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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료나눔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인의 지식

김재윤 | 2004.01.30 12:22
그리스도인의 지식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이 말씀은 사도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낸 불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서 마땅히 기대될 만한 종교의 교리와 비밀들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불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 받은 것들을 친숙하게 아는 것에 있어 진보하지 못하였다고 말입니다. 마땅히 그들은 그런 면에서 진보를 보였어야 했습니다.

그가 그들을 질책하는 것은 단순하게 신적인 것들을 아는 ‘신령하고 체험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진리들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진리들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이 책망의 표현을 도입하는 방식을 통해 명백하게 보여지는 바입니다.

그 질책을 도입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다루는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상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로 지칭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으로 제시됩니다.

구약의 멜기세덱에 관한 기사에 복음적인 비밀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사도는 이 비밀들을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적해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이 연약함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할 것임을 사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잠깐 멈추고,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니라.”(11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풀이하면,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곧, “멜기세덱에 관한 것 중에는 복음의 놀라운 비밀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만일 내가 너희를 향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들을 주목하게 할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데 둔하고 더디어서 멜기세덱에 대한 내 강론이 너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한 만들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단단한 식물 같아서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본문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이 말씀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그러한 비밀을 능히 이해하고 소화해낼 정도로 성경을 충분하게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알고 보니 그렇지 않구나.”

사도는 그들이 ‘인간적인’ 가르침에 의해 전달되는 지식과 같은 일에 있어서 숙달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표현을 보면 그러합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라는 말씀은 진리와 종교적인 비밀에 대한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뿐 아니라, ‘교리적인 지식’을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걱정스런 어린 아이들

다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적인 것에서 보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그러한 지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질에 속한 것들은 큰 기술을 요합니다. 다음의 두 구절에서 그 점이 보다 더욱 충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초보 원리에서 발전하게 만드는 바 지식과 연단입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서 다음 장 초두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라고 충고합니다.

이러한 부족함이, 그들이 신앙을 가진 기간에 합당하게 ‘성숙하지’ 못한 사실에서 드러남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연륜으로 따지면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므로 그들의 할 일은 그리스도인다운 지식을 배우고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마땅한 바대로 시간을 배움에 잘 활용하였으면,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쯤 해서는 마땅히 이 학교에서 선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배우고 자신을 온전케 하기 합당하게 들여진 시간에 비례하여 온전하게 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언제나 어린 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먹는 연한 것을 버리고 질긴 고기도 소화해 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의 지식에서 자라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신학생들과 교역자들의 임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연구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일이 그들의 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다른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오직 그들에게 일임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이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선생이 되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로 나무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도는 이런 일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거나, 이런 일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이 배우는 데 소요된 연륜에 합당하게 지식에서 자라지 못한 일로 책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저는, ‘신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학이 어떤 유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째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식에서 ‘자라기’ 위하여 진력하여야 하는지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신학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 주제에 대해서 다룬 이들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은 원칙적으로 가장 정확한 정의가 어느 것인지 따져 보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학의 개념에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고 묘사하겠습니다. 신학은 종교(물론 여기서는 참 유일한 종교인 우리 복음적인 기독교를 일컬어 말함-역자주)의 큰 임무에 관련된 모든 진리들과 모든 원칙들을 다 함축하는 학문, 또는 교리입니다.

각각의 목적에 따라 학교에서는 다양한 예술과 학문을 가르칩니다. 철학과 같이 일반적으로 본질에 속한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천문학과 같은 눈에 보이는 하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아니면, 해양학과 같이 바다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지리학과 같이 땅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논리학과 영물학(靈物學)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연구하되, 그 힘과 여러 자질들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정치학이나 법학같이 인간을 다스리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학문, 그런 유의 지식과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종교의 큰 임무에 관한 것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은 다른 학문같이 인간의 본성적인 이지의 계발로 인하여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바 교훈이 가득한 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책은 이런 유의 지식을 탐구하는 데 길잡이로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입니다. 또한 이런 성질에 속한 것으로 우리가 알기에 필요한 모든 것의 요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로 ‘자연 종교’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해, 자연의 빛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진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 신학’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자연의 빛으로 분명해 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계시(啓示)에 의존합니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조건 때문에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으면서도 필요한 방식을 따라서 자연의 빛으로 분명해 지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원천은 절대적으로 성경이다

