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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료나눔

개혁교회의 경험적 설교의 능력 - 조엘 비키

김재윤 | 2004.01.23 09:46
               개혁교회의 경험적 설교의 능력
              (The Lasting Power of Reformed Experiential Preaching)
                                                Dr Joel R. Beeke /서창원 목사 역

필자가 미국 군부대에 군무하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아주 큰 흑인 중사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보게, 만일 자네가 전쟁하러 나간다면 전쟁터에서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이 세 가지가 있네. 첫째는 어떤 전술을 사용할 것인가? 둘째는 전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이것은 보통 어떻게 전쟁을 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셋째는 전쟁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중사는 필자에게 싸움에 임한 경험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의 세 가지 요점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경험적인 것이 되게 하며 우리의 설교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좋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본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다섯 가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그 질문들은 개혁 교회의 경험적 설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① 경험적 기독교 및 경험적 설교란 무엇인가?
② 설교에 있어서 경험적 요소는 왜 필요한 것인가?
③ 경험적 설교의 본질적인 특성들은 무엇들인가?
④ 목사는 왜 경험적인 사역자로 준비되어야 하는가?
⑤ 경험적인 설교를 잘한 선배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1. 경험적 기독교 및 경험적 설교에 대한 정의

경험적 혹은 실험적 설교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기독교 교리의 참 진리들을 어떻게 경험케 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역동적인 문제이다. 경험적(experimental)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시험하다(trial)는 것을 뜻하는 experimentum에서 나온 말이다. 그 단어는 시도하다 혹은 입증하다 또는 시험을 보다 등의 의미를 지닌 experio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 동사는 경험에 의하여 발견하는 것 혹은 아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험에 의하여 습득하게 된 지식을 의미하는 experientia라는 말로 나아가게 한다. 존 칼빈은 경험적이라는 말과 시험적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였다. 성경적 설교에 있어서 두 단어는 성경의 시금석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을 판단해야 하는 필요성을 시사한다.
경험적 설교는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진리를 알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경험적 설교를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다: 경험적 설교란 성경 진리 차원에서 문제들이 어떻게 진전되어야만 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성도 개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영역 예를 들면, 가족관계, 교회와의 관계나 주변 세상과의 관계까지 포함한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목적하고 있다.
폴 핼름(Paul Helm)교수는 경험 설교에 대하여 이렇게 저술하였다: '오늘날 상황이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다 다루는 설교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진전된 경험 신학을 요청한다. 설교는 기독교인에게 그들의 실제 경험측면에서 지침과 교훈을 주어야만 한다. 비현실적인 것을 다룬다든지, 마치 성도들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자 혹은 다른 상황에 살고 있는 자들처럼 취급하는 설교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는 설교여야 하며 성도들의 실제적 경험들, 소망과 두려움들에 온전히 공감하는 설교여야 하는 것이다'
경험적 설교는 분별력을 주는 설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 하늘나라가 열려 있는 자들과 닫혀 있는 자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분별력을 주는 설교란 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제공하며 불신자들, 회개치 않는 자들, 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교는 우리의 신앙이 경험적인 것이 되지 않는 한 멸망케 될 것임을 가르친다. 경험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집을 세울 터로서 개인적으로 경험되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마 7:22-27, 고전 1:30, 2:2).

