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베스트서평
영적 여정으로서의 교육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파커 팔머/이종태/IVP/송광택
br>이 책의 부제는 무척 인상적이다. “영적 여정으로서의 교육”(Education Aa a Spiritual Journy). 책 앞 표지에 실린 한 줄의 리뷰도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교육에 있어서 일대 사건과 같은 책이다”(뉴욕 타임즈). 뒷표지에는 저자의 교육관이 한마디로 압축되어 있다: 가르침은 진리가 실천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과 존 웨스터호프 3세(John H. Westerhoff III)도 이 책을 추천하는 말을 남겼다. “현대적인 접근 방법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비평이…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면서 어떻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 준다”(헨리 나우웬) “본서는 오랜 세월 내가 읽은 교육에 관한 책 중 가장 영감을 주는 책이다”(존 웨스터호프 3세).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종교가 사실이 아닌 공상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잘못 취급당하고 있는 세속주의 시대에, 영성에서 새로운 인식 방법을 찾는 것은 자칫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나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진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사실과 이성을 위한답시고 진리를 폐기시켜 버렸다. 하지만 영성은 아직도 진리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매진하고 있는 분야로 남아 있다. 아마 이 책은 여전히 진리를 지적 관심사로 삼고 있는 이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책이 일상 생활 자체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흥미도 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교사는 누구인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위대한 교사는 학생, 주제 그리고 그들 자신 사이에 관계의 망을 엮어 내는 사람들”이다. 학생이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엮어 낼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 이 갈가리 찢어진 세계를 다시 엮어 낼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저자에 따르면 앎과 가르침과 배움은 단순한 학문 활동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앎과 가르침과 배움은 깊은 인간적 의미를 가진 활동, 위대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활동, 우리 자신과 이 세계의 변화에 기여하는 활동이다(11쪽).
지성의 참된 역할은,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일, 삶의 위대한 공동체를 다시 엮어 주는 일이다. 좋은 교사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학생들을 그들이 가르치는 주제와의 살아 있는 관계로 인도한다. 좋은 교사는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과, 또 서로서로 공동체를 맺도록 한다.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 사람들은 인간 지성과 첨단 과학의 발전을 경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이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술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인간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는 응용 사회과학의 힘에 대해, 유전공학의 무서운 잠재력에 대해, 무엇보다도 핵물리학의 파괴력이 점차 망각되어 가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51쪽).
저자에 의하면, 지식은 우리 영혼 안에서 기원하는 지점에서부터 이미 일정한 궤도와 목표점을 갖는다. 그러기에 일단 출발점을 떠난 다음에는 윤리에 의해 쉽사리 방향 수정이 되지 않는다(53쪽). 역사를 돌아보면 지식에는 두 가지 주된 원천이 있다. 하나는 호기심이며, 다른 하나는 지배욕이다. 전자는 지식 자체가 목적인 지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응용 과학 같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식에 해당한다. “만일 우리 앎의 주된 동기가 이러한 호기심과 지배욕이라면, 결국 우리는 우리를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지식을 낳고 말 것이다”(54쪽).
저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사랑(또는 자비)에서 기원하는 지식이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의 목표는 깨어진 자아와 세계의 재연합과 재구축이다. 이 지식이 추구하는 바는 세계의 착취와 조작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화해다. 여기서 앎의 행위는 곧 사랑의 행위이며, 타자의 실재(reality)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포옹하는 행위,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재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포용하도록 허락하는 행위다(55쪽).
저자에 따르면, 바울은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깊은 원천(사랑)을 추구하라고, 그것이 우리의 앎과 존재의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하라고 강권한다(68쪽).
영성 형성으로서의 교육
영성 훈련은 특히 수도원에서 강조되었다. 수도원은 영성 공동체의 고대 형태로서, 오늘날 학교들의 역사적 뿌리 중 하나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영성 형성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저자는 수도원 전통으로부터 세 가지 영성 훈련을 배웠다. 바로 신성한 문헌들에 대한 연구, 기도와 관상 훈련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생활이다.