신학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어떤 방면에서도 복음적 체계에 속하지 않거나 중보자와 관련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빛은 신학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의 어느 부분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빛으로 그걸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독교 신학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로지 구약과 신약을 다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처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행복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알려진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일반적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정의됩니다. 보다 정확하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교리’라고 저의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교리들을 전폭적으로 포함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영위하는 삶의 지도하는 모든 기독교 법칙들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의 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교리나 약속이나 법칙은 기독교 신학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포함된 교리들과 원칙들은 두 방면에서 이런 우리의 삶과 관련됩니다. 곧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삶을 촉진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고, 다른 방면에서는 이후 내세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누리는 완전하게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우리에게 떠올려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Ⅱ. 교리란 어떤 유의 신학 지식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색적(思索的) 지식’과 ‘실천적 지식’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면, ‘본성적 지식’과 ‘신령한 영적 지식’입니다. 전자(前者)는 머리에서만 머무는 지식입니다. 이해력의 기능만이 관련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은 종교에 속한 것들에 대한 본성적이나 이성적인 지식으로 이루어지고,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비춤이 없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능들을 본성적으로 행사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후자(後者)의 경우 머리에서나, 아니면 사물들에 대한 사색적인 개념에만 안주하지 않고, 마음도 관계하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주로 마음의 의식을 내용으로 합니다. 의지나 의향이 업는 단순한 이지(理智)는 그 지식의 좌소(座所)는 아닙니다. 또한 그 지식을 단순히 보는 것이나, 느낌이나 취향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교리에 대한 바른 사변적인 개념을 갖는 것과, 마음으로 그 교리에 합당한 지각을 갖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교리에 대한 사변적인, 또는 본성적인 지식을 내용으로 하고, 후자는 영적이거나 실천적인 지식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 두 국면은 교리에서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천적인 혹은 영적인 지식을 ‘위하여’ 사색적인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후자, 혹은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식인 없는 사색적인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색적인 지식은 있는데 영적인 지식이 없으면, 우리의 정죄를 더 크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색적인 지식이 없이는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가질 수가 도저히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적 지식을 위해 사색적 지식도 갖추어라

저는 이미, 사도가 영적인 지식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두 가지 지식 사이에 상호 교통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색적인 지식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영적인 지식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적 지식을 가지기 위해 사색적 지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색적인 지적 지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독서를 통해서나 다른 합당한 방편을 통해 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성적인 지식’을 추구할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지적인 지식의 인도를 받아서 구해야 하는 것이 그 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Ⅲ. 신적 진리를 아는 지식의 유용성과 필연성

아무리 유익을 줄 수 있는 방편이라도 지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다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교할 때 이지(理智)에 지식을 전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서 선생들의 반열에 들게 하신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러한 지식을 전혀 얻을 수 없다면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가 은혜의 방편이고 듣는 자들의 마음에 선한 것을 준다 해도,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지 못한다면 설교하여 듣는 이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으로는 전달되지 못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지식도 전해 주지 못하면 아무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지식도 전해 주지 못하면 아무도 덕 세움을 입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14:2-6절에서의 사도의 논증과 부합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식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말은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말은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그러한 말은 마치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한 고린도전서 14장 6-10절에서 그런 논리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다루고 계십니다.

믿음을 행사한다 함은, 자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드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듣는 일은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질에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매력을 주는 이유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여러 가르침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이지에 어떤 지식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한 마디도 알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성례전이 어떤 지식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성례들은 눈에 보이는 표지들로 인하여 어떤 것을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열지 않으며, 알아야 하는 대상이 마음에 좌정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가, 그 교리의 탁월성과 진리성을 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먼저 듣고 이해하기 전에는, 그런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탁월성과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먼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적 진리의 관대함과 탁월성을 알 수 없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지식이 없다면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교도들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신적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극심한 흑암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아는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면, 그들 속에 있는 이성의 기능은 전적으로 허사일 것입니다. 이성과 이해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실제적인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아는 기능과 능력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실제적인 지식을 갖는다 해도,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면 여전히 그의 이성의 기능은 헛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큰 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헛되게 만든다면 사람이기보다 짐승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신적인 주제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의 기능으로써 알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존재의 목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임무를 위해 지은 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보다 자기의 이해의 기능을 선하게 사용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유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밖의 지식들도 매우 유용할 수 있습니다. 즉 천문학이나 자연 철학, 그리고 지리학과 같은 학문도 그들 나름으로 매우 탁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학을 아는 지식은 모든 다른 학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유용합니다.