경험적 설교는 적용하는 설교이다. 그것은 본문을 청중들의 사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단지 모양새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신앙을 조성하는 설교이다(딤후 3:5). 로버트 번스는 그러한 종교를 '사람들의 사업 터와 심장 속에 안착하게 하는 기독교'라고 규정하였다. 그 위에 원칙 하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독교는 단지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믿어야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느끼고 즐기며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종교이다'.
경험적 설교는 기독교 신앙이 성령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통해서 경험되고 맛보아져야 하며 살아져야만 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임을"강조하는 것이다(딤후 3:15). 특히 그러한 설교는 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며(요 1:1), 진리의 모든 체계가 경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며 품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설교는 죄인들로 하여금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해야할 필요성을 선포한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심과 같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안다'는 말씀은 다른 성경에서 사용된 용법과 같이 단지 피상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계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4:1에서 사용된 단어는 결혼적인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경험적 설교는 이처럼 아주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식은 성경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이사야 8:20절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신앙이 경험을 포함하여 반드시 성경을 좇는 것이라야 함을 말씀한다. 마틴 루터는 '만일 나의 경험들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아니라면 그 경험들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험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참된 의미인 것이다. 과학적 실험이 가정들을 여러 증거들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경험적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의 빛 안에서 경험들을 점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근거하고 있는 개혁교회 경험적 설교는 인간 중심적이기보다는 하나님 중심적 설교이다. 몇몇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경건한 경험들을 위한 그들의 열정에 있어서 지극히 사람 중심적인 자들이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J. I Packer가 지적하고 있듯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영혼 속에서 경험을 조성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경험을 살피는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그리스도안에서만 삼위 하나님과 진정한 교류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은 경험적 설교가 신자들의 양심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경험적 설교가 오로지 내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만 점검하도록 이끄는 것이라면 가족관계, 교인들과의 관계 및 사회와의 관계를 함에 있어서 많은 결함을 주고 말 것이다. 그런 설교는 이기적인 것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경험적 설교는 신자로 하여금 역동적 신앙경험의 영역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선언하게 되는 타오르는 열정을 조성하는 것이다. 잘 교육받은 성도는 역동적인 경험과 선교를 위한 열정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전도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개혁교회의 경험적 설교는 기독교인의 삶 전 영역에 호소하는 것이다. 성령의 복과 더불어 이 사역은 성도의 존재 영역, 하는 일등 모든 것을 변화시켜 더욱 더 구세주를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많은 개혁교회 목사들은 19세기초까지 경험적인 설교를 주로 하였다. 1857년에 '침례교회의 원리와 실제'(Notes on the Principles and Practices of the Baptist Churches)라는 책에서 Francis Wayland는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목회 사역에 뛰어든 목사들의 태도로부터 그들의 삶의 두드러진 목적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회심케 하려는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경험적 설교에 탁월한 사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복음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인간의 영혼이 실천해야 할 것들을 많이 설교하였다. 가슴을 파고드는 진리의 능력 앞에서 죄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했다. 자신의 위험을 자각할 때 의존하고자 하는 다양한 속임수들에 대해 지적하였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진리의 성공적인 적용들을 말했다. 피난처 없는 영혼의 절망이 어떤 것인지를 말했다. 하나님에게 최종적으로 복종해야 함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중생의 기쁨과 이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영혼의 진지함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당한 비난과 핍박이 있을 때 겪게 되는 영혼의 시련을 설교하였다. 성화의 과정을 말했고, 우리를 죄 짓게 하는 사단의 간계를 말했다. 원수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길에 대해 말하였다. 배교의 위험과 배교의 증거들 또 배교로부터 회복되는 수단을 말했다...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설교자들의 유형이었다.

이상의 글은 오늘날 우리들이 종종 듣고 있는 설교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경험적 설교란 말인가!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청중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설교는 강의나 강연 혹은 사람들이 듣기 선호하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또 그러한 설교는 성경의 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주관적인 설교이다. 그러한 설교는 개혁교회가 말하는 역동적 종교가 무엇인지, 성경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이 어떻게 자신의 의를 벗겨내야만 하는지,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한 설교는 죄인이 내적으로 잠재해 있는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설교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적으로 설교되어지면 그것은 사람과 열국을 변화시키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롬 1:16). 그러한 설교야말로 지옥문에서부터 회심치 않는 한 이 문을 지나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눅 13:1-19). 그러한 설교는 천국 문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이 문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삼위 하나님과 중단없는 교제를 나누게 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동적인 경험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롬 5:1-11참고). 신자들에게 필요한 구원의 은총에 대한 표시들과 열매들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설교이다(마 5:3-12, 갈 5:22-23). 이런 설교는 신자나 불신자에게 그들의 영원한 미래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설교인 것이다.

