하게 하며, 복음은 싼 값으로 팔리고 있으며, 강단은 흥분된 음악의 선율과 콘서트로 채워지고 있다. 대중 문화의 변종과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이 판 치는 세대이다. 그러나, 부흥의 시대는 늘 언제나 진리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철저하게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는 죄인이라는 단순한 이 한가지의 명제가 우리의 영혼에 스파크처럼 임할 때 비로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열망하였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거룩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에드워즈의 전기문과 그의 글들을 읽게 되면, 희미하고 뿌옇게 가리워졌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성경의 본질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게 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전기문이 한국 성도들에게 참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거룩과 성화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분명히 알게 해 주기를 기도한다. 아래의 글은 대단한 도전이 될 것이다. 1808년경에 출간된 북아메리카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8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후에 존 토드 목사에 의해 그 당시에 뉴잉글랜드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묘사한 글이다.
“내가 젊은 학생이었을 때, 남캐롤라이나의 뜨거운 논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의 신학 지식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당황케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휠씬 뛰어나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 비결은 그녀가 여러 해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들을 읽으며 살았다는 데 있었다. 얼마 후 케이프 코드 반도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늙은 집사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아주 심오하고 정교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서 신학 교수를 했어도 될 사람으로, 나는 그 앞에서 깜짝 놀라 서 있었다. 그 역시 수년 동안 일련의 에드워즈의 저작을 읽으며 성장해 왔다. 그 후에, 나는 에드워즈의 “신앙의 정서에 관하여”를 여섯 번이나 읽은 한 교구민을 만났다. 그는 신학의 거장이었다.”(P. 654)
저자 이안 머레이
청교도의 고전 작가이자 전기 작가. 1931년 영국 랭커셔 지방에서 출생하여 더람 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서 수학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했으며,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 년 동안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 1957년, 잭 쿨럼과 함께 ‘진리의 깃발사’(The Banner of Truth Trust)를 공동 설립했다.
현재는 은퇴하여 명예대표로 있으면서 에든버러에서 순회 설교자로 주님의 교회를 돕고 있으며, ‘진리의 깃발사’에서 개혁신학 및 청교도 전문서적 출판을 통해 20세기 후반 개혁신학, 청교도신학, 부흥신학의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조나단 에드워즈(18세기)>, <찰스 스펄전(19세기)>, <로이드 존스(20세기)>, <존 머리(20세기)> 등 교회사에 탁월한 영적 거장들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부흥과 개혁사), <부흥과 부흥주의>(부흥과 개혁사), <청교도 종말관> 등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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