저자는 ‘신성한 문헌들(sacred texts)’을 통해 그 자신보다 더 깊은 영적 통찰을 가졌던 사람들의 시대로 돌아가, 현대에 와서는 희미해진 진리들을 다시 거두어들인다. “또한 나는 기도와 관상을 향해 형성된다. 이는 우리를 전통 너머의 모든 영적 삶의 살아 있는 원천으로 데려가 주는 훈련이다.” 저자는 기도와 관상을 통해 그러한 원천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저자는 영성 공동체의 공동 생활을 통해서, 연구와 기도의 고독을 벗어나 친교와 관계의 훈련으로 인도된다. 공동체는 그의 주관적 왜곡을 막아 주는 제어 장치다. “공동체 생활은 삶 속의 사랑의 열매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고 제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71쪽).
지금의 학교가 수도원의 흔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 훈련 각각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속교육도 숨은 형태의 영성 형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서구 교육이 지금 행하고 있는 정규 훈련의 잊혀진 뿌리와 의미를 상기시킨다.
가르침 배후에 숨겨진 가르침
저자가 들었던 모든 수업은 거의 예외 없이 교사 한 사람의 활동과 권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개인적 참여는, 교사에게 강의 내용이나 읽은 책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교실은 독창적 탐구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권위자를 모방하는 자리였고, 협동의 장소가 아니라 학습자들 간의 경쟁의 장소였다”(96쪽).
저자의 교육 경험에 따르면, 너무 많은 경우 강의는 권위주의적이며, 너무 많은 경우 경청은 수동적이며, 너무 많은 경우 암기는 기계적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경우 교실의 분위기는 공동체 파괴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배운다 함은 변화와 대면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배운다 함은, 주도할 뿐 아니라 반응하고, 얻을 뿐 아니라 주기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106쪽).
저자는 대학교 교수 시절 ‘메마름의 시기’를 경험했다. 수업을 하고 공적인 연설을 하고 출판을 위해 글쓰는 것, 심지어 개인적인 글을 쓰는 것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때가 있었다. 마침내 그는 말을 말라붙게 만든 원인은 대학 환경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대학 교수직을 떠났다. 후에 그 경험이 가르치고자 한 바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말들이 떠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내가 삶 속에서 그것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받은 진리를 육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육신을 갖지 못한 말들은 생명력도 재생력도 없는 해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서 언급했던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전에 글로 썼던 공동체 비전을 직접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의 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115쪽).
진리란 무엇인가?
저자는 진리가 인격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본연의 신앙은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한 인격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관계로 초대되었다. 초대 기독교는 명제적 진리가 아닌 인격적 진리를 중심으로 삼았기에, 그 가장 심원한 통찰들은 다름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리는 인격적이며, 모든 진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격적 진리의 패러다임이자 모델이시다. 전에는 추상적이고 원리적이고 명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 돌연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모양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부르시는데, 어떤 신조나 신학이나 세계관으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로의 부르심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그분과의 공동체,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창조 세계와 창조주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와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침투(interpenetration)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22쪽).
br>
저자에 의하면, 진리는 인격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진리의 말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와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124쪽).
저자는 진리의 공동체성과 진리의 상호성을 말한다. 우리의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인격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우리 각자는 축소판 공동체이다. 우리 각자의 인격성은 수많은 자아들-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낯선 이들-의 내적 상호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만일 인격으로서 성장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생겨나는 공동체에 의식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며 오직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인격이 되어 갈 수 있다”(136쪽).
“우리는 무언가를 참으로 잘 알면 그것과 자신이 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즉, 그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의 삶 속으로 들어갔음을, 또 그것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지식은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인격적인 돌봄과 충실성의 관계다”(137쪽).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말에 따르면, “사랑 안에 있지 않고 진리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말에 다르면, “사랑 자체가 지식이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
br>
본서는 공동체, 사랑, 실천을 회복하는 교육으로 이끄는 책이다. 저자는 지식이 소외되어 버린 이 시대를 향해 교육의 영성을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교육의 위기를 지배욕과 호기심에서 시작된 지식관에서 찾는 저자는 이제 앎과 가르침과 배움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온 영성을 새롭게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궁극적인 지혜의 근원으로서 사랑을 탐구하고, 오래 전 사막의 성직자들과 그들의 수도원 등의 전통에서 영성 훈련을 찾아 소개하며 실제 수업 진행을 위한 방법론적 예시 등을 담아냈다. 메마른 이 시대에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열정을 회복해주는 위로와 자극이 되어주는 책이다.