2. 경험적 설교의 필요성

오늘날 설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경험적이라야 한다.
1) 성경이 이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문법적 및 역사적 주석에 근거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 실천적 및 경험적 적용을 포함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2:10-16에서 사도 바울은 좋은 주해는 영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건전한 주해는 새 언약 속에서만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이 있듯이 성경의 모든 본문에 대한 설교 역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마찬가지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을 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주님이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이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따라서 영적 주해는 기독론적 주해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바로 신학적 주해인 것이다.
주해는 성경의 단어들과 문법, 문단 및 역사적 정황들을 바르게 분석함을 제시한다. 경험적 설교는 해석에 있어서 그러한 측면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들, 문법적 구조, 문단 및 역사적 정황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강해 그 자체만이 설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문법적 및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하는 목사는 강의나 강론에 그치고 말지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말씀은 반드시 적용되어져야 한다. 이 적용은 개혁교회 설교의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역동감이 소멸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어떻게 경험적으로 설교할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있다. 그는 팔복을 통해서 참된 하늘나라 시민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함으로써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 팔복은 또한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요약인 것이다. 첫 세 가지 복(영적 빈곤, 탄식함 및 온유함)은 신자들의 내적 특질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네 번째 복(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은 경험적 신앙의 고동소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 가지 복(자비와 마음이 청결함, 화평케 함, 핍박을 받음)은 이 세상가운데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팔복은 참 경건의 표시들을 나타낸다. 예수의 설교가 상기시켜주는 것은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은혜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2) 참 기독교는 단지 개념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종교가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교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동감 넘치는 경험들과 연관되어야만 한다. 고난의 경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로마서 5:3-5절 말씀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인내가 경험을, 경험이 소망을 이룬다고 번역되어 있다, 역자 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경험을 성화시키는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과 연계된 중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서신들은 경험적 진리들로 꽉 차있다. 예를 들면 로마서 7장은 인간의 타락이 신자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듦을 보여주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8장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진리의 고상함을 보게 하고 있고 성령께서 그 모든 위로와 영광을 계시하여 줌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적 설교는 살아 있는 교회의 위로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목사가 이사야 40장을 경험적인 것을 강조함이 없이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히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경험적이지 못한 설교는 성도들에게 생명과 능력과 위로를 제공할 수 없다. 그런 설교는 이 본문에서 이사야가 탁월하게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할 수 없다.

3) 경험적 설교 없이는 우리가 영원히 멸망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가지고 믿음을 가진다거나 혹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경험적인 것이다. 우리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우리의 집을 세우지 않는 한(마 7:22-27) 우리의 소망의 집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몇몇 설교자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경험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1:30, 2:2)

3. 경험적 설교의 특성

경험적 설교는 다음과 같은 특질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설교의 중심이다. 설교는 성경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본문에서 바른 주해와 해석의 원칙에 일치하는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교회에 설교자들을 세우시면서 "지식과 명철로 양들을 양육하는"것이다. 합당한 설교는 본문에 경험적 요소를 첨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본문으로부터 신자들의 참된 경험을 도출하는 것이다. 목사는 순전한 말씀의 젓을 가져와야 한다. 그리하여 성령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경험적 설교가 참 성장을 육성케 하는 것이다(벧전 2:2, 롬 10:14).
말씀이 중심이 된 설교는 비성경적인 신비주의로부터 경험적 설교를 보호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에 비해 역사적 개혁교회 확신은 말씀 중심, 하나님의 영광 중심, 성령의 역사를 경험케 하는 기독교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 유형의 설교야말로 교회의 건강과 번성에 본질적인 것이다.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의 말씀의 수단에 의하여 교회를 낳으시고 번성케 하시는 것이다'(렘 1:18).