Ⅳ.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아는 지식에 자라기 위해 진력해야만 하는 이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이미 얻은 신학 지식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을 얻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 분량의 지식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지식에서 자라나려는 마땅한 노력이 마치 부수적인 것인 양 취급당해서는 안됩니다. 아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을 의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 일을 하루의 일과로 여겨야 하며, 일과의 어떤 작은 부분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자기들의 높은 소명의 아주 상당한, 그리고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이 일을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짐승과 다르게 창조되었기에

우리의 임무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를 짐승들과 구별되게끔 부여해 주신 기능들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수들보다 더 우월한 기능들을 부여받은 이유는, 우리가 더 우월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과 의도는 짐승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보다 훨씬 높은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더 탁월한 기능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 없이, 그런 우월한 기능들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상당한 임무여야 합니다. 우리가 짐승들과 크게 구별되는 것은 이해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기능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 기능을 계발하는 일을 ‘부수적인 일’로 여기면, 사실상 그 이해의 기능 자체를 ‘부수적인 기능’으로 만드는 격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 기능을 다른 기능들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능들 중에서 가장 높은 기능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 지성적인 기능을 실제적이고도 능동적인 지식을 얻는 일에 활용하지 않는다면, 달리 그 기능을 활용하여 계발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자기들의 일로 그다지 크게 여기지 않고, 또 지식을 얻기 위해 자기들의 이해력을 계발하지 않는 이들은, 열등한 기능에 자신들을 가장 크게 드리는 자들입니다. 즉 자기들의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자신들의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자신들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처신할 뿐 아니라, 마치 자기들이 사람인 것과, 하나님께서 이해력을 주심으로써 자기들을 짐승보다 더 높게 세우신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같이 처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짐승과 공통되는 것들도 주셨습니다. 인간의 외면적인 감각들과 몸의 소욕들, 몸을 즐겁게 하는 능력들이나 아픔을 느끼는 지각, 그리고 다른 동물적인 기능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짐승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짐승들보다 더 우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제일되는 것은 이해와 이성의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탁월한 기능들이 짐승들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열등한 기능들에 복속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큰 논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짐승들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열등한 능력들을 아울러 주신 것은 사람의 이해의 기능에 복종적으로 활용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얻음으로써 인간의 이해력을 활용하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적 지식이나, 신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이해력을 활용하는 것을 자기 일의 주요 여겨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아는 지식이 이 기능의 주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해의 기능을 주신 것은 주로 신적인 것들을 이해케 하려 하심입니다.

지혜가 많은 이교도들도 사람의 주요한 임무는 자기 이해력을 활용하고 행사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력이 [동양철학에서는 이 기능을 오성(五性)이라고 칭함-역자주] 가장 주요하게 어떤 대상을 향하여 활용되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들 지혜로운 이교도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기능을 가장 크게 사용한 학문은 철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자기들의 제일 되는 임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누리는 우리는 더욱 복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둠 속에 그냥 버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가르침으로 충만한 책을 주셨으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이해력을 제일로 활용해야 하는 영광스런 많은 대상들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들은 능력이나 조건이 다 다른 모든 인격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학식이 있는 자들뿐 아니라 배웠든 배우지 못하였든,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든 유의 사람들이 연구하기에 적당한 교훈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하 지식을 얻는 것은 성경을 누리는 이점을 가진 모든 자들의 주요한 임무여야 합니다.

2. 학문적 대상으로 탁월하기에

신학의 진리에는 최고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아는 일에서 자라나려고 모든 이들이 힘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진리들은 다른 학문들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들보다 훨씬 높되, 하늘이 높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삼위(三位)이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학문의 제일 되는 대상이십니다. 그 다음이 신인(神人)이시요,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하신 영광스러운 구속의 역사가 이 학문의 제일 되는 대상입니다.

