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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바른신학과 바르지 않은 신학

강석천 | 2014.04.16 17:42

바른신학과 바르지 않은 신학

현재 보수신학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과거 보다 지금 걷고 있는 무게는 더욱 무겁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최후 승리를 얻은 것 같이 보수신학이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남겨 두신 ‘그루터기 신학’(사6:14)이라고 한다면 보수신학의 앞날은 희망적이다.

1.보수신학의 파노라마

보수신학이란? 내세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능력을 강조하는 초자연적 기독교신학 사상이다.

기독교 신학 사상은 계몽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진화론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신학내에서는 자유주의라는 내부의 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계 신학자들은 보수신학을 너무나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업신여기고 이따금 동네북처럼 두들겨 보기를 좋아하는 이 보수신학 즉, 초자연적인 기독교 신학 2천년 사에 주류적 존재인 것이다.

2.자유주의와의 교전

북아메리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은 두 가지 형태를 띠었으니 성경의 고등비평과 사회복음이었다. 19세기 말 유니온 신학교의 찰스 부릭스 교수가 성경의 고등비평을 수락하는 발언과 함께 성경유오사상을 보급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한편 가난한 자의 구제를 기독교의 제일가는 목적으로 주장하는 사회 복음주의가 워터 라우센부쉬라는 신학자에 의하여 제창되었다. 미국 보수신학은 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 자유주의의 도전에 즉각 응전 소위부릭스 사건의 주인공 부릭스 교수를 미국 북 장로교회는 총회재판부에 회부 재판을 받게 하였고,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직으로 부터 해임했을 뿐만 아니라 목사직 유보하였다.

라우센부쉬계열의 사회복음신학에 대하여서는 B.B 워필드와 그레샴 메천과 같은 보수신학자들의 고역의 포문이 계속 불을 뿜어서 사회복음 신학의 북아메리카 제패에 일단 제동을 걸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서 북아메리카의 보수신학은 자유주의와의 교전에서 완승은 아니라 할지라도 승리를 거둔 셈이다.

3.근본주의의 실패

1895년 미국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자유주의의 공경으로부터 초자연적 기독교와 신학을 방어, 보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온 보수주의자들의 회합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사상에게 양보하여서는 결코 안될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 다섯 가지를 선정하였다.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처녀탄생과 대속적 죽음과 부활과 그의 재림이 그것들이다. 파죽지세로 들이 닥치는 자유주의 신학의 맹공 앞에 시설에 놓은 보수의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이 보수의 마지노선은 너무 아깝게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부릭스 교수를 회부하고 1901년 총회에서 역사적 기독교의 5대교리를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장로교회 직영 신학교였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우선 그 교수진부터 좌경화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근본주의의 실패나 오늘날에 나타나고 있는 신근본주의의 고립현상이 결코 보수신학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2천년간을 꺼지지 않는 진리의 등불로서 버티어 온 보수신학, 즉 초자연적 기독교신학이 하나님만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 와서 소멸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신학인 청교도 개혁신학이 오늘날의 보수신학의 주역이요 견인차로서 계속 역사한다면 말이다.

4.신복음주의의 반란

B.B워필드와 그의 제자 그레샴 메천의 리더십 아래 발족한 위대한 근본주의 신학운동이 옛길을 가지 않고 곁길로 들어간 결과 신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라는 두 개의 잘못된 신학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성경과 과학을 조화한다고 하면서 소위 기독교진화론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협력적 전도라는 이름 아래 자유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교회들과의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였다. 성경무오에 관한 신앙도 덜 강조할 뿐더러 그것 때문에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연합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신복음주의는 그 세속적 행동성이 뚜렷하고 신학적 색깔이 분명함으로 이제는 아무도 오인할 수가 없다. 신복음주의는 보수신학 내에 일어난 자유주의에 대한 개방을 겨냥하는 일대반란이다.