2) 분별케 한다.
신실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여 고귀한 것과 사악한 것을 분리케 한다.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망과 생명을 분별케 하며, 율법과 복음을 구별케 한다. 은혜는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된다(마 13:24-30).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와 표시들 및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시고 있는 은혜의 열매들은 선택된 자들을 격려하도록 설명되어져야 한다. 위선자의 거짓된 소망이 무엇인지 들춰내야 하는 것이다.
성경적 경험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사이에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무엇을 하시는지를 강조한다. 빌립보서 2:13절 말씀과 같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일 하심과 은혜의 표시들과 열매들은 참된 기독교를 위하여 인간이 영광을 받는 것이 비일비재한 이 시대에 비판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참 신앙과 위장된 신앙을 구별할 수 있도록 은혜의 참 열매들을 설교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고린도 후서 13:5절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또 야고보서 2:17절에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3) 경험적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일상적인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며 진전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로마서 7-8장).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지시함이 없이 삶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영적 순례의 길을 감에 있어서 진척을 이루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멈추어버리도록 만들뿐이다. 그런 설교는 성도로 하여금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라도록 힘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벧후 3:18). 그러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것보다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께서 그들 마음속에서 일하시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것으로부터 좌절케 한다.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은혜의 표시들과 열매들은 내게 너무 높은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 성도는 이 두 가지 다 필요한 것이다. 자기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인하여 절망하지 않도록 격려받는 것이 필요하다(히 4:15). 동시에 그의 영적 순례의 길을 다 마쳤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경고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도록"(빌 3:14) 촉구 받아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군사이다. 악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0-20). 경험적 설교는 성도를 전쟁터에 내보낸다. 어떻게 싸울지를 제시하며 어떻게 이길지를 제시한다. 사소한 것들을 어떻게 피할지를 말한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성도에게 기다리고 있는 승리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4) 내적 지식을 강조한다.

옛 선진들은 기독교 신앙을 머리로 아닌 지식과 가슴으로 아는 지식의 차이를 구분하기를 좋아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은 참된 기독교에 충분한 것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는 가슴으로 아는 지식도 필요로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하였다(롬 10:10).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어떤 목사가 하루는 자기가 쓴 책이 팔리는 책방에 갔다고 하자. 책방 주인은 그 목사에게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말하자 책방 주인은 자기도 저자를 어느 정도 면식이 있다고 말했다. 그 목사는 그것을 반박하였다. 책방 주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왜 반박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목사가 답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 저자를 안다면 내가 이 책방에 들어올 때 나에게 인사를 했을 것이오'라고 했다.
그 책방 주인이 저자에 대하여 아는 것은 단지 머리로 아는 것뿐이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자를 진짜 몰랐던 것이다. 그 저자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그 저자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저자에 대한 그 주인의 지식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자와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얻어진 지식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장을 진실된 것으로 마들 수 있는 마음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으로 아는 지식은 성령의 놀라운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개인적으로 만나는 교통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러한 지식은 심령을 변화시키며 하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을 즐거워한다(욥 34:9, 시 34:7, 사 58:14).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들과 타락한 자들, 지옥에 갈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며 맛보는 것이다(시 34:8). 마음으로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를 맛보고자 하고 소화시키고자 하는 식욕을 포함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듯이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나이다"(렘 15:16). 마음으로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그의 말씀을 즐거워 한다. 그의 진리와 그의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다(시 144:15, 146:5).
마음으로 아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지식은 마음으로 아는 지식이 없다(롬 10:8-21). 몇몇 사람들은 기독교를 연구 주제로 혹은 자신의 마음을 관통하도록 허용함이 전혀 없이 자신들의 양심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만 삼고 있다. 그러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함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정죄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경험한 구원에 대한 참 감격이나 감사하는 마음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들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죄짐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구세주를 통한 구원의 은총이 가슴에 차고 넘쳐 감사의 마음과 함께 빛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혁교회 선배들, 청교도들 대부분은 아주 공부를 많이 한 자들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교육의 가치를 강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육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압도된 교육이어야 하며 심령에 적용되는 것이라야 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내적인 사람에게 적용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무익한 것이 된다.

5) 경험적 설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요 1:29,36).