그 일은 역사 속에서 행해진 여러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약속된, 하늘 세계에 속한 일들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된 영광스러운 영원한 기업이 또한 신학의 대상이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도리와 우리 자신이 천사들과 같이 될 수 있는 방식, 우리의 분량에 맞게 하나님과 닮게 되는 방식 등이 신학의 대상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거룩한 족장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이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연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벧전1:10-12). 그것들은 지극히 탁월하고 가치 있어서 그것들을 아는 지식은 부지런히 찾는 수고와 고통과 노력에 대한 풍성한 대가가 될 것입니다. 만일 금이나 진주와 같은 큰 보배가 있어 누구나 다 주워서 모을 수 있는 대로 가질 수 있는 처지라면, 그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그 보배를 주워 모으는 일을 아예 일삼아 한다고 해서 누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들어있고,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이 가질 수 있게 공급되어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배는, 금이나 진주보다 훨씬 더 부요한 것입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의 사람들이 부(富)를 끌어 모으는 데 얼마나 분주한가요! 그러나 이 지식은 세상 모든 유의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힘들여 찾는 보배보다 훨씬 더 나은 유의 부요입니다.

3.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관련되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교역자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중요성을 가진 것입니다. 신학의 교리는 철학이나 다른 학문들의 이치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학문들은 일반적으로 사색적인 요점으로 인간 생활에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우리들의 세상적인 관심거리나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별반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의견을, 다른 이는 저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다른 이들은 이런 일들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그들이 서로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이가 옳든 저가 옳든 그것은 그들에게 별로 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은 모든 성도에게 필요

그러나 신학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신학의 교리들은 모든 이들에게 다 관련이 있습니다. 신학의 모든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행복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은 교역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맡기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문자,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다.”라는 식으로 일반인들이 말할 수 없는 까닭은 신학 교리들이 개별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성, 실재(實在) 등에 관련된 교리들은 모든 이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한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거동하며 있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그분은 만유의 주가 되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시며, 우리 행복의 오직 유일한 원천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 성육신(成肉身), 생애, 죽으심, 부활하심과 승천, 아버지 보좌의 우편에 앉으심, 대언의 기도를 하심 등에 관한 교리들은 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일반인들에게 무한한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인들도 이 구주를 필요로 하되 교역자들과 신학자들만큼 필요로 하며, 교역자들과 신학자들만큼 구주의 인격과 직무와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일들에 관계됩니다.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교회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효력에 참예하게 되는 것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 동일하게 그 모두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동일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멸망은 그와 동일하게 모든 이에게 있어서 무서운 참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교리들 중, 유효한 부르심과 성화에 구속의 효력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모든 이들이 다 동일하게 관계됩니다.

4. 세상 학문과 성별하셨기에

우리는 같은 입장에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칠 양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근거로 논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학문의 경우는 우리 자신에게 일임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성의 빛에 따라서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적인 일들은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확실한 안내자를 따라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고, 여러 세대에 걸쳐 성령으로 직접 감화를 받은 선지자들을 일으키셨고, 기존의 자연법칙을 벗어나 헤아릴 수 없는 이적들과 기사들로 그들의 메시지들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일련의 여러 선지자들을 일으키시고, 그 일련의 선지자들의 사역이 여러 세대 동안 견지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족속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구별하시고 보전하시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전달되게 하신 것은, 다분히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천사들을 보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이적적인 상징들을 나타내시거나 당신의 임재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이 마지막 날에는 당신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모내시되, 위대한 선지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지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학의 총채를 포함하고 있는, 신적 가르침의 책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행하신 것은 교역자들이나 학식이 있는 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유의사람들,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린이거나 아니거나 모든 유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큰 일을 하셨다면, ’배우기 위해 어떤 일인가를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은 하나의 부수적인 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놀라운 여러 섭리들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시고 진척시켜 나가셨습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마음이 크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때로 성경에서는 그 일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일찍 일어나사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보내신 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렘7:25)

그리고 13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상징적인 어법으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아주 크게 중요한 일로 여기시며 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큰 간심을 가지시고 마음을 크게 기울이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열심을 내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신다면, 우리는 배우는 데 게을러서 안되는 게 확실합니다. 그것을 배워 알며 자라는 일을 우리 삶의 아주 큰 과업 중 하나로 여겨야 합니다.