5.세대주의의 환상교향악

세대주의는 19세기 말 영국의 프리머스 형제단의 리더였던 존 넬슨 다비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미국 회중교회 목사 C.I. 스코필드가 펴낸 관주성경에 의하여 발달한 신학사상이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일곱 세대를 나누고 각세대마다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리고 구원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각 세대는 그 세대의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대 파국을 모면치 못하나 마지막 세대인 ‘나라’는 승리로 큰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사상은 성경예언에 대한 문자 주의적 해석의 결과이다. 클라랜스 바스의 말과 같이 성경예언에 대한 해석을 문자적인 성취의 방향으로 끌고 감은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성경을 문자적 성취를 고집함은 강요된 해석학의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7년 휴거를 주장함으로써 세대주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미 비밀리에 휴거가 진행 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불안과 공포심에 떨게 한다. 세대주의는 교회를 천상적인 존재로 소외시킨 결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유대 주의적 환상교향악에 교회를 한 간주에 불과하게 만든다.

6.오순절 주의의 성령불꽃놀이.

사전에는 오순절교회를 정의하여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개의 것으로 강조하며 특히 방언을 고집하는 근본주의의

한 종파라고 하였다. 오순절주의 신학은 두 개의 세례론과 9종의 은사론과 즉각 성화사상으로 유명하다. 세례를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나누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일 시 한다. 성령세례는 ‘불세례’로서 오순절에서와 같이 성령충만을 가져온다. 이 성령세례, 곧 성령 충만의 첫째 표시 또는 징조로서 방언을 강조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27에 근거하여 9종의 은사(고전 12:8-11)의 체험자들의 즉각 성화를 주장 한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의 교인들이 타교파 교인들과 교역자들을 불신하며 심지어는 재선교의 대상자들로까지 여기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오순절 주의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불세례와 성령충만과 방언과 신유 등에 관련된 믿음의 체험과 능력을 강조하면서 초대교회의 기적을 20세기에 재연함을 공언하고 있는 오순절 주의 운동은 오늘날 기독교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오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신학은 아전인수적인 성경 인용을 통하여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는 신비로운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순절 주의의 성령불꽃놀이는 성령의 실재를 회의하는 자유주의신학에 대하여는 크나큰 경종이 되겠으나, 보수신학에 대하여는 산하의 세계를 복음화 하여 ‘그리스도의 세계’로 만드는 일 보다, 개인적 신앙과 은사를 경연하는 일에 치중하는 일종의 변화산신학을 보여 주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7.무교회주의의 달콤한 속삭임

무교회주의는 기독교 2천년사에 빈번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교회주의는 대개 3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교회제도를 부인하는 무교회주의가 있고, 둘째로는 교회개조를 목적하는 무교회주의가 있으며, 셋째로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무교회주의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무교회주의자들은 셋째 종류의 무교회주의에 가담하는 듯하다.

어떤 종류나 형태의 무교회주의든지 그것은 비성경적이므로 잘못된 사상이다. 성경은 압도적으로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보수신학은 무교회주의의 달콤한 속삭임과 싸워야 할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조직신학은 조직교회를 통하여서만 보존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8.경건주의의 오솔길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또는 사상중의 한 흐름이다. 경건주의의 ‘선두주자’로서 그 당시 독일 크리스천들의 은혜체험을 등한시함을 나무랐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회개와 성화의 삶’ 을 강조하였으며 아른트를 뒤이어서 독일경건주의의 창시자인 스패너가 등장. 기독교 신앙의 ‘사회정의적 책임’ 을 망각하고 개인적인 경건에만 몰두하면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현실에 참여의식을 잊어 버리고 있다는 것이 큰 결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떠나서 성령의 단독사역을 강조한 결과로서 ‘이성주의’ 탄생을 가져왔고 드디어 ‘범신론적 낭만주의’와 ‘독일자유주의’ 의 출현가져왔다. ‘경건주의’는 기독교신학과 신앙을 위한 ‘산책의 오솔길’이다.