고린도 전서 2:2절에 따르면 참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어야 한다. 윌리암 퍼킨즈 목사가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설교의 중심은 '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to preach one Christ, by Christ, to the praise of Christ).
그리스도는 모든 설교의 시작과 중간 및 끝이어야 한다(눅 24:27, 행 5:5,35, 요일 1:1-4). 설교는 죄인의 심령을 깨우고 의롭게 하며 성결케 하고 위로하는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라야 한다(엡 5:4, 고전 1:30, 사 61:2).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듯이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4,14, 시 36:9, 119:130 참고)
경험적 설교는 롤란드 힐 목사가 말한 설교의 세가지 'R'을 강조하는 것이라야 한다. 타락에 의하여 파괴됨(Ruin by the fall),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Righteousness by Christ), 성령의 중생함(Regeneration by the Spirit)이 그것이다. 경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경험할 수 있는 측면에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빌 1:6). 그리스도는 참된 경험이 우뚝 서게 하는 신적 지레받침이다.
경험적 설교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불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비록 죄책감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지라도 그렇지만 여전히 비판적이다. 성령의 후견하에서 죄책감과 비참함은 우리를 구세주께로 인도하며 그곳에서 '예수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발 앞에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6) 경험적 설교의 목적은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과 중보 사역을 인하여 그리고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보존하시는 사역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목사의 목적은 삼위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도록 돕는 것이다.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는 '나는 삼위 하나님 중 어떤 분을 가장 사랑하는 지 알지 못하나 나는 그 분들 모두 필요하고 삼위 하나님 전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경험적 설교는 구원의 모든 축복에 대하여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적 소명, 중생, 믿음, 칭의, 성화 및 성도의 견인 등에 있어서 전적인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경험적 설교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구분한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높이는 설교이다(요 3:30). 이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매일 경험하도록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만큼 나은 간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출 33:13). 또는 수키 할리(Sukey Harley)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나를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된 성도의 경험 진수이다(렘 9:23-24, 요 17:3 참고).

4. 경험적 설교 사역을 위한 준비

참된 경험적 사역을 경건한 경험적 삶과 분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사의 심령의 성화는 단지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사역자로서 소명과 개인적인 삶을 위하여 경건생활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의 마음과 개성 및 삶이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과 일치되지 않아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예수께서는 선포하고 가르치는 내용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정죄하였다. 그들의 말과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하여, 그들이 전문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행동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신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통렬한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라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향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2-3). 목사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의 사적 교제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집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거룩히 감당해야 할 자이다. 우리의 양무리들 가운데서 목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마치 강단에서 하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명과 삶, 우리의 신앙고백과 실제에 있어서 어떤 분리도 있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한 성도로서의 인간적인 삶의 특성과 목사로서 열매가 풍성한 사역에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7:17-20). 목사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심령의 성결케 하는 몫만큼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건전한 경험적 설교와 교리의 선포만이 아니라 거룩한 삶과 함께 하나님의 집을 바로 세워가도록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우리의 삶을 규정해야 하며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설교를 치장하는 것이라야 한다. 존 보이스는 '최상의 삶을 사는 자가 최고의 설교를 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삶을 사는 자라야 한다. 본문에 자신의 삶을 적용할 뿐 아니라 우리의 본문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심령은 우리의 설교 사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 오웬 목사가 경고한 것처럼 '만일 사람이 옳게 가르치고 구부러지게 생활한다면 낮에 세우는 것보다 밤에 무너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5. 경험적 설교자로부터 배우는 교훈들

옛 경험적 설교자들은 참 진리의 말씀을 자신들의 심령에와 다른 사람들의 심령에 작용하는데 탁월한 전문설교자들이었다. 다음의 내용들이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작용될 교훈들이라고 본다.

