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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영적 힘
개혁주의 영성/하워드 라이스/기독교문서선교회/서중한
저자는 개혁주의 전통(특별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영성'을 바라보면서 보다 성경적이며 올바른 영성, 즉 균형 잡힌 영성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그의 말은 '영성'에 대한 시각뿐만 아니라 칼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방향도 언급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조언이 되고 있고 있다.
● 저자 하워드 라이스
캘리포니아 샌 안셀모의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교목이며, 신천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서평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칼빈의 사상이다. 소개의 글에서 모톤 켈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 신학에 있어서 교의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전에 학교 교육이나, 나의 사고 속에서 그려진 것은 딱딱한 교리와 체계 속에 제한된 칼빈의 모습이었다. 칼빈 역시 긴 시간 흘러온 기독교 영성의 흐름에 멀지 않음을 보면서, 왜 이전에는 칼빈을 차가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았을까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보다 풍요스러운 칼빈의 사상을 접하면서 개혁주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영적 힘을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개혁주의 전통(특별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영성'을 바라보면서 보다 성경적이며 올바른 영성, 즉 균형 잡힌 영성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그의 말은 '영성'에 대한 시각뿐만 아니라 칼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방향도 언급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조언이 되고 있는 듯 하다.
20세기 말 우리 현대인들은 내면의 깊은 곳을 성찰하기 꺼려하고,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세계와 나를 바라보기에 익숙치 않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 시계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우리네의 삶은 그 깊이를 아는데 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모두의 입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오르내렸다. 영성이 정체된 한국교회의 유일한 대안처럼 이야기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영성 세미나'에 앞 다투어 참석하였다.
'수련회', '세미나' 앞에도 '영성'이 단골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이 책을 대하면서 단지 기도한다고, 단지 말씀을 대한다고 그것이 영성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기도와 말씀이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판단되고, 명확하며, 설명 가능한 것이라는 현대적 사고를 목사인 내가 먼저 떨쳐 버리지 않는다면, 말씀과 삶에 대한 설명 불가능한 신비에 내가 개방되지 않는다면, 말씀과 일상의 삶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인과적인 논리와 현상에 목회 현장마저 매혹을 당하는데 나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성공병으로 시달리지 않으면서 얼마큼 가까이 다가 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저자는 우리 개혁주의라고 불리는 교단들이 전통적으로 영성에 대하여 뿌리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앞서 본인인 서술한 바대로 우리 자신의 유산 속에 영적 전통이 있음을 깨닫지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한 사이비 집회에서 영적 목마름을 잘못 해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저자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우리의 유산 속에 "하나님의 현재적 실체"를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살아있는 영적 전통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데 있다. 이것을 그는 "개혁주의 영적 전통"(24쪽)이라고 부른다. 무조건 카톨릭 교회의 잔재물이라고 여겨 거부하였던 (우리에게 속해있는 거룩한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원인을 차례대로 저자는 지적한다.
우리 모두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개성을 존중하신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종교적 경험 또한 다를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말과 같지 않다. 우리가 '영성'에 관해 말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연다는 것과 함께 다른 형제들의 경험들도 소중하게 여기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사에 깊은 영성가들은 그렇게 깊은 겸손에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개신교인들이 '영성'의 의미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영성'이란 말을 '육체'와 반대되는 그 무엇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특별히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빠지기 쉬운 이원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성'이란 '영'과 '육'을 분리하는 염세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신앙과 삶의 조화로움이다.
다양한 방법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으며, 세상을 등지지 않은 채, 그 세상 속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바라보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나의 생각과 관심을 표출하는 영적 이기주의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의 제 관계 속에서 주님의 기도처럼 '당신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사라지고, 내가 그토록 신뢰하던 세계관도 무너진다.
세상에 저항하지 않으며 (부정적 의미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질서에 감사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이지만, 한국 사회도 중산층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늘 계산적이고, 시간에 쫓기므로 분명하지 않은 곳에 위험한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빠른 걸음을 멈추거나, 느리게 만드는 것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어렵다. 어떻게 이들을 냉정한 이성에서부터 개방된 열린 심정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 내리듯이 분석적인 사고에서 해방되어 그 내용을 가슴 깊이 새기고 묵상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144쪽) 이것은 목회자로서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중세로부터 내려온 많은 영적 실천들이 개신교에 있어서 간단하게 거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의 모토에 위배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려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그런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그런 실천적인 훈련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64쪽)
언젠가 우연히 베네딕트 수도원의 일과를 본 적이 있다. 묵상과 성독과 노동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과는 참된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였다. 칼빈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금식이나 철야 등의 영적 훈련을 그 자체로 목적을 삼는다면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의 문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열릴 수 있도록 그 분이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안에서 빗장을 여는 방법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저자가 우려하듯이 어떤 공적을 세우겠다는 의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영적 실천들마저 우리가 지나친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편으로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개인적인 영성을 거부하는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인간의 죄성에 몰두하여 신앙 공동체와 개인의 영성의 상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합심 기도가 필요하듯이 개인기도가 필요하고 개인의 영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둘은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개인의 영적 경험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개인의 체험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체 모임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나누어지고, 때로는 교회 전통 속에서 그 경험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서로가 판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서중한)
저자는 개혁주의 전통(특별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영성'을 바라보면서 보다 성경적이며 올바른 영성, 즉 균형 잡힌 영성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그의 말은 '영성'에 대한 시각뿐만 아니라 칼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방향도 언급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조언이 되고 있고 있다.