9.신비주의의 골방과 산골짝

‘신비주의’ 는 그것이 ‘온전한 신비주의’ 이든지 ‘과격한 신비주의’ 이든지 불문하고 기독교인의 영성과 ‘거룩한 삶’ 을 달성하는 일을 기도의 골방이나 깊은 산골짝에서 아니면 황량한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묵시를 받고 환상을 보는 가운데 추진하려 한다. 결국은 사람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의존하는 ‘공로적인 구원관’ 이라는 사실을 고려 할 때 우리는 ‘신비주의’ 가 우리가 우리 기독교성경이 가르치는바 ‘이신득의’ 의 구원론과 정면으로 배치됨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비판하고 경계해야 할것이다.

10.교회성장주의의 퍼레이드

교회성장주의는 두 가지 흐름을 갖고 있다. 첫째 교회성장에 대한 선교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상이다. 둘째 대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교회 성장에 대한 목회 성공사례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상이다. 두 계통 모두 교회성장을 우선적으로 교회의 수적인 증가로 보고서 복음 전파의 목적을 교회의 다수화에 두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교회의 수적인 증가와 교세의 확장에만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성장으로 교회를 유도하는 교회성장신학의 수립에 열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11.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하의 절대 의존적 정서의 신학

근대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의 ‘분수령’ 과 같았고 ‘이정표와 같은 신학자’ 였다. 그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사상에 의거하여 사람이 갖고 있는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정서’가 ‘신학’ 과 '종교' 에 미치는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그것을 ‘실천적 종교’ 또는 ‘경험적 종교’ 라고 하는 것의 ‘매커니즘’ 으로 삼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12.신국건설을 표방하는 알버트 릿츨의 윤리주의 신학

릿출은 슐라이어마허의 인간의 ‘신 의존적 정서’ 를 강조하는 종교관에 동의를 하였으나 기독교인의 종교적 정서나 의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재임을 갈파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인 실현국면에 사람들이 사명감을 갖고서 참여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13.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대중화한 알버트 하르낙의 신학

하르낙은 릿츨로부터 ‘형이상학적 신학’ 에 대한 불만을 배웠고 복음과 기독교의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적 관심을 터득하였다. 그의저서 『기독교는 무엇인가?』에서 말한바 ‘그리스도가 전파한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고 아들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발언 내용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것은 ‘신의 연합’의 어떤 형이상학적 교리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가 복음 바깥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의식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그의 지식 때문이었다. ‘릿출주의’ 신학을 기독교 안과 밖에서 ‘대중화’ 하는 작업에 성공한 신학자가 바로 하르낙이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14.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기독교 사상

키에르케고르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을 배웠으나 그의 관심은 철학과 문학에 있었다. 그의 저술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변증법’ 을 말하였다. 사람이 ‘절망’ 을 맛보지 않고서는 그가 살아있다는 의식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삶’ 이란 ‘죽음을 앓는 병’ 이며 ‘번뇌’ 와 ‘절망’ 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존적인 결단’ 을 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키에로케고르의 기독교사상은 극단적인 비합리주의는 아니었다. 오늘날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르트와 에밀부루너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초기 저술들의 냉용을 실이 바늘을 통과하듯이 잘 꿰뚫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15.디트리히 본훼퍼의 현세중심적인 거룩한 세속의 삶의 신학

본훼퍼의 신학전체를 꿰뚫는 주제는 ‘기독론’ 이요. 그리스도였다. 본훼퍼의 신학적 생애 초기에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현존’ 이 강조되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본훼퍼의 ‘그리스도를 좇아서 세상으로 되돌아가서’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면서 ‘거룩한 세속의 삶’ 을 살라고 하는 외침에 감동을 받는다. ‘거룩한 세속’ 을 찬양하는 본훼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구원’ 을 사회적인 구원에 제한하며, 내세의 존재와 인간의 영혼의 사후 거처를 불신하는 현세 도취적이고 ‘불경건한’ 반초자연주의 신학이다.

