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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김재윤 | 2003.12.18 17:13
양낙흥 지음,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부흥과 개혁사

이 책은 한국인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에드워즈의 생애와 그의 신학 사상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일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Ⅰ.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열두 가지 표지들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감동된 모든 사람이 참 은혜를 받았거나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체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정서들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단지 종교적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누가 강한 종교적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 자체만 가지고 그것이 진짜라거나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가 대단히 크고 아주 높이 고양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것이라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는 못 된다.
단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도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주려 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회고한다(갈 4:15).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감사의 감정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얼마 후 바울은 그들을 위한 그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염려를 표한다(갈 4:1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현현을 보았을 때도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 불과 얼마 후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즐거워하지 않았는가?

2.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반증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부흥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집회 중에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자기들의 은혜 받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인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한편, 당시의 반부흥주의자들 중에는 부흥회 중에 그러한 희귀한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부흥이 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역사라고 매도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집회 중에 육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도 참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백 년 전의 인물이지만 에드워즈의 통찰은 선구적이다.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지적한다. 인간의 감정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는 심지어 "영혼과 육체의 연합의 법칙"이라는 개념까지 사용한다. 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감정이 크면 클수록 신체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더 커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못 박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향은 종종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세상적인 일로 인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다른 일반적 감정들처럼 고조될 때 그것들도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자명하다.

3. 누가 종교적인 일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많이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서가 참 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이 종교적인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 거룩하지 않은 종교적 정서가 충만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4.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정서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정서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당시 어떤 이들은 자기가 어떤 애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모종의 종교적 정서가 내면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참된 은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단지 어떤 정서가 저절로 일어났다고 해서 그가 참 은혜를 받았다는 확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서, 인간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고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 존재하다면(이 사실은 당시의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그것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한편, 감정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꼭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라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일부러 일으킨 감정이 아니라고 모두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인상이 자가 발전의 결과도 아니고 악령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나 참된 종교적 정서가 아닌 거짓 것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영향의 결과다.

5.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즉, 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런 식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성경 본문에 의해 그러한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감정의 기초가 성경 그 자체거나 그렇게 떠오른 성경이 포함하고 가르치는 진리라면 말이다.

6. 종교적 정서 안에 사랑의 외양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로 모조품이 더 많다. 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강하고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저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7. 여러 종류의 종교적 정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 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왕, 아합 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도 마찬가지다.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그러했고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 받은 후에 보인 반응이 그러한 경우였다.

8.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감지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을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쁨과 위로가 커다른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볼 때는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도 그것이 있을 때 흔히 수반되는 감정들과 유사한 체험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9.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회심의 증거는 아니다.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예배의 외적 의무들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참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종교의 외적 활동들"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은혜의 확실한 표지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향은 은혜가 전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

10. 입에 "할렐루야", "아멘"을 달고 다니는 것이 참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는 종교적 정서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울을 그러한 예로 제시한다. 사울은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윗의 전례 없는 자비를 높이면서 외쳤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삼상 26:21).

11.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정서가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못 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에드워즈는 위선적 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중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위선자들은 자기의 영적 소경 상태, 자기 마음의 거짓됨, 자기의 낮은 이해력에 대한 인식이 없다. 셋째, 마귀는 위선자들의 소망은 건드리지 않는다. 넷째, 거짓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기 부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12.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정서를 소유할 수 있다.

Ⅱ.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지들

에드워즈에게 있어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있다는 말은 곧 그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그가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를 가졌다는 말은 그에게 회심의 은혜가 임한 적이 없다는 말이요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누군가가 참 성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들 중 하나가 이 참된 종교적 정서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그에게 있어 사활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다.

1. 은혜롭고 신령한 감정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진 영적, 초자연적, 신 영향과 작용, 즉 성령의 영향이야말로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의 원천이라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신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목적은 그들 속에 새로운 신적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다. 모든 참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그들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면서 그들 마음에 영향을 준다.
에드워즈는 은혜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은혜로운 정서들의 최초의 객관적 근거는 신적 일들의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이다.
에드워즈는 "마음의 미각"이 바뀌어 하나님의 성품 속에 있는 아름다움, 영광, 지고선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끌리고 하나님께 끌리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참된 회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주로 무엇에 대해 많이 말하는가에 의해 성도와 위선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참된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근거한다. 혹은 하나님의 일들을 그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최초의 시작이요 원천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거룩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오는 세 번째 근거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하나님의 일들-복음, 혹은 구원의 역사, 혹은 하나님의 계시-이 있어야 한다. 둘째, 그것들의 도덕적 탁월성이다. 에드워즈는 도덕적 탁월성을 중시한다. 셋째, 그 도덕적 탁월성이 가진 사랑스러움, 혹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 성령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