● 저자 하워드 라이스
캘리포니아 샌 안셀모의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 교목이며, 신천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서평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칼빈의 사상이다. 소개의 글에서 모톤 켈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 신학에 있어서 교의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측면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전에 학교 교육이나, 나의 사고 속에서 그려진 것은 딱딱한 교리와 체계 속에 제한된 칼빈의 모습이었다. 칼빈 역시 긴 시간 흘러온 기독교 영성의 흐름에 멀지 않음을 보면서, 왜 이전에는 칼빈을 차가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았을까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보다 풍요스러운 칼빈의 사상을 접하면서 개혁주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영적 힘을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개혁주의 전통(특별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영성'을 바라보면서 보다 성경적이며 올바른 영성, 즉 균형 잡힌 영성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그의 말은 '영성'에 대한 시각뿐만 아니라 칼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방향도 언급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조언이 되고 있는 듯 하다.
20세기 말 우리 현대인들은 내면의 깊은 곳을 성찰하기 꺼려하고,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세계와 나를 바라보기에 익숙치 않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 시계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우리네의 삶은 그 깊이를 아는데 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모두의 입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오르내렸다. 영성이 정체된 한국교회의 유일한 대안처럼 이야기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영성 세미나'에 앞 다투어 참석하였다.
'수련회', '세미나' 앞에도 '영성'이 단골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이 책을 대하면서 단지 기도한다고, 단지 말씀을 대한다고 그것이 영성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기도와 말씀이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판단되고, 명확하며, 설명 가능한 것이라는 현대적 사고를 목사인 내가 먼저 떨쳐 버리지 않는다면, 말씀과 삶에 대한 설명 불가능한 신비에 내가 개방되지 않는다면, 말씀과 일상의 삶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인과적인 논리와 현상에 목회 현장마저 매혹을 당하는데 나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성공병으로 시달리지 않으면서 얼마큼 가까이 다가 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저자는 우리 개혁주의라고 불리는 교단들이 전통적으로 영성에 대하여 뿌리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앞서 본인인 서술한 바대로 우리 자신의 유산 속에 영적 전통이 있음을 깨닫지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한 사이비 집회에서 영적 목마름을 잘못 해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저자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우리의 유산 속에 "하나님의 현재적 실체"를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살아있는 영적 전통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데 있다. 이것을 그는 "개혁주의 영적 전통"(24쪽)이라고 부른다. 무조건 카톨릭 교회의 잔재물이라고 여겨 거부하였던 (우리에게 속해있는 거룩한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원인을 차례대로 저자는 지적한다.
우리 모두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개성을 존중하신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종교적 경험 또한 다를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말과 같지 않다. 우리가 '영성'에 관해 말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연다는 것과 함께 다른 형제들의 경험들도 소중하게 여기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사에 깊은 영성가들은 그렇게 깊은 겸손에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개신교인들이 '영성'의 의미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영성'이란 말을 '육체'와 반대되는 그 무엇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특별히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빠지기 쉬운 이원론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성'이란 '영'과 '육'을 분리하는 염세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신앙과 삶의 조화로움이다.
다양한 방법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으며, 세상을 등지지 않은 채, 그 세상 속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바라보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나의 생각과 관심을 표출하는 영적 이기주의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의 제 관계 속에서 주님의 기도처럼 '당신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사라지고, 내가 그토록 신뢰하던 세계관도 무너진다.
세상에 저항하지 않으며 (부정적 의미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질서에 감사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이지만, 한국 사회도 중산층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늘 계산적이고, 시간에 쫓기므로 분명하지 않은 곳에 위험한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빠른 걸음을 멈추거나, 느리게 만드는 것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어렵다. 어떻게 이들을 냉정한 이성에서부터 개방된 열린 심정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 내리듯이 분석적인 사고에서 해방되어 그 내용을 가슴 깊이 새기고 묵상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144쪽) 이것은 목회자로서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중세로부터 내려온 많은 영적 실천들이 개신교에 있어서 간단하게 거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의 모토에 위배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려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중세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그런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그런 실천적인 훈련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64쪽)
언젠가 우연히 베네딕트 수도원의 일과를 본 적이 있다. 묵상과 성독과 노동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과는 참된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였다. 칼빈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금식이나 철야 등의 영적 훈련을 그 자체로 목적을 삼는다면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의 문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열릴 수 있도록 그 분이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안에서 빗장을 여는 방법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저자가 우려하듯이 어떤 공적을 세우겠다는 의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영적 실천들마저 우리가 지나친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편으로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개인적인 영성을 거부하는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인간의 죄성에 몰두하여 신앙 공동체와 개인의 영성의 상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합심 기도가 필요하듯이 개인기도가 필요하고 개인의 영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둘은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개인의 영적 경험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개인의 체험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체 모임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나누어지고, 때로는 교회 전통 속에서 그 경험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서로가 판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서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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