16.샤르댕의 과학적이고 환성적인 진화의 신학

일반적으로 ‘진화의 신학’ 이라고 불리 우는 샤르댕의 신학은 그가 주장하는바 ‘우주진화’ 만큼이나 스케일이 크고, 생명이 존재하는 지구와 우주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유물론’ 같기도하고 ‘범신론’ 같기도 하며 우리의 ‘기독교 유신론 사상’ 과는 정확히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알기가 어려운 매우 비약적이고 어쩌면 ‘환상적’ 인 신학이다.

17. 칼 바르트의신정통주의의 고고성

칼바르트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존재로서 인류의 지식과 논리를 초월하는 절대주권자이심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유형의 자유주의에 대한 견제와 각성제로써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독론이 변증법적이고 철학적인 이론위주의 그리스도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독론을 중심하는 그의 신학 전체가 때로는 범신론적이며, 때로는 만인 구원론적인 경향을 나타냄으로써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신학에서 멀리 떠나버렸음을 크게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그 과오를 지탄해야 할 것이다.

18.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의 말로

틸리히는 헤겔주의의 영향하에서 살며 사색하다가 가버린, 19세기적 낭만주의를 끝내 버리지 못한 종교철학자로 평가 받는 경우가 많다. 게네트 하빌톤 교수는 틸리히가 사신신학자 알티저 같은 인물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다고 하여 ‘사신신학의 모세’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틸리히는 무엇보다도 그의 ‘종합신학’의 일환으로서 기독교 유일 종교사상의 포기와 종교계에 계속하여 계시 진리의 서책인 성경과는 상관없이 철학에서 시작하여 철학에서 끝마쳐 버린‘철학적 신학자’ 였다.

19.라힌홀드 니버의 비기독교적 현실주의

니버는 강의실과 연구실에서만 신학을 하는 통상적 개념의 신학자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등 삶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신학을 하는 신학자였다. 특히 그의 ‘기독교 현실주의’ 사상은 정치와 윤리 분야에서 ‘국가신성론’과 ‘무정부주의’ 극단적 대결을 극복하면서, 또는 ‘준법주의’ 와 ‘도덕무용론’의 두 극단론을 견제하면서 죄악의 현실 가운데서 사랑을 전제하는 정의구현을 향하여 힘쓸 것을 부르짖었음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니버는 상업사회와 현대문명의 제 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키에르케골의 지혜’를 좇아 해결하려고 하였음이 그의 큰 실책이자 과오가 된다.

20.루돌프 불트만의 성경을 도마 위에 놓는 신학

루돌프 불트만은 현대인에 대한 선교적 동기를 앞세우기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비신화화’ 하고 ‘실존주의’라는 철학종교로 만들어버린 신학자이다. 불트만의 아이러니는 실존주의적인 해석으로 기독교를 20세기 후반기의 탈기독교 문명의 탄생과 기독교 신학의 ‘세속화’로 말미암는 ‘후기 기독교 시대’의 도래에 기여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21.세속화신학의 대공세

20세기 초에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으나, 그 뒤에 나타난 독일인 본훼퍼는 하나님은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세속화 신학은 그 전기 현상으로는 ‘하나님은 죽었다’ 파가 있고 후기 현상으로서 ‘하나님은 세상에 안 계시므로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한다’파가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사망을 선언하고 무신론적 인간의 진화, 곧 신화를 말하나, 후자는 무신론적 전제하의 사회혁명론이다. 이렇게 무신론적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세속화신학의 대공세 앞에서 보수신학은 너무도 지킬 것이 많다. 보수신학은 현금 세속화신학의 대공세 앞에서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 그리고 진리 그 자체를 지켜야 하지만 지키는 일에만 급급하여 보수신학 자체의 발전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 보수신학의 개혁주의적 발전과 완성을 위하여 분발해야 할 것이다.

