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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오스 기니스, 생명의말씀사)

북뉴스 | 2016.06.27 09:26

악의 문제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또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악의 문제일 것이다. 악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일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신뢰(즉 하나님이나 인간의 근거지인 우주에 대한 신뢰)를 여지없이 뒤흔들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악의 문제만큼 다루기 어려운 주제는 없는 듯하다. 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다. 사실이 문제에 관한 전문가는 따로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탁월한 논의와 심원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해도 악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우리의 모든 논리를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손쉬운 해결책을 찾기에는 너무 난해하고개별적인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악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란 말은 아니다. 나는 지난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악의 현실을 목격했다. 물론 악에 대해 일관성 있는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일찍부터 악의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여러 상황에 처해 봤기 때문에 오랫동안 악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물론, 나치의 집단수용소와 소련의 강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옥을 방불케 했던 경험을 토대로 누구보다도 악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악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고 그 잔인함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았다.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생생하게 증언해 준 엘리 위젤도 마찬가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집단수용소의 뜨거운 불길과 가장 혹독한 악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한 인간의 용기가 손에 잡힐듯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의 부모와 조부모 역시 그와 비슷한 세상을 경험했다. 그들은 19세기말부터 마오쩌등이 등장하기까지 중국에 거주하면서 고대 왕조의 붕괴와 자칭 구원자로 나선 세력의 부패와 무능력외국 침략자들의 만행정의로운 혁명을 명분 삼은 무차별한 분노와 살인 행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제국주의의 냉혹한 잔인성의화단의 광기어린 살육 행위초창기 공산주의 혁명이 몰고 온 끔찍한 폭력 행위침략자 일본군의 잔학상두 나라가 아닌 세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위기 상황역사상 가장 살인적인 정권을 창출한 붉은 혁명의 공포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9)

나의 삶도 비슷한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전대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10살 때까지 전쟁 기근, 혁명압제의 시련을 겪었다. 그 위험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나의 두 형제가 목숨을 잃었고부모와 나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최근의 집계에 따르면당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중국인만 거의 2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모두 약탈하고,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라는 정책 아닌 정책을 내세우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잠시 동안 난징에 살았다. 그곳은 일본군이 불과 6주만에 중국인 30만 명을 살해했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난징대학살로 알려져 있다. 난징대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학살 사건이다. 난징대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몽고대학살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몽고대학살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치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한 사건으로 온 세계의 신문에 그 참상이 여실히 보도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해자들은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10)

 

이 책의 목적은 이 두 가지 문제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여러가지 곤혹스런 의문점들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인간 실존의 본질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이 두 문제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무지와 혼란으로 인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문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것이고두 번째 문제는 착한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질문들은 9.11 테러 사건뿐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범주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들이다.(15)

 

악의 문제와 현대인의 태도

 

우리 시대의 악과 고통을재고해야 할 이유 네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에 접어든 이후로 악의 규모와 범위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조간신문의 1면 기시를 읽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그 저변에 존재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면, 9.11 사건이 현대에 일어난 어두운 악의 현실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가장 극악했던 사건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오스만제국에 의해 1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 당했고1990년대에는 르완다와 수단에서 거의 3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두 사건은 20세기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 밖에도 우크라이나의 살인적인 기근아우슈비츠난징대학살미안마 철도 강제노역사건소련의 강제수용소중국의 문화혁명캄보디아 킬링필드방글라데시와 유고슬라비아의 대학살과 같은 사건들이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20세기에 발발한 각종 전쟁으로 이미 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정치적인 압제와 살인과 인종 학살에 의해 또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

 

때로 현대 사회가 이전 사회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구원하고이전보다 더 많은 회생자를 양산한다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르완다의 인종 학살은 역사상 가장 신속한 대량 학살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불과 석 달도 못 되어 후투족이 80만명이 넘는 후치족을 잔인하게 살육했던 것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이후 자행된 가장 대표적인 인종 학살 사건으로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족을 처단한 속도보다 세 배나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세계무역센터와 같은 학살이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난 셈이다. 르완다의 인종 학살은 3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히로시마 원폭투하사건 이후 가장 심각한 대량학살사건이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르완다의 인종 학살도 우리와똑같은 인간들이 저질렀다.(20-21)

 

둘째, 현대인들은 악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다.(22)

 

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들과 양식 있는 사람들은 어떤 악이 저질러지고 있는지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는 지난 세기가 남겨 준 또 하나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사건 이후 세계는 미국의 비극에 대해 아낌없는 동정과 원조를 베풀었다. 심지어 프랑스인들은 우리 모두가 미국인들이다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1994무방비 상태의 투치족이 도움을 부르짖었을 때 세계인은 그 참담한 상황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들을 도와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인종 학살을 혐오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주장하며 워싱턴 흘로코스트 박물관과 같은 기념 장소를 건축함으로써 과거의 만행을 기억하기를 원하던 현대인들이 보여 준 반응이었다.

