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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존 오웬의 죄와 유혹

김재윤 | 2003.11.20 18:05
존 오웬 지음, 죄와 유혹, 은성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나오는데 어느 청년이 나에게 "저는 요즈음 목사님의 친구분이 쓴 책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웃으면서 "그 분은 꼭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게 누구입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존 오웬입니다. 그는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고 대답했다.
1947년 거룩함에 대한 어떤 가르침이 나의 영적인 온전함을 파괴시켰다. 그 당시 수백년 전의 사람인 오웬이 나의 영적 온전함을 회복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지금 이 청년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위의 일화와 이야기는 제임스 패커가 이 책을 소개하며 밝힌 것이다. 탁월한 신학자요 경건한 청교도 목회자인 존 오웬의 이 고전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는 죄와 유혹의 본질을 심도 있게 파헤친 역작이다. 이 책의 일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Ⅰ. 죄의 본질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 된다.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거룩한 계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만 소유하는 특별한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듯이"(고전 1:21),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악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교리와 죄의 자각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즉,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이후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기초가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그 결고, 그리고 그로부터 얻는 모든 유익함을 알지 못한다.
비록 신자들의 내면에는 죄의 법이 있지만, 그것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법은 아니다. 죄의 지배가 파괴되고 그 힘이 약화되고 손상되며 그 뿌리가 제한되었을 때에도 죄는 여전히 대단한 위력과 효력을 지닌다. 죄를 가정 적게 느낄 때가 사실은 죄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내면에 영혼의 원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깨어 지키며 부지런해야 한다. 이러한 죄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게으리고 태만하고 잠자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재앙을 당한다.
신자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에는 놀라운 세력과 효력이 있다.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도를 알기를 원한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원수는 외부에서 공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복음을 더럽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가 양심을 피하여 자신의 영혼을 위험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깨어 지켜야 한다.
죄의 법은 기록되어 명령하는 법이라기보다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강요하고 강권하는 법이다. 그것은 유혹으로 제안하며, 또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강제적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내적인 것으로 만드시고 그것을 마음에 심으셨다.
죄의 원리 역시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0에서 자신 안에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으며"(롬 7:21), "내 지체 속에"(롬 7:23) 있다. 그것은 내 육체 안에 거하는 법이다. 죄란 내면적인 습관이요 원리이다. 그리고 그것의 세력은 이익을 좇음으로서 촉진된다.
죄의 법은 항상 영혼 안에 있다. 그것은 한번도 결석하는 법이 없다. 사도 바울 역시 죄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죄의 법은 특별한 때에 방문하지 않는다. 죄는 우리 영혼 안에 거처하고 있다.
죄는 언제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나 구제할 때나 묵상할 때, 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써 의무를 행할 때에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 죄가 우리를 방해한다. 죄는 우리를 타락하게 하는 원리를 가진 놈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달라 붙어 지낸다.
죄는 대단히 쉽게 자신의 일을 행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히 12:1)라고 했다. 죄에는 문이 필요없다. 따라서 문을 열 필요도 없다. 죄는 우리 마음과 오성 안에 있다. 죄는 의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죄는 우리의 기호와 감정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에도 은밀히 악을 심으로 선하다고 하면 어떤 것이든 방해한다. 죄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도 익숙하게 잘 지낸다. 죄는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사용해야 하는 영혼의 능력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죄는 언제나 영혼 안에 거한다.