파커 팔머는 미국 고등교육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교사의 교사(master teacher)로 불린다. 다른 저서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등이다.
br>이 책의 부제는 무척 인상적이다. “영적 여정으로서의 교육”(Education Aa a Spiritual Journy). 책 앞 표지에 실린 한 줄의 리뷰도 마음을 사로잡을 만하다.
“교육에 있어서 일대 사건과 같은 책이다”(뉴욕 타임즈). 뒷표지에는 저자의 교육관이 한마디로 압축되어 있다: 가르침은 진리가 실천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과 존 웨스터호프 3세(John H. Westerhoff III)도 이 책을 추천하는 말을 남겼다. “현대적인 접근 방법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비평이…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면서 어떻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 준다”(헨리 나우웬) “본서는 오랜 세월 내가 읽은 교육에 관한 책 중 가장 영감을 주는 책이다”(존 웨스터호프 3세).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종교가 사실이 아닌 공상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잘못 취급당하고 있는 세속주의 시대에, 영성에서 새로운 인식 방법을 찾는 것은 자칫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나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진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사실과 이성을 위한답시고 진리를 폐기시켜 버렸다. 하지만 영성은 아직도 진리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매진하고 있는 분야로 남아 있다. 아마 이 책은 여전히 진리를 지적 관심사로 삼고 있는 이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책이 일상 생활 자체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흥미도 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교사는 누구인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위대한 교사는 학생, 주제 그리고 그들 자신 사이에 관계의 망을 엮어 내는 사람들”이다. 학생이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엮어 낼 수 있도록,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 이 갈가리 찢어진 세계를 다시 엮어 낼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저자에 따르면 앎과 가르침과 배움은 단순한 학문 활동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앎과 가르침과 배움은 깊은 인간적 의미를 가진 활동, 위대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활동, 우리 자신과 이 세계의 변화에 기여하는 활동이다(11쪽).
지성의 참된 역할은, 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일, 삶의 위대한 공동체를 다시 엮어 주는 일이다. 좋은 교사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학생들을 그들이 가르치는 주제와의 살아 있는 관계로 인도한다. 좋은 교사는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과, 또 서로서로 공동체를 맺도록 한다.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 사람들은 인간 지성과 첨단 과학의 발전을 경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이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술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인간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는 응용 사회과학의 힘에 대해, 유전공학의 무서운 잠재력에 대해, 무엇보다도 핵물리학의 파괴력이 점차 망각되어 가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51쪽).
저자에 의하면, 지식은 우리 영혼 안에서 기원하는 지점에서부터 이미 일정한 궤도와 목표점을 갖는다. 그러기에 일단 출발점을 떠난 다음에는 윤리에 의해 쉽사리 방향 수정이 되지 않는다(53쪽). 역사를 돌아보면 지식에는 두 가지 주된 원천이 있다. 하나는 호기심이며, 다른 하나는 지배욕이다. 전자는 지식 자체가 목적인 지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응용 과학 같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식에 해당한다. “만일 우리 앎의 주된 동기가 이러한 호기심과 지배욕이라면, 결국 우리는 우리를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지식을 낳고 말 것이다”(54쪽).
저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사랑(또는 자비)에서 기원하는 지식이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의 목표는 깨어진 자아와 세계의 재연합과 재구축이다. 이 지식이 추구하는 바는 세계의 착취와 조작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화해다. 여기서 앎의 행위는 곧 사랑의 행위이며, 타자의 실재(reality)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포옹하는 행위,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재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포용하도록 허락하는 행위다(55쪽).
저자에 따르면, 바울은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깊은 원천(사랑)을 추구하라고, 그것이 우리의 앎과 존재의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하라고 강권한다(68쪽).
영성 형성으로서의 교육
영성 훈련은 특히 수도원에서 강조되었다. 수도원은 영성 공동체의 고대 형태로서, 오늘날 학교들의 역사적 뿌리 중 하나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영성 형성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저자는 수도원 전통으로부터 세 가지 영성 훈련을 배웠다. 바로 신성한 문헌들에 대한 연구, 기도와 관상 훈련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생활이다.
저자는 ‘신성한 문헌들(sacred texts)’을 통해 그 자신보다 더 깊은 영적 통찰을 가졌던 사람들의 시대로 돌아가, 현대에 와서는 희미해진 진리들을 다시 거두어들인다. “또한 나는 기도와 관상을 향해 형성된다. 이는 우리를 전통 너머의 모든 영적 삶의 살아 있는 원천으로 데려가 주는 훈련이다.” 저자는 기도와 관상을 통해 그러한 원천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추구한다.
