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요약본

회심, 하나님께로 돌아서다

김재윤 | 2004.02.13 09:36
폴 헬름 지음, 회심,하나님께로 돌아섬, SFC

이 책은 칼빈주의 전문가인 폴 헬름 교수에 의해 쓰여진 회심에 대한 지침서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회심에 대한 영적, 신학적 틀을 세우려는 시도에 있어 다음 세 가지 가정을 전제한다. 첫째, 기독교의 회심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다. 둘째, 회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셋째, 회심의 역사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두 가지 다 성령께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기독교의 회심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 즉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교회도 안일한 목표를 가지고 회심이 교세를 확장시킬 수 있다든지, 교회의 평판이나 영향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면, 교회는 숫자를 늘리는 것 자체에만 급급하게 된다.
왜 교회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초청에 신실해야 하는가?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형성하시기 위해 갖고 계신 계획을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대답이다. 단순히 교회의 기구를 확장하거나 사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가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를 섬기도록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다.
이전에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중생, 회심 이런 문제들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또 강조했지만, 요즘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명확한 의미와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사용하던, '중생', '회심' 그리고 '효과적인 부르심' 같은 말들을 요즘에는 '예수님을 당신의 인생에 모십시오', '예수님을 당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십시오' 같은 말로 바꾸어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해 가고 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증거를 사람들 속에 있는 불경건성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명령과 뜻을 교묘하게 회피하려고 하는 것,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행위들, 사회적 혼란과 부정직한 양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최악의 사회라해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문화와 교육으로 인해 그 악들이 누그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사이에 놓여진 단절 그 자체가 하나의 죽음이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됨, 신뢰의 상실, 무관심이나 적대감의 상태이다.
그래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교회라면 사람들에게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십시오',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마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애쓰십시오',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힘쓰십시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가적인 정보나 윤리적인 동기를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더불어서 사랑과 신뢰와 복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다 더 낫게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분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진다.
기독교의 회심은 마약이나 귀를 찢는 록 음악, 혹은 전원을 산보하면서 얻게 되는 명상 같은 류의 '종교적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회심은 영적이고 신학적인 틀 안에서 이해할 때에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직업을 잃는다는 두려움은 차 열쇠를 잃는다는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그 두려움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심할 때 일어나는 죄의 확신에 대한 모든 언급들은 '율법주의'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 먼저 기독교의 회심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회심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뜻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다가 중생케 하시는 은혜의 선물을 하나님이 주시기까지는 영혼은 수동적이라는 의미이다. 신약성경은 단호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회심에 대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다. 회심은 창조이다. 이 구절에서 회심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또한 회심은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죽은 영혼이 생명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먼저 새로운 출생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니고데모와 그리스도께서 나눈 유명한 대담에서 새로운 출생을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신약 성경은 새로운 출생이 하나님의 말씀, 주의 말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회심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매개체가 계시된 진리요, 복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마술처럼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되어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거나 폄하된다. 성령이 없이는 사람의 말 이상의 권위가 없다. 또한 그 메시지와 영향력이 전해지지 않고, 관련성도 충분히 평가되지 않는다.
회심의 역사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이 결합되는 방식은 신약성경의 부르심에 대한 가르침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신자들은 은혜로 부르심을 입는다. 어떤 사람을 부른다는 것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으로 말을 통해서 부름을 받는다. 게다가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부르심이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보이게 될 때에 효력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복음이 강단에서 설교될 때처럼 차별없이 부르는 외적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 안에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효력이 발생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 부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역사하시는 데에는 영혼의 여러 능력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생명을 주고 깨어나서 활동하도록 하신다. 믿음과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죄인 속에서 형성되어지는, 죄인의 결정에 달려 있다.
성경에는 특별히 선택된 어떤 집단에게만 열려진 어떤 '숨겨진' 의미는 없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성경 속에 공개되어 있는 공적이고 자연적인 의미이다.