집에 있을 때 당연히 불조심을 해야 하듯이 기독교인들도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죄를 예방해야 한다. 은혜를 간절히 원하고 깨어 경성하고 부지런히 순종하는 것 등이 마음에 있는 죄를 예방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회전축이 되어 우리의 모든 생활이 회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로 무감각과 부주의와 나태함과 자만심 등을 낳게 한다. 이처럼 마음 안에 있다는 죄의 근본 원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양심이 마비되고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악을 행하도록 자극하고 유혹하는 표면적인 유혹들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마음 안에 있다. 유혹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밀어 넣는 것은 이미 그의 마음 안에 있었던 것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죄가 거하는 장소이다. 이곳에 우리의 원수가 거한다. 이 요새 안에서 폭군인 죄는 평생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꾀한다. 우리는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처럼 무장을 한 군사들의 숫자와 병력만이 아니라 원수가 소유하고 있는 요새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원수와 마음의 관계가 이와 같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은밀한 계획과 계교, 우여곡절, 행동들과 경향조차 알지 못한다. 무한하시고 널리 만물을 살피시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
내재하는 죄의 법은 우리가 찾아낼 수 없는 마음 속에 거한다. 그 안을 무척 안전하고 튼튼하다. 우리는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원수와 싸우고 있다. 우리는 가끔 죄가 파멸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죄는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은신처와 도피처를 가지고 있다.
죄는 어두운 정신과 의지와 세속적인 감정 안에 위장하여 숨어 있으므로 우리의 눈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 지혜롭다는 일이란 겨우 죄가 정체를 들어내는 때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러나 볼 수 없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훤히 들여다 보실 수 있다. 만물의 뿌리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분은 주님 뿐이다(히 4:13). 마음은 찾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되기도 하다.

Ⅱ. 시험의 본질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이 은혜인지 타락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시험한다. 은혜와 멸망은 사람의 심령 안에 깊이 놓여 있으므로 사람들은 전자나 후자를 찾을 때에 종종 미혹되는 일이 있다. 우리가 자신의 심령 안에 어떤 은혜가 있는지 보려 할 때 악이 나아오며, 혹 그곳에 거하는 악을 보려 할 때 은혜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영혼은 불확실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시험하는 일에 실패한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조사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는 하나님의 시련이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서 영혼으로 하여금 그곳에 있는 것을 보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큰 시련에 의해 그 믿음을 시험하시기 전에는 자기 믿음의 능력과 힘을 알지 못했다(창 22:1-2). 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교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를 시험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그에게서 떠나셨다(대하 32:31).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시며 그로 하여금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더러운 것을 보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시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시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게서 은혜 중에 우리의 앞에서 가신다는 것을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시험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악을 행하지만 자신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시련이 임하면 우리는 곧 자신이 더이에 갇혀 있으며 어디에서 실족하는지 깨닫는다. 이것은 자신이 개인적인 의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비멜렉에게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꿈 속에서 그에게 "내가 너로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창 20: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우리를 시험하신다. 바울이 시험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가 그에게 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계속 그를 시험하셨다(고후 12:9).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히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시험의 강도와 자신의 연약함을 비교한다. 그것은 마치 독을 마셨을 때에만 효력이 나타나는 해독제와 같다. 약의 효능은 병에 걸려야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험을 당해봐야만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수하거나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그들에게 부과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방법이다. 이러한 도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인 듯이 보인다. 그것은 살마의 자연적인 본능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보아도 가혹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시험을 당해야만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한지를 알게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큰 고난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견디며 심지어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예기치 못한 힘을 발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베드로는 우리가 쓰라린 시험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말한다(벧전 1:5-7). 고난이라는 불 같은 시련에서 비롯되는 우리의 시험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믿음을 연단해 준다.
셋째, 하나님은 섭리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신명기 13:3은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시므로" 거짓 신들을 좇으라고 강권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교훈한다.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죄의 유인들로부터 멀리하게 하시려고 이러한 경고를 하신 것이다.
시험은 특별히 악으로 인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소극적으로 우리는 때때로 고난이나 고통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진다. 이것이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는 말씀의 의미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악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이 우리를 괴롭힐 때에 시험에 빠진다는 뜻이다. 사단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악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도 시험하지 아나하신다(약 1:13).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창 22:1), 또는 거짓 선지자들을 증명하셨듯이(신 13:3) 시험하실 뿐이다. 바르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여 범죄하게 하시지 않는다.
첫째, 사단은 때때로 세상, 세상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을 이용하지 않고 홀로 시험한다. 그는 성도들의 마음에 악하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적인 생각들을 주입한다. 사단은 자신의 힘으로, 직접적으로 이 일을 하므로 사단이 홀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악의에 의해 이처럼 불같은 화살을 만들고 그것으로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 화살은 모든 독을 사단 자신의 마음에 영원히 되돌려 준다.