22.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이 없는 희망의 신학

‘희망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역사와 미래를 강조하고 있음으로 ‘보수 색깔이 짙은 신학’으로 보이기 쉬우나, 그 사상 내용에 있어서는 보수성을 다 벗어버리고 금욕주의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정치신학’이라고 함이 옳다. ‘희망의 신학’ 은 특히 그 후기사상에서 선교를 정치 신학적으로 인식하며, ‘교회의 정치기구화’를 주장하고, ‘인류의 사회적 경제적 구원’을 유일한 구원론으로 부르짖음으로써, 내세와 초자연의 지평을 완전히 잃어버린 후 하나님 없이 인간만이 하는 ‘과격한 정치신학’ 또는 ‘혁명신학’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3.해방신학의 마르크스주의자 선전

해방신학은 신이론이 아니라 신실천이라고 한다. 이 신실천을 위하여 중남미 해방신학은 인민들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의 현황을 분석, 평가하고 그 해결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유물사관적 무신론인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한다면 기독교 신학의 유신론적인 유일신관은 이미 무너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결과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해방신학자의 모습을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볼 때 정말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놀랍게도 혁명실천이요, 마르크스주의자 선전인 해방신학을 방콕대회(1975)에 정식 인준. 두호.정신.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24.민중신학의 한 타령

보수신학은 한국의 민중신학이 민중의 고난을 ‘땅의 빵’만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상념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와 비평을 제기한다. 땅의 빵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빵이 정말로 민중신학의 메시지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빵이 바로 꼬방동네의 가난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꼬방동네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영적 가난을 치료하는 영생의 빵임을 또한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25.타종교와의 대화신학의 추진

한국에서의 보수신학은 변선환과 같은 신학자에 의한 타종교와의 대화신학의 계속적인 추진에 큰 놀라움과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신학의 탈성경, 탈기독교를 의미하며, “한국신학의 불교화‘라는 매우 심각한 국면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26.풍류신학과 삼박자 구원신학의 황홀경

풍류신학은 한국인의 문화사상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연은혜에 도취하여 황홀경을 걷는 신학이라고 한다면, 삼박자 구원신학의 조용기 목사는 천막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된 성령을 강조하는 어떤 한국 개교회의 성장사적 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도취하여 황홀경을 걷고 있는 신학이다.

27.사람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뉴에이지 사상

뉴에이지는 ‘내 안에 있는 신’에게 의존하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에 의존함은 곧 자아숭배라고 하는 고대 이방종교 사상의 부활이라는 사실이다. 자아 숭배 사상인 고로 교리와 신조를 그때그때 만들어 갈 수 있다. 사상의 통일성도 없고 언제나 미래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뉴에이지 사상의 자리는 범신론이라는 것이다.

28.포스터모더니즘의 사상적 소용돌이

포스터모더니즘이 과학주의적 현실주의를 유일정당한 세계관으로 고집하는 모더니즘의 우월주의를 비판하면서, 또 포스터모더니즘의 총체주의적으로 재구성된 세계관까지도 하나의 가설임을 자인하면서, 회의주의와 다원주의적 시각들까지 허용하면서 포스터모더니즘적 세계관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9.새벽기도의 신학의 슬럼프

“새벽기도 신학”은 한국신학의 주체성 확립을, 상기한바 새 신학처럼 신학의 “한국적 토착화”를 무리하게 시도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서, 역사적 기독교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또는 교회성장학적 접근으로 또는 교회성장학적 관점에서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청교도 개혁신학의 바른 길

우리는 예레미야 18:15-17을 생각하고 디모데후서 3:14을 늘 생각하면서 20세기 현대신학의 혼란한 사조들 속에서 “인본주의적 자유주의”나 “기도원족 은사주의”의 “곁길”을 멀리하고 우리 교회의 믿음의 조상들이 걷던 “옛적의 길”이 “선한 길”임을 알아 열심히 이 길을 걸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닦아진 길” 이 바로 “청교도 개혁신학의 길”임을 알아 이 길로 꾸준히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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