회심은 '이성적'이다. 왜냐하면 마음과 이성의 활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회심의 역사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둘 다 성령께서 사용하신다. 도덕적 파산은 율법, 곧 하나님의 기준에 빛을 비추어 볼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분과의 적절한 도덕적 관계를 통해서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관계란 감사가 넘치는 가운데 하게 되는 복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도덕적인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현재의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관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감정이나 이성과 같은 것으로나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계시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율법의 빛에 비추어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율법이며,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것이며, 외부적인 행동에 대한 것만 아니라 우리의 숨겨진 동기와 의도에까지 관계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서 평가해 보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을 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이거나 우리가 따라야 할 자기 희생의 상징 또는 도덕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곤궁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행동이며, 율법을 깨뜨린 사람들을 위한 치료책이자 당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다른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의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 모든 시도들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서, 그분의 생명과 기업을 함께 나누게 될 때 이런 치료법으로부터 의식적으로 혜택을 누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를 선포하는 곳마다 분열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어리석고 무가치한 것이라 거절하고, 심지어는 놀리고 멸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은 복음에 호감을 갖기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Ⅱ. 참된 죄의 확신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한다. 회심이란 영적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적 생명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는지는 그 생명을 받는 본인이라고 해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식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 가면서 그것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되고 믿음과 정서 그리고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 '분명한 구조를 가진 체험'을 하게 된다.
특별한 회심을 체험할 때 그 순서, 강도, 지속의 정도는 회심이 일어나는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다. 하지만 그 체험의 요소들은 동일하다.
19세기 말의 영국국교회 지도자였던 라일(J. C. Ryle)은 그의 책 『자화상』(A Self-portrait)이라는 조그만 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성품에 전적인 변화를 불러왔던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한 가지를 언급하자면, 내게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아주 점진적이었다. 특별히 어떤 한 사람, 어떤 사건 하나를 들어 그것 때문에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여러 사건들이 연결되어서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지금 내가 믿기로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다. 그 당시에는 내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삭개오의 경험은 다소 사람 바울의 경우와 다르다. 또한 루디아의 체험은 나다나엘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회심이란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변화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 곧 창조자가 되시고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변화이다. 이 관계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관계이자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즉 하나님에 대한 의무 관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반항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을 도덕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반항한다고 해서 사람이 동물로 변해 버린다거나 기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바와 같이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에 대하여 희미하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항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분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본인은 그 적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 가지 위장된 모양으로 선하신 그분을 향하여 적의를 드러낸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그분의 법에 대해서는 적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여전히 도덕적 존재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면서도 동물이나 기계로 전락해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하는 것을 볼 때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불편한 양심을 가지게 되고, 다른 어떤 일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양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나 동일하게 어떤 일은 도덕적으로 악하다 하고, 다른 일들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회심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들이 하는 어떤 일이나 하기를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그런 일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옳은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이런 부패한 행동이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신다. 성령님께서는 그런 행동에까지 이르게 한 자신들의 깊은 내적 욕구와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죄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참된 죄책과 죄의식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번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는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정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착복 행위를 회개하기 위해서 구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근에 그렇게 회개했을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서 다른 어느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건만 예수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눈에 삭개오는 잃어버렸던 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였다는 증거는 그가 자신의 불의와 탐욕을 청산하고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한 것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구원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삭개오가 자신의 죄를 확신했다는 사실을 그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회개가 참되다는 것은 이런 죄책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그것을 변명해서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그래서 죄의 확신은 회심의 과정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단계이든지 아니면 다른 요소들과 구분하기 곤란한 복잡한 어떤 체험의 한 요소이든지 간에, 어쨌든 회심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사랑이란 결코 율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율법을 표현하고 또한 율법에 의해서 표현된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적인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깊은 내면의 상태에까지 나아간가는 것이다.
참된 회심에는 단지 죄에 대한 개인적인 각성뿐만이 아니라 올바른 이유로 말미암는 죄의 확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죄의 확신은 모두 임시적일 뿐이고 참된 회심에는 이르지 못하게 된다. 참된 죄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직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참된 죄의 자각은 어떤 죄가 하나님의 시선에 잘못인가 하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미워하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앞으로 그 죄를 절대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동반해야 한다.