1) 하나님과 가까운 삶을 살라. 여러분은 개혁주의 경험적 설교를 모방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의 개혁주의 경험적 설교를 모방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경험적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설교를 한 대로 살지 않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에 목사들은 기독교야말로 진짜 종교이며 경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경건한 삶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고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고 있는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경건의 고동소리가 들려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 성령을 의존함으로 경건 생활을 추구하라. 경건 생활의 방식은 놀랍게도 간단하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길로 가야한다(미 6:8). 은혜의 수단을 근면하게 사용하라. 영적 훈련을 사용하라. 성령의 복을 사모하라. 경건 생활은 훈련과 은총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시하라. 의무와 은혜를 강조하는 이것은 개혁주의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경건한 삶을 사는 경험적 사고의 핵심이다. 존 플레발은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의 것일지라도 경건한 삶의 의무는 우리의 할 일이다. 자연인은 능력이 없고 은혜를 받은 자만 충분한 것은 아닐지라도 약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도우시는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존 오웬 목사도 '모든 성도들을 즉시 성결케 하고 그들 속에 있는 모든 거룩의 저자는 성령이시다'라고 말했다. 성령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을 향하여 진력하게 되며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플레발 목사가 말한 것처럼 '거룩한 수단과 의무들을 근면 성실하게 사용함으로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하나님과 달콤하고 자유스러운 교제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오웬 목사의 조언에 의하여 격려를 받는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을 더 확대하시려면 초자연적인 헌신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일상적인 헌신을 극대화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개혁주의 경험적 설교자들은 종종 청중들에게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기독교 신앙을 조성케 하는 영적 훈련에 게을리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특히 이렇게 조언하고 있다:
① 성경을 읽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리차드 그린함 목사는 '사람이 숨겨진 보물을 캐내는 것보다 더 근면 성실하게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 근면 성실함은 거친 장소를 평평케 하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하며 맛이 없는 것을 맛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은 후 우리는 우리의 심령과 삶을 세밀히 살피도록 빛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읽은 말씀을 묵상하라. 성경을 묵상하는 훈련된 자세는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묵상은 예배도 자신을 위한 하나의 훈련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우리의 지정의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의 감촉을 통해서 성경에 젖어들게 한다. 묵상은 헛되고 악한 생각을 막아준다(마 12:35). 매일의 삶을 위한 지침(잠 6:21-22)을 포함한 내적 자원들을 제공한다(시 77:10-12). 묵상은 유혹을 물리친다(시 119:11,15). 고난을 극복케 한다(사 49:15-17). 묵상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시 145:7)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49:3).
    
②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은밀한 기도 시간을 가지는 습관을 간직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거룩한 논의를 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 제단에 굳게 매달리는 것으로서 이 약속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굳게 붙들게 하는 것이다. 기도하기를 실패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몰락하는 원인이다. '기도 없는 가정은 지붕이 없는 집과 같아 하늘의 모든 폭풍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토마스 부룩스 목사는 지적하였다. 만일 교회 역사의 위대한 거인들이 우리를 왜소한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교육을 잘 받았고 더 헌신적이고 더 충실한 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탄원하는 영을 소유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다니엘과 같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내적 기도의 처소를 가지고 그 장소에 밀착된 자가 되라. 그것이 경험적 기독교 신앙을 세우거나 아니면 부서지게 할 것이다. 기도의 내적인 능력이 없이 기독교의 껍데기로 만족하지 말라.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졸음이 찾아오면 큰 소리로 기도하라. 또는 우리의 기도문을 기록해 보아라. 아니면 밖에 조용한 곳을 찾아 걸으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말라. 정기 기도 시간을 빼먹지 말라. 가장 사소한 것들조차도 기도하려는 열린 자세를 가져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와 교통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침체와 배교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약인 것이다. 기도 없는 좌절감은 병균에 쉽게 전염되어 버리지만 기도가 뒷받침되는 좌절감은 길리아드의 향유(치료약, 역자 주)를 바르는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의 삶에 있어서 기도하는 것을 가장 우선권으로 삼아라. 존 번연은 '기도한 후 더 기도할 수 있지만 기도했을 때까지는 기도하는 것 보다 더 기도할 수는 없다...종종 기도하라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방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에게 가하는 응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③ 개혁주의적인 경험적 서적들을 많이 독서하라.
경건한 삶을 조성하는 책들은 경험적 삶을 살도록 힘있게 도와준다. 영적 고전들을 읽으라. 여러분의 영적 모델과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위대한 저술가들을 청하라. 그런 부류에 있어서 청교도들 작품들은 가장 위대하다. 모리스 로버츠 목사는 '어떤 측면으로든지 영적 삶을 풍성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청교도들의 설교나 논문, 소책자, 일기, 역사, 혹은 전기가 아닌 것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다양한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건전한 경험적 책들을 섭렵하라. 죄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영적 삶을 융성케 하는 책은 Ralph Venning의 전염병 중의 전염병(Plague of Plagues)을 보라.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이끌림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삭 암브로스가 쓴 예수를 바라보라(Looking unto Jesus)를 읽으라. 유혹을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는 존 오웬의 유혹과 죄라는 책을 보라. 거룩하게 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존 플레벨 목사의 마음을 지키라를 읽으라.
예배에 관한 책을 읽으라(제레마이어 버러스가 쓴 예배의 타켓을 복음에 맞추라는 책이 진리의 깃발사에 출간되었다, 역자 주).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 속으로 진입케 하는 책을 읽으라. 그리하여 여러분이 성령과 진리로 삼위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가 되게 하라. 그러나 여러분이 읽을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선별해야 한다. 성경을 더 깨닫게 하는 책들을 읽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서적들 중 상당수가 알미니안 신학이나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내용들이다. 무의미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나 아깝다. 잠시 있을 동안의 것보다 영원한 것에 관한 책을 더 읽으라. 단지 지식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위한 책을 읽으라. 존 트랍 목사의 경고를 들어보자: '물이 흘러가고 있는 흙 맛을 보듯이 책을 읽는 사람도 그 책의 저자의 맛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사기 전에 이 책을 그리스도께서 인준해 주실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도록 도움을 주는 책일까? 죄를 정복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장차 도래할 세상을 위하여 준비케 하는 책일까? 혹은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을까 등등의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읽은 좋은 책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라. 경험적인 책을 나누는 대화는 경험적 삶을 조성하는 것이다. 경험적 책들과의 대화는 경험적 삶을 조성하는 것이다.