 

문명 사회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목소리로 엄숙히 선언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들은 모두 나 몰라라하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던 것이다.(22)

 

셋째현대인들에게는 악을 규명하고 판단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9.11 테러 사건과 같은 행위는 국가안보체계의 허점은 물론 서구 사회의 지성적도덕적 무방비 상태를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악한 행위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해를 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악한 행위를 접하고서도 그것이 악인지 아닌지도 모를 뿐 아니라어떤 식의 표현을 사용해야 하고 또 공식적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논리를 펴 나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중략)

 

요즘 서구인들은 삶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동화처럼 착각하는 구시대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악을 정치화하는 데 그칠 뿐더 이상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위선과 새로운 차원의 공포와 악의 현실을 더욱 부추길 따름이다.(23)

 

철학자 시몬느 베유는 외로움도 실질적인 고통에 못지않은 고통을 안겨 준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도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고통은 희생자의 인격을 빼앗아 그를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고통은 무관심하다. 금속처럼 차가운 무관심이 영혼 깊숙한 곳까지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희생자의 영혼은 결코 다시 따뜻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 나인가?”라는 생각에는 이와같은 의미가담겨 있다, 누구도 불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생이나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세상이나 사람들로부터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라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모두가 죽는다. 하지만 왜 나인가?”라는 부르짖음은 계속 될 것이다.(114)

 

심신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는 니체가 남긴 아름다운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니체는 살아야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일도 능히 감당할 수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이 이니라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통이 아무리 극심해도 이유를 알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명백하다. 군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순교자들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물론군인들은 거짓된 영광과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국가라는 이념을 위해 종종 목숨을 잃기도 하며순교자의 경우에도 광신주의에 사로잡혀 영적 진리를 증언하기보다는 자살테러를 감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니체의 말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참이든 거짓이든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유를 앎으로써 얻어지는 도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악의 경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이유를 온통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141)

 

먼저참된 용서는 감상적인 태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마크 트웨인은 "제비꽃을 짓밟은 발꿈치에서 향기가 묻어나듯이 용서는 바로 그처럼 향기로운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용서의 결과를 아름답게 표현하면서도 용서에 수반되는 희생의 가치를 적절히 포착해내지는 못한다.

 

둘째, 참된 용서는 공리주의나 냉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항상 원수를 용서하라. 그것만큼 그를 괴톱힐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비꼬았다. 케네디 대통령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참된 용서는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 개인적인 권리나 감정적인 권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가해자를 법정에 데려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복수보다는 정의를 위한 것으로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원한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셋째, 참된 용서는 죄를 용납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너무나 끔찍한 악을 목격해 왔기 때문에 용사와 용납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용서는 악을 용납하지도 잘못을 부인하지도 않는다.(329-330)

 

 

고난 받는 자의 형제

 

우리는 옵의 이야기에서 격려가 될 만한 하나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옵은 고난 받는 자의 전형적인 표상이며. 고난 받는 자라면 누구나 동병상련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의 고난은 고난에 관한 안일한하 설명을 모두 거부한다. 욥기를 악의 문제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답변으로 간주하면 자칫 그의 이야기를 오해할 소지가 높다. 그와 같은 관점으로 욥기를 바라보면 핵심을 놓치게 될 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하찮게 변질시키기 쉽다. 욥기는 번역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소설가 허먼 워크는 욥기를 원문으로 읽으면 딱딱하면서도 이따금 일그러진 듯이 보이는 히브리 문자의 생김새를 통해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탄이 감행한 부당한 실험의 대상이 된 의로운 한 남자의 고뇌를 더욱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고 덧붙인 적이 있다.

 

욥기는 악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더 많이 알려준다. 욥기는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지만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한 감히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한 가지 명백한 교훈을 전달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자 잔인한 행위다.(376-377)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분노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짐짓 경건한 척 말했던 그들의 태도는 매우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고난 받는 자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잔인한 행위였다. 때로 악에 관한 잘못된 설명은 아무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결과를 가져은다. 그러나 고난 받는 자를 대할 때는 사랑이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확실한 지식이 없이 이유를 설명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겪어온 처절한 고통과 악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백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고 사랑하는 자녀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칭기즈칸토르케마다(스페인 종교재판소 심문관/역주)히틀러스탈린과 같은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은 둘째 치고단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악에 대해서조차 아무 설명도 할 수 없다. 악의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은 설명도 불가능하고 감당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만족하기 어렵다. 알지 못할 때는 침묵해야 한다. 그럴 때는 침묵 자체만으로 위로가 된다.(381)