5. 성경이 지식을 요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의 풍성함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책의 위대함과, 거기에 내포된 내용의 다양함을 근거로 해서 논리를 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 모세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이시켰습니다. 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가르치신 것이 많고,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탁월하고 많은 교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로 충분하다 생각지 않으시고, 후에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말미암아 그 거룩한 책에 위대하고 탁월한 보화가 더해 졌습니다. 우리가 이 중요한 주제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그 거룩한 책을 우리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상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했고,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사34:16)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드는 자들과…복이 있나니”(계1:3)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성경의 한 책에 이것이 해당된다면, 성경 전반에 걸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의도하시고 성경을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풍성하게 많은 교훈을 거기에 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풍성한 교훈들은 우리가 이해할 만한 것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가르침의 교훈들이 아닐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이해하게 할 양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은 배우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학을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면, 그런 교훈들 거의 대부분이 우리에게는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깨달은 것 이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렇게 풍성하고 다양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할 이유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주신 일을 들어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궁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 앞에 매우 큰 보물창고의 문을 여셨고,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우리가 게을러서 보화를 모으지 못하고 그 보물창고의 거의 대부분이 손을 대지 않은 채 있다면,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 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가 훨씬 더 유리합니다. 그 시대 이후의 정경에 포함된 책들이 아주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지 않고 태만하면, 그 백성들보다 더 나을 게 결코 없을 것이며, 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빈약한 지식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6. 진리가 무궁무진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얻기 위해 아무리 부지런히 애를 쓴다 해도, 그 진리를 아는 지식의 완전성에 도달하려면 더 나아가야 할 여지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고 핑계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핑계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에는 언제나 있는 힘을 다하여 애를 써서 얻어야 할 부분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고 아무리 면밀하게 노력을 경주하고 아무리 오래 연구했다 해도, 그 사람이 사실은 알아야 할 것 중에 아주 적은 부분밖에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문제는 아무리 해도 밑이 드러나지 않는 주제입니다. 이 신학의 주인공이신 분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완전하심의 영광에는 끝이 없습니다. 아울러 그의 하신 일들은 놀랍고, 그 일들의 완전한 깊이를 다 밝혀 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신학의 주요한 관심거리인 구속의 역사는 측량할 수 없는 기이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학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게 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위해 경주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유능한 신학자들의 머리를 총동원하여 세상 끝까지 연구해도 더 연구해야 할 충분한 여지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간에게 속한 일들에는 끝이 있음을 알고,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시니이다.”(시119:96)라고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신학에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합동으로 영원토록 깨달아 가기에 충분한 것이 있습니다.

7. 그리스도인의 업이기에

직업, 곧 주요한 소명에 속한 일들을 아는 지식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모든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일이나 지혜나 지식에 있어서 더욱 자라나려고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들의 주요한 직업이나 사역에 속한 일들을 더욱 알려고 하는 것들은 틀림없이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나 일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는 그것을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업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무역이요, 그의 주요함 임무이며, 실로 오직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하 가지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이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이런저런 면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임무를 완성하고 그 임무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 위해 그 일에 속한 것들에 아주 잘 친숙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8. 가르치는 자를 세웠기에

그르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목적, 곧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지식을 얻는 데 사람들을 돕도록 세운 사람들의 계층에는 차서가 있다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런 사람들을 얼마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들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사로 세워 그들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유의 지식입니까? 철학이나, 인간의 법이나 기술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입니다.

가르치는 자를 세웠다면 배워야 할 자는 누구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로 하여금 그런 교사들의 임무를 감당하게 하셨다면, 그 외의 자들에게는 배우는 임무를 주셨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가르치는 선생들과 배우는 자들은 서로 관계 있는 자들입니다.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선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선생이 없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어찌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배우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가르치는 수고를 하라고 선생들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지식을 받으려는 마땅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자들에게 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시간을 보내라고 사역자들에게 명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제자들’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학생들’과 ‘배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여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학교에서 그들이 할 일을 그들의 선생이요 상전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라고 임명받은 교사들로부터 지식을 배우거나 받는 일입니다.