4. 참된 종교적 정서의 네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는 어떤 종류의 "앎"을 제시한다. 즉, "신령한 지식"으로부터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정서의 표지라기보다는 그것의 근원, 혹은 전제 조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첫 번째 표지부터 네 번재 표지에서 사실상 참 종교적 정서의 표지라기보다 그 원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천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천이 있으면 결과는 자연히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은혜로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거룩한 정서는 "빛 없는 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보, 어떤 영적 가르침에서 생겨난다. 말하자면, "빛"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5.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의 다섯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확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은혜로운 정서의 표지들 중 하나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이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지 기독교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에서 우러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확신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그것이 "이성적 확신"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 증거"와 "확신의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영적 확신이어야 한다. 자연인들도 가끔 기독교 진리에 대해 일종의 동의를 표현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합리적 논증이나 증거들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가룟 유다는 그가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예수가 메시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의 일들에 대한 영적 신념 내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영적 확신은 "중생한 자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 내주하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즉, 복음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확신은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온다고 그는 믿는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고 그것들 위에 높이 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의 신성한 "아름다움"에 의해서이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다른 아름다움들과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 속에는 "하나님 같고 숭고하며 영광스러운 탁월성"이 있어 인간적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신성을 확신하고 만족하게 된다.

6. 은혜로운 정서의 여섯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는 겸손이라는 성품적 자질을 제시한다. 에드워즈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에드워즈는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7.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성품의 변화, 즉 인격적 성화를 크게 중시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 같은 초자연적 선물보다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보았다. 만일 그러한 인격적 변화가 없다면, 은사나 능력이나 그가 보기에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은 곧 성화를 낳는다고 보았다. 성화되지 않는 회심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8.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여덟 번째 표지는 일곱 번째 표지의 상술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기독교적 정서는 "어린양 같고 비둘기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기질"을 동반한다. 참 은혜로운 정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었던 것과 같은 사랑, 온유, 조용함, 용서, 자비의 영을 자연스럽게 낳고 증진시킨다." 에드워즈는 이것들을 "그리스도인 마음의 참되고 구별되는 성향들" 즉 "기독교적 영"이라 부른다.

9. 은혜로운 정서의 아홉 번째 요소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은 "부드러운 마음"이다. "종교적 정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영혼의 부드러움을 동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마음의 부드러움"이란 온유한 성품이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마음이다. 즉, 예민한 죄의식과 민감한 양심이 에드워즈가 말하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가짜 종교적 정서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해 마음의 감각이 무디며 미래의 죄에 대해 덜 꼼꼼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들과 그의 섭리에 의한 징계에 대해 무덤덤하며, 자기들의 영적 상태가 자신들의 행동 방식과 경향에 대해 보다 부주의하다." 그들은 "율법적 각성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 아래 있었을 때보다 죄악에 대한 분별력이 더 무디어졌고 "악의 모양"을 덜 두려워한다.

10. 거룩한 정서의 열 번째 요소를 에드워즈는 미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은 은혜와 정서들을 아름다운 대칭과 비례 속에서 주시는 경향이 있다." 거짓된 정서는 불균형과 비대칭성이 그 특징이라는 말이다. 에드워즈는 후자의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소개한다.
첫째, 과거에는 죄를 애통해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둘째, 인간은 사랑하나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든지 그 역이다.
셋째, 사람의 영혼은 사랑하는 척하나 육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없는 경우다.
넷째,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흥분하나 자신의 결함과 부패에 대해서는 덤덤하다.
다섯째, 아직 더 낮은 차원의 것이 없다면 그보다 높은 차원의 것은 없음에 분명하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하다.
여섯째, 덜 중요한 것에는 참지 못하고 열을 올리나 더 중요한 것 은밀한 기도와 찬양 중에 하나님 앞에 영혼을 쏟아 놓거나 하나님을 더 닮아 가는 일 등은 소흘히 한다.
일곱째, 어떤 특정한 죄에만 분개하고 자신의 죄에는 냉담하다.
여덟째, 관심이 수시로 변하여 잠시 영적인 관심을 갖는 것 같다가는 금방 세상적 관심으로 옮아간다.

11.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한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것들은 미래지향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체험이나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은혜로운 정서는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적 성취에 대한 영혼의 욕구와 갈망이 증가한다. 반면에, 거짓 정서는 스스로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 거룩한 정서를 더 많이 가질수록 영적 식욕이 더 강해지는 이유는 영적 입맛이 생긴 사람은 "거룩의 탁월성"을 감지하고 그 "신적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2. 참으로 거룩한 정서의 열두 번째 표지는 기독교적 실천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낳는가? 첫째는 순종이다. 둘째, 신앙 생활에 아주 열성적이어야 한다. 셋째는 견인이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의 핵심을 고백하고 행하는 자가 참 신자이며 참 신자라야 교회의 정회원으로 인정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에 에드워즈는 사람이 단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일에 마음이 있다는 증거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며 행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조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아주 귀한 책이다. 오늘날 우리는 에드워즈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 책은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을 아주 훌륭하게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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