둘째, 사단은 종종 세상을 이용하며,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힘을 연합한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에게 "천하 만국과 그 영광"(마 4:8)을 보여 주며 시험하였다. 사단이 세상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도움-사물과 사람-은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셋째, 사단은 때로 우리 자신에게서 도움을 취한다. 우리는 죄와 전혀 관계가 없으신 그리스도와는 다르다. 우리 자신의 욕망이 우리를 유혹한다(약 1:14).

Ⅲ. 내면의 죄를 죽이는 일
죄를 죽이기 위한 다른 방법은 모두 무익하다. 다른 모든 도움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죄를 죽이는 일은 오직 "영으로써" 성취된다. 바울이 로마서 9:30-32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원리들을 기초로 하고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다른 능력은 결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계획에 따라 수행하는 고행은 독선으로 끝나고 만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거짓 종교 신앙의 본질이요 실체이다.
죄를 죽이는 것은 죄의 사망 및 최종적인 제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죄의 완전한 제거는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죄가 제거된 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의에 위선을 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아마 또 하나의 마음을 소유할 것인 바, 그것은 거룩한 마음이 아니라 교활한 마음일 것이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조용하고 조절된 기질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제를 잘한다. 우리는 자신의 자제심과 신중함과 다른 특성이 발달되면, 자기가 진정으로 변화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시궁창처럼 악취를 내뿜는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평생 나쁜 기질의 괴롭힘을 받지만 분투하며 노력하는 동안에 선천적으로 자제심이 많은 사람보다 죄를 죽이는 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질을 정화시킴으로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죄가 일시적으로 우회하는 것은 죄가 죽은 것이 아니다. 시몬 마구스는 잠시 모든 마술을 버렸지만 그의 탐심과 야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베드로는 그에게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행 8:23)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과거의 시몬 마구스였다. 정욕을 파는 것, 하나의 정욕을 다른 정욕과 교환하는 것은 치료책이 아니다. 교만을 세속성으로, 육욕을 바리새주의로, 허영심을 경멸로 바꾸는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었는가? 우리는 어떻게 죄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는가? 우리가 행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살펴 보기로 하자.
첫째,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원수를 안다는 것이 필요하다. 죄를 지극히 신중하게 대하라. 사람들은 죄를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죄를 죽이는 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에 재앙"(왕상 8:38)을 깨닫는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려 할 것이다. 자기의 원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그에게 권면하거나 책망하는 사람들에게 조급한 행동을 한다(대하 16:7-10).
둘째, 영적 싸움을 하기 전에 죄의 간계와 전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원수를 공격할 때에 이와 같이 한다. 그들은 원수의 계획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와 같은 첩보 활동이 없다면, 그 전쟁은 짐승의 일로 전락한 것이다. 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악이 사용하는 방법을 관찰한 후에, 그것을 예방하라. 다윗은 자기의 죄가 항상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시 51:3). 내재하는 죄의 정책과 간교함과 심오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전형적인 핑계, 구실 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라. 그런 후에 그것의 계략을 예상하고 경계하라.
셋째, 죄를 호되게 공격하며, 죄가 살아남지 못하도록 모든 총탄을 장전하라. 날마다 새롭게 죄에 상처를 입히라.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고 강권했다. 죄나 정욕이 활동을 정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죄를 죽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죄의 내재하는 성향이 약화되는 것이다. 겸손이 심기워지고 성장함에 의해서 교만이 약화되며, 인애에 의해 욕망이 정화되며, 깨끗한 마음과 양심에 의해서 부정함이 씻겨지며, 거룩한 마음에 의해 이 세상 사랑이 억제된다. 이러한 은혜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둘째, 그것은 정욕을 대적하여 싸우는 성령이나 새 사람의 즐거움, 활력, 민첩함 등이다. 죄를 죽이는 일의 성공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문제가 되는 죄가 본성적인 기질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을 때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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