그리고 저자는 영성 공동체의 공동 생활을 통해서, 연구와 기도의 고독을 벗어나 친교와 관계의 훈련으로 인도된다. 공동체는 그의 주관적 왜곡을 막아 주는 제어 장치다. “공동체 생활은 삶 속의 사랑의 열매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고 제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71쪽).
지금의 학교가 수도원의 흔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 훈련 각각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속교육도 숨은 형태의 영성 형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서구 교육이 지금 행하고 있는 정규 훈련의 잊혀진 뿌리와 의미를 상기시킨다.
가르침 배후에 숨겨진 가르침
저자가 들었던 모든 수업은 거의 예외 없이 교사 한 사람의 활동과 권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개인적 참여는, 교사에게 강의 내용이나 읽은 책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교실은 독창적 탐구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권위자를 모방하는 자리였고, 협동의 장소가 아니라 학습자들 간의 경쟁의 장소였다”(96쪽).
저자의 교육 경험에 따르면, 너무 많은 경우 강의는 권위주의적이며, 너무 많은 경우 경청은 수동적이며, 너무 많은 경우 암기는 기계적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경우 교실의 분위기는 공동체 파괴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배운다 함은 변화와 대면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배운다 함은, 주도할 뿐 아니라 반응하고, 얻을 뿐 아니라 주기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106쪽).
저자는 대학교 교수 시절 ‘메마름의 시기’를 경험했다. 수업을 하고 공적인 연설을 하고 출판을 위해 글쓰는 것, 심지어 개인적인 글을 쓰는 것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때가 있었다. 마침내 그는 말을 말라붙게 만든 원인은 대학 환경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대학 교수직을 떠났다. 후에 그 경험이 가르치고자 한 바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말들이 떠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내가 삶 속에서 그것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받은 진리를 육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육신을 갖지 못한 말들은 생명력도 재생력도 없는 해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서 언급했던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전에 글로 썼던 공동체 비전을 직접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의 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115쪽).
진리란 무엇인가?
저자는 진리가 인격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본연의 신앙은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한 인격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관계로 초대되었다. 초대 기독교는 명제적 진리가 아닌 인격적 진리를 중심으로 삼았기에, 그 가장 심원한 통찰들은 다름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리는 인격적이며, 모든 진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격적 진리의 패러다임이자 모델이시다. 전에는 추상적이고 원리적이고 명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 돌연 인간의 얼굴과 인간의 모양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부르시는데, 어떤 신조나 신학이나 세계관으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로의 부르심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그분과의 공동체,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창조 세계와 창조주의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와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침투(interpenetration)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22쪽).
br>
저자에 의하면, 진리는 인격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진리의 말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와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124쪽).
저자는 진리의 공동체성과 진리의 상호성을 말한다. 우리의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인격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우리 각자는 축소판 공동체이다. 우리 각자의 인격성은 수많은 자아들-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낯선 이들-의 내적 상호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만일 인격으로서 성장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생겨나는 공동체에 의식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인격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며 오직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인격이 되어 갈 수 있다”(136쪽).
“우리는 무언가를 참으로 잘 알면 그것과 자신이 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즉, 그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의 삶 속으로 들어갔음을, 또 그것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지식은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인격적인 돌봄과 충실성의 관계다”(137쪽).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말에 따르면, “사랑 안에 있지 않고 진리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말에 다르면, “사랑 자체가 지식이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
br>
본서는 공동체, 사랑, 실천을 회복하는 교육으로 이끄는 책이다. 저자는 지식이 소외되어 버린 이 시대를 향해 교육의 영성을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교육의 위기를 지배욕과 호기심에서 시작된 지식관에서 찾는 저자는 이제 앎과 가르침과 배움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온 영성을 새롭게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궁극적인 지혜의 근원으로서 사랑을 탐구하고, 오래 전 사막의 성직자들과 그들의 수도원 등의 전통에서 영성 훈련을 찾아 소개하며 실제 수업 진행을 위한 방법론적 예시 등을 담아냈다. 메마른 이 시대에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열정을 회복해주는 위로와 자극이 되어주는 책이다.
파커 팔머는 미국 고등교육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교사의 교사(master teacher)로 불린다. 다른 저서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등이다.
191개(3/10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