④ 성례를 바르게 사용하라.
하나님의 성례는 그의 말씀을 보충한다. 성례의 각각 요소들, 물과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희생제물을 경험케 하는 기본이다. 성례는 가시적 수단으로써 이것을 통하여 우리와 그리스도가 교통한다. 그것들은 그의 모든 거룩함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가 되게 한다. 성례를 통하여 받는 은혜는 말씀을 통해서 받는 은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로버트 부르스 목사가 지적한바와 같이 '말씀에서보다 성례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소유하지 못하게 되지만 때로 더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되기도 한다'.
⑤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라.
'성도의 교제를 사도신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의 동료들과 교제가 있어야 한다'고 토마스 왓슨 목사는 말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조언이다. 교회는 기도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여야 한다(고전 12:7, 행 2:42). 따라서 다른 경건한 성도들과 대화하며 기도하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골 3:16). 서로 관련을 맺는 것은 서로 동화하게 만든다. 홀로 고립되어 사는 교인은 경건한 자들과 교제를 통하여 얻는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⑥ 저널을 간직하라.
여러분의 영적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겨라. 그것이 경건한 삶을 조성한다. 그것은 우리의 묵상과 기도를 돕는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일하심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판단을 돕는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점검케 하고 우리의 영적 훈육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선권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피게 한다.
  
⑦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
우리는 안식일을 즐거운 특권으로 인지해야만 하지 힘겨운 짐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이 날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요 어떤 방해받음도 없이 영적 훈련을 실천하는 날이다. 제이 아이 팩커가 지적하듯이 '이 날에 우리의 땅위의 소명으로부터는 쉬고 하늘의 소명에 충실히 종사하는 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⑧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라.
예수께서는 전도하기를 원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마 28:9-20, 히 9:14).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신 13:4).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삼상 12:24). 기쁨으로 해야 한다(시 100:2). 겸손함으로 해야 한다(요 13:15-16), 그리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갈 5:13).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때로 힘들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임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여해 주신 모든 은사를 사용하여 그렇게 하라(롬 12:4-8, 고전 12:6-11 엡 4:7-13). 성도로서 우리가 받는 위대한 상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람들을 성령의 함께 하시는 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수고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다 바랄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겸손하게 다가가게 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3) 균형 잡힌 사고방식을 배운다.