9.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나기 위해 간절한 부지런함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성경에서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지식뿐 아니라, ‘모든 지식으로 부요해’ 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고전1:4,5)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이 사랑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알아야 하는 ‘지식’에 있어서도 더욱 풍성해 지기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5)이라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초보를 떠나서 온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처음 입교하여 세례 받을 때 배운 회개와 믿음과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기본 교리들에만 머물러 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나 제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지식에 있어 능숙해지기 위해 열심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어린 시절에 배운 교리,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구원받기에 필요한 원리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만족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사도가 경계하며 막는 일을 감히 저지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행실에서 회개하는 일에 기초만 놓고 그 뒤로 새 집을 짓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하게 그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본분에 속한 것들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느라 신간을 보내는 선생들이 여러분을 볼 때 전혀 배우려 하지를 않는다고 서글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에게는, 열심히 배우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자를 만나는 일은 정말 큰 힘이 되지만, 그런 경우에는 가르치는 일이 즐거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큰 보고를 옆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에서 아주 적은 것만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모두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이나 이해의 고상한 기능을 묻어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오다가 접하는 지식 정도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설교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일이 흔하니, 어떤 의미에서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식을 받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 없이 설교를 듣기 때문입니다. 또는 대화를 통해서 우연한 지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지식을 추구하십시오. 은광이나 금광에서 은과 금을 캐는 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부지런함과 힘씀으로 지식을 얻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특별하게 이와 같이 힘을 쓰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늙어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음의 시절은 특별히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식을 얻어 쌓아두기에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젊은이나 노인이나 다 배우는 일에 충실하라고 촉구하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1. 시간을 아껴 일을 찾아라.

여러분이 부지런히 이 일에 열중한다면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쉬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한가한 시간에 이집 저집 다니고 무익한 대화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고작해야 심심풀이를 하면서 시간을  다 써버리는 일이 아닌 다른 일거리를 찾을 것입니다. 저녁에 여러 집을 방문하느라고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보다 훨신 더 나쁜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잠10:19)라고 말합니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허물 있는 말을 하거나, 어느 누구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런 하찮은 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이 입증되지 않습니까?

자기 본분을 살피는 일은 왕도(王道)

기분 전환은 물론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 시간의 아주 많은 부분이나 긴 저녁 시간을, 아주 나쁜 일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저 기분을 좋게 하거나 심심풀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모두 허비한다면, 그것은 죄악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자세는 외적으로 사람을 궁핍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결국 영혼의 궁핍을 가져오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14:23)라고 말씀합니다.

그밖에, 사람들이 아무 할 일없이 앉아서 노닥거리게 되면, 어리석고 죄악적인 대화로 빠져들게 되고, 자기들의 부패한 성향을 자극하여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말을 하거나, 이웃을 시기하거나 악하게 평하는 자리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훈을 통하여 여러분은, 말다툼이나 분쟁을 불러오기 쉬운 정치적인 대화가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분요한 무리들 속에서 헛된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더 유익한 일, 결국 어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거나 복락을 받는 길에 더욱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인들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들을 드려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흔히 나타나는 경우이지만, 노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유익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여러 진리들을 서로 비교하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면 그렇게 힘에 겹지 않을 것입니다.

2. 본분을 살펴라.

앞에서 권고한 대로하면 여러분은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베뢰아 사람들에게 그런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부지런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일과 아주 흡사합니다. 하늘의 거민들은 자기들 시간 대부분을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일들을 상고하고 온 힘을 다해 그것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데 쓸 것입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라는 성경 말씀이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빛의 천사들과 합세하여 그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이 틀림없듯이, 영원토록 여러분이 하게 될 일과 아주 잘 부합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솔로몬은,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라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다른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왕의 영화라면, 여러분에게는 참으로 큰 영화가 아니겠습니까?

3. 지식이 즐거움을 준다.

그 일은 시간을 활용하는 즐거운 방식입니다. 지식은 지성있는 피조물들에게는 즐겁고 유쾌한 것입니다. 다른 것보다 하나님께 속한 일을 아는 지식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 신적인 것들에는 가장 탁월한 진리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며,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것들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무리 지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라도, 일단 그렇게 하여 얻어진 지식은 드려진 수고를 넘치도록 보상해 줄 것입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4. 대화를 유익되게 하는 지식