참된 죄의 확신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변화된 믿음과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각성뿐만 아니라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범죄의 본질에 대한 변화된 판단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들을 때 죄의 고백이 없는 죄의 확신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복음의 사역자가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면서 직면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은 회중 가운데 그가 선포하는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그 복음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진실되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 안에 영적인 활동이 실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신약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 사람이 이미 회심을 체험했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회심한 사람인가 하는 데 있다. 그 사람이 '회심'했다고 고백하면서도 현재의 영적 생명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 고백은 거짓이다.

Ⅲ. 참된 회개
죄를 확신하게 되는 것, 그 자체가 회심이다. 중요한 것은 참된 회심에서는 관심의 표현, 필요를 보여 주는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라는 말이 성경에서 무슨 뜻을 가졌을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피해야 할 두 가지 위험이 있다. 먼저 회개가 감정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회개란 말이 슬픔이나 후회의 감정, 혹은 가책과 같은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전적으로 정서적인 용어이기는 하다. 하지만 슬퍼한다거나 후회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탄식할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을 어떤 상황 때문에 하지 못했다고 슬퍼할 수도 있지만, 회개한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종교적이거나 복음 전도의 결과로 사람들 마음 속에 단순히 슬퍼하는 마음을 넣어 준다고 해서 회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죄된 태도와 행동에 뿌리는 둔 옛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합당하게 또는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가장 뻔뻔스러운 위선자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생활을 고집하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회심하였다면 이전에 선호했던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물론 평생토록 추구해야 될 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절과 변화가 회심시에 이루어지며, 바로 그 때 옛 생활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갱신된 교제의 기초를 형성한다.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것과 동반되는 경건한 슬픔에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하나는 어떤 상실이나 실패로 인해 생겨나서 결국 영적인 일에 대해서 오히려 고집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슬픔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나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발생된 일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야기된 어떤 일들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후회가 있다.
회개는 '회심한다'(전환한다)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의 한 부분이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법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갖게 된다. 그 믿음으로 자신들의 죄악들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게 되고, 그 죄성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회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이 이런 의미에 있어서 회개가 아닐 때가 많다. 자신들의 도덕적인 낭패 때문에 슬퍼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참된 슬픔이나 참된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법에 관하여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회심한 사람이 겪게 되는 참회의 품질 보증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회심의 주제를 자우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오늘날의 현실에 있어서는 가장 소외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회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지만, 회심에 대한 영적이고도 신학적인 틀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회심의 분명한 경험이나 단계들, 회심 기간 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회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그 안에서 이런 경험들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회심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0개(4/5페이지)
독자요약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0 기질학습과 영적성숙 이종수 2004.05.20 14:47
29 초대 언더우드선교사의 생애, 연세출판부,1991 강석천 2004.04.16 17:53
28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김재윤 2004.04.11 22:32
27 회심을 위한 불같은 외침 김재윤 2004.04.01 17:29
26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김재윤 2004.03.12 10:13
25 천지 창조의 목적 김재윤 2004.02.26 17:24
>> 회심, 하나님께로 돌아서다 김재윤 2004.02.13 09:36
23 마틴 로이드 죤스의 크리스마스 메세지 김재윤 2003.12.29 09:13
22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김재윤 2003.12.18 17:13
21 부흥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채천석 지음/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강석천 2003.12.17 15:27
20 칼빈의 여성관 김재윤 2003.12.15 20:17
19 리챠드 백스터의 회심 김재윤 2003.12.05 13:37
18 죠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김재윤 2003.11.28 11:38
17 존 오웬의 죄와 유혹 김재윤 2003.11.20 18:05
16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토마스두리틀/기독교문사 김재윤 2003.11.14 11:06
15 토마스 왓슨의 경건을 열망하라 김재윤 2003.11.06 21:28
14 시험당하신 그리스도 김재윤 2003.10.30 16:19
13 청교도 사상 김재윤 2003.10.30 16:12
12 진돗개전도왕/박병선/생명의말씀사 황성구 2003.10.29 22:00
11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김광훈 2003.09.24 12:4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