위대한 개혁주의 경험적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균형 잡힌 삶을 목적하였다.
① 기독교에 대한 주관적 및 개관적 사실에 대한 균형 잡힘. 객관적인 사실은 주관적인 사실을 위한 양식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것은 항상 객관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교도들은 확신의 우선적인 기초는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런 약속들은 은혜의 주관적인 증거들과 성령의 내적 증거들을 통해서 성도에게 사실로 부각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적용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들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되며 인간적인 추측만 있을 뿐이다. 한편 하나님의 약속들과 성령의 조명함이 없이는 자기 점검은 자기를 분석하고 속박시키며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많다.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기독교는 서로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객관적 사역과 수동적인 순종에 기초로 하는 그리스도의 내적 임재하심을 계시하는 측면에서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객관적인 진리로 선포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성령의 의하여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내적 감사와 함께 적용되어져야 하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말씀으로부터 주관적인 경험을 분리시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람 중심의 신비주의로 전락시킨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혹은 현상적 믿음의 거짓된 근거를 가지고 구원을 추측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②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문제를 균형있게 하라
거의 대부분의 개혁교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권적이시며 인간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는 우리의 머리를 뛰어넘는 문제이다. 스펄전 목사가 이 두 성경적 요소를 어떻게 화해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답하기를 '그 두 친구에게 화해가 필요한지 나는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이 두 교리를 두 철로와 비교하여 기독교가 그 위에 달려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기차의 철로와 같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함께 존재하듯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동시에 강조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곳에서는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에서 이 두 교리를 병합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조점을 따라 사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공정하게 다루는 경험적 기독교를 추구해야 한다.    

③ 교리와 경험 및 실천적 요소를 균형있게 하라
개혁교회 설교자들이 가르친 것처럼 경험적 설교는 교리와 적용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독교인의 삶은 경험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인의 삶은 건전한 교리와 건전한 경험 및 건전한 실천에 근거하고 있다.

4) 경험적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
개혁교회의 경험적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사람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켰다. 그들은 모든 성경을 전인에게 다 적용하였다. 그들의 설교는 교리적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설교로부터 어떻게 전도할 것인지를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종종 하나님의 존엄하신 존재성, 삼위의 인격성, 그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에 대하여 대화하고 있는가? 그의 거룩에 대하여, 주권에 대하여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의 전도사역에 튼튼한 성경적 신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맞추어 주는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하게 만드는 현대 전도방식을 본받고 있는가? 얼마나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속성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사실로 다가오는지 경험적인 것이 됨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② 인간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
여러분은 우리의 전적 타락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결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의 은혜를 떠나서 볼 때 우리 모두는 무시무시한 전과를 지닌 죄인들이다.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에서 나뿐 심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무서운 위력 혹은 특질을 말하는가? 그 죄는 우리의 비참한 타락이 아담의 타락에서 기인한 것이며 우리의 전 인격에 다 오염시킨 것임을 말하는가? 우리의 지성과 마음과 의지와 양심을 다 죄의 종이 되게 함을 말하는가? 여러분은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덕적 반역임을 말하는가? 죄의 삯이 사망임을 말하는가?

③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라
여러분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온전히 선포하는가? 여러분은 죄의 엄청난 사악함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책으로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가? 그리스도의 능력과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사랑, 잃어버린 죄인들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과 회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다(행 20:20-21).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마다 여러분의 친구와 이웃에게 그런 방식으로 전도하십니까?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며 회개가 무엇인지 중생한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십니까?
  
④ 성화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
여러분은 감사한 마음과 섬기는 마음, 순종과 사랑 및 자기 부인하는 자세로 거룩한 왕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말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도가 어떻게 묵상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지, 어린아이처럼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말미암아 부르심과 선택을 굳게 하라고 말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동료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경험적인 신앙과 회개 및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십니까?
⑤ 영원한 최후에 관한 진리를 말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멸시하는 자들의 최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지옥과 정죄 받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삭제하지 마라. 한 청교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막대기를 가지고 가야만 한다. 그러면서 죄인을 숨기고 있는 모든 수풀들을 다 내려치며 가야한다. 마치 자기를 숨긴 아담이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까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급하게 이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율법과 은혜를 목도하게 해야 한다. 아담 안에 있는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목도케 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와 경험적 삶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무기를 사용하여 죄인들을 멸망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라. 우리는 성경과 경험을 통해서 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고에 복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을 안다. 죄인의 사악한 욕망으로부터 건져주심을 안다. 그의 악한 길을 기꺼이 버리게 하고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돌이키게 하심을 안다. 이제 인생의 목적과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하심을 안다. 사도행전 5:3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경험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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