이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극히 ‘쓸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진 자들은 영적이고 구원얻는 지식을 위해 큰 방편과 이점들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은혜의 방편도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구원의 효력도 나누어주지 못합니다.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성경에서 여러분의 심령을 감동시키게 될 때 그런 일들의 탁월성을 알고 그 진미를 맛볼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들을 아는 이성적이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이방인들에겐 그것들의 탁월성을 알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이치에 합당한 지식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들의 신적인 탁월성과 영광을 아는 기회가 이점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임금들보다 지식에 우리가 유리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더욱 잘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식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며 지도하는 데에도 크게 쓰여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의 시험을 막아내는 데 더 좋은 무장을 한 셈이 됩니다. 마귀는 흔히 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가짐으로 여러분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길에서 더욱 신중하고 바르게 처신할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더욱 유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호의적이며 마음이 착한 심령으로 가득하면서도 신중함이 부족하여 복음종교를 훼손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식을 따라 행하지 않아서 선보다는 해를 끼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아주 선한 자들이 결코 선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은, 은혜는 원하면서도 지식은 원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 외에 지식을 많게 하는 것은 유익한 대화를 나눔에 있어 크게 유용합니다. 여러분이 함께 모이거나 이웃을 방문하게 될 경우에 선한 대화의 소재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마음을 해롭게 하는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시험을 덜 받게 될 됩니다.

5. 복된 시대를 사는 우리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됨으로 여러분이 얻게 되는 이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보다도 그런 지식을 얻는 데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 시대보다 정경이 더 확대되었고, 지금은 복음의 진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면에서는 오늘날의 평범한 이들이 구약시대의 가장 큰 선지자들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더욱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요될 수 있습니다.

“너희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드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24).

어떤 방면에서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보다 지금 교회사의 후기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쇄술로 말미암아 성경이나 신학의 여러 책들이 아주 많이 반포되게 되었습니다. 오날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보다 그리스도인의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장비를 훨씬 쉽고 값싸게 갖출 수가 있습니다.

6. 지식으로 답변하라

우리가 붙잡고 있는 종교의 원리들 때문에 우리가 어떤 반론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복음과 그 진리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그런 진리들을 수용한다면, 그런 원수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하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방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명하기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상당한 지식이 없이는 그렇게 하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Ⅵ. 그리스도인의 지식을 얻기 위한 몇 가지 방침

1. 지식의 원천은 성경

열심을 내어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은 모든 신학의 지식을 얻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를 그냥 묵혀두는 게으름을 피우지 마십시오. 읽을 수 있는 보통의 이해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과 친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얼마나 놀라운 것을 얻게 됩니까?  

2. 호기심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성경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그저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성경을 읽는 방법 중에서 아주 나쁜 방식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그런식으로 성경을 읽는 습관으로 일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읽을 때 그 읽는 바를 관찰하십시오. 그 내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주목하여 살피십시오. 교훈의 취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 대목과 저 대목을 서로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다른 부분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성경의 부분들이 서로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지식을 더해 주는 복된 성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을 상고하라고 분명히 지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지시는 성경을 단순하게 호기심으로 읽는 것 이상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방편들을 이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그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어느 때든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말씀이, 만족할 만큼 아주 선명하게 깨달아지거든 표시해 두고, 모아놓고, 가능한 기억해 두십시오.

3. 경건 서적을 보조로 읽어라

성경을 아는 지식을 자라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른 책들을 확보하고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이러한 지식을 가지게 하는 데 여러분을 크게 진보케 하여 주는 놀라운 책들이 많습니다. 그런 책들은 여러분의 여가 시간에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유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적은 대가를 지불하기도 싫어하여 이런 성질에 속한 도움을 더 이상 갖추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는 분명하게 아주 큰 결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이들은 실로 그럭저럭 주일에만 읽는 책들을 몇 가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은 너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고 자주 읽어서 아주 지겨운 책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젠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이 다분한 이야기가 되었고, 그저 단족로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4. 지식을 서로 전하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이런 목적을 위해 선용하십시오. 만일 할 수 있으면 대화를 통하여 서로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촉진시켜줄 수 있을까요. 무시간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다른 이에게 배울 기꺼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은 교만함이나 오만한 자세 없이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서로간에 세워 주고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기 위한 대화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더욱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서로간에 얼마나 큰 자극을 줄 수 있을까요.

5. 지식을 교만의 도구로 쓰지 말라

갈채를 받거나 다른 이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지식의 증가를 원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해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갈채를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성적인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목적이 그러하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교만으로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 쉽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6. 지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인도해 주시고 복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거룩한 지식의 원천이시기에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오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눈멂과 무지와 하나님의 도움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신의 진상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바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라는 성경말씀처럼 되도록 애쓰십시오.

7. 지식에 따라 행하라

여러분이 가진 지식에 따라서 실제의 삶을 영위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더 많은 지식을 가지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지식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이 방법을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며 같은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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