 

악의 신비보다 훨씬 더 깊은 선의 신비가 과연 존재할까? 물론이다. 선은 진흙 더미에서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 다이아몬드처럼 사방이 은통 악으로 뒤덮인 상황에서 훨씬 더 밝은 광채를 발한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혼란한 현대 사회에는 모든 가치관을 뒤집어 엎고잘못된 길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선을 악으로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진리를 거짓으로 만든다. 그 결과 사람들은 흑백을 가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회색으로 인식하는 혼란을 경험한다. 선이 형식적인 경건함이나 자기 의를 내세우는 위선적인 태도로 폄하되지 않고 다시 한 번그 위력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상대주의가 뿌려놓은 악의 씨앗을 추수하기 시작할 무렵, 선이 다시금 그 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 비록 작지만 분명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416-417)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 교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인간성의 본질을 옳게 파악하고 우리의 마음과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해야한다. 아우슈비츠에서부터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이르기까지 악을 저지른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지난 세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인간의 악한 성향을 무시한 채 인간의 본성을 무조건 낙관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위대한 측면이 많지만 결코 완전무결하지는 않다. 인간은 항상 동료 인간의 선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다른 사람들을 해하려고 의도할 때가 많다. 때로 우리는 억제할 수 없는 증오를 느끼기도 하고타인을 지배하며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고 싶은 부끄러운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니체가 잔임함의 축제라고 부른 것은 동물의 세계가 아닌, 바로 인간들의 특징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의 본질일까? 무지인가, 그릇된 성장 과정인가, 부적절한 교육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정치제도인가? 포스트모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충고대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문제가 더 악화될까? 또는,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인간성의 왜곡된 성질이라고 일컬은 것에 대한 종교적인 답변을 다시 한 번 면밀히 훑어봐야할까?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두 가지 회고록 Two Memoirs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건전한 분석"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버트런드 러셀의 인생관을 "취약하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러셀은계몽주의의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빚어낸 희생자였다.(430-431)

 

솔제니친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이 모든 인간의 마음을 관통한다고 말했다. 또한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깊은 성찰을 통해,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은 가해자일 뿐 아니라 피해자이며 또한 방관자이다. 인간은 그런 세 종류의 면모를 동시에 드러낸다고 말했다.(433)

 

우리의 이웃

 

둘째, 우리는 우리 시대의 악에 대해 각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미얀마나 수단처럼 세계 도처에 악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데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온갖 특권과 편안함을 만끽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말로만 연민의 정을 표할 뿐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꽁무니를 빼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는허구적인 종말론 시나리오에나 관심을 기울이며, 세계 종말에 대한 사변을 늘어놓으며, 그저 두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족할까? 아무리 이상주의를 부르짖고 선행을 실천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의 나태한 삶을 정당화해야 할까?

 

에마뉘엘 례비나스는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며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약한 자와 정복된 자들에게는 고통만을 안겨 주고 오로지 정복자들만을 보호하는 맹목적인 세력을 정치적인 불운이나 우연의 탓으로 돌린 채 언제까지 무관심한 태도로 세상을 무의미한 고난에 귀속시킬 생각인가? 이제는 약한 자들도 마땅히 정복자의 반열에 합류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관리하는 청지기다. 우리 모두는 재능과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고 각자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변화의 주역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고난 받는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달래주고 그들을 압제하는 악에 맞서 싸워야한다. 우리는 주어진 역량 안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누구도 혼자서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절망에 부딪칠 뿐이다. 우리의 영향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사람마다 제각기 능력이 다르다 하지만 능력이 많든 적든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433-434)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또 어떤 반대에 부딪치든지 어떤 희생이 따르든지 개의치 말고 나를 통해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435)

 

셋째, 각자 악과 고통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신앙, 즉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는 신앙을 선택해야 한다(이는 세 가지 교훈 가운데 가장중요하다). 현대 사회만큼 악이 강력하고 노골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발휘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또한 악을 묘사하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인 의지를 설명하는 논리가 오늘날처럼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검증된 삶의 가능성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지성적인 편견이 오늘날처럼 강했던 적도 일찍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의 승리를 보장하는 유일한 조건은 양식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악을 바라보는 현대적인 관점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왔는지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간의 악한 성향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 문명의 발전이 계속된다면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세속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으로 다른 신앙이나 신념을 대체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은 과거의 신념이나 전통에 비해 훨씬 더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는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랫동안 외면해 온 과거의 신념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된 듯하다.(436-437)

 

항상 그러하듯이, 선택은 우리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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