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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피해갈 수 없는 신앙의 문제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C.S. 루이스/홍성사/최명훈
C. S. 루이스는 늦은 가을 다시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잘 재단된 정장차림으로, 진지하고도, 진실한 모습 그대로 [고통의 문제]를 들고 천천히 소리없이 다가왔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햇살이 아침에서 저녁을 비추듯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옥한흠목사님의 [고통에는 뜻이 있다]란 설교집은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도 하고, 필립 얀시의 고통의 주제를 다룬 책들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붙들고 있다. 성경의 욥기는 대표적인 인생이 겪는 대표적인 고통의 문제를 다룬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저서들에서 다루어왔던 고난의 문제, 과거, 현재, 미래의 고통을 알고 느끼는 인간만의 문제를 루이스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만의 독특한 논리적인 접근으로 파헤치고 있을까? 이 책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인간의 누미노제경험을 통해 선하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내며 이러한 전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선함, 인간의 악함, 인간의 타락, 인간의 고통 I, 인간의 고통 II,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으로 맺고 있다. 서론에서 불신자시절 자신이 믿었던 우연히 생긴 우주는 결국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여 저온의 동형동질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비관론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결정적으로 그 무의미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자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겠냐는 점에 있어선 답변이 궁하다.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더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논증하며, 그 유추의 배경에는 누미노제의 종교적 심성이 인류에게 존재함을 증명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를 결국 이끌어낸다.(pp. 22-3) 루이스는 이에 대한 증거로 수많은 고전 문학작품에 나타난 인류의 누미노제의 경험을 제시하였고, 도덕과 누미노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의 두 번째 요소는 단순히 도덕법만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도덕법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경험적 사실로부터 추론해 낸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을 해서 아는 것이지, 경험적 사실들 속에서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p. 30) 루이스는 인류는 자연스럽게 누미노제의 경험을 통해 도덕의 개념을 유추해 내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곧 인간으로 하여금 혼란과 무질서해 보이는 우주에서 선한 창조주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본론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전능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피조물과 창조주로서의 문제로 이해하여 변증을 시작한다. "인간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하나님의 자유는 여러 대안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중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선은 추구할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한 지혜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 가장 알맞은 수단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바로 그 자신의 선함을 뿌리삼아 자라며 그 자신의 전능을 대기 삼아 꽃핀다는 것입니다."(p. 51) 사람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자유의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 주제를 옮겨간다. 이것은 신정론(神正論)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함과 우리의 선함은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완벽한 원과 아이가 처음 그린 바퀴 그림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p. 58) 하나님의 선하신 기준을 통해 인간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의 기회를 얻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하나님의 선은 사랑으로 궁극적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결핍된 선이 아닌 완전한 선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선이십니다. 그는 선을 주시는 분이지, 선을 필요로 하거나 어디서 얻어 와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본질상 끝없이 이타적인 것으로서 모든 것을 주되 아무것도 받지 않는 사랑입니다."(pp. 73-4) "그는 없는 행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될 것이냐,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함에 반응함으로써 그의 선함을 공유하며 그를 닮은 존재가 될 것이냐,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냐, 우리는 이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p. 79) 신정론의 문제를 논의한 후 그는 곧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바로 인간의 악함과, 타락, 고통의 문제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아주 악해졌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워낙 잘 아려진 바이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현대인, 심지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생생하게 실감시키기는 아주 어렵습니다."(p. 83) 그것은 두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친절, 자비만 강조하여 스스로를 비교적 의인으로 여기는 점, 두 번째는 정신분석학의 대중화로 억압, 억제이론을 통해서 죄에 대한 개념을 무능화 시키는 점이라고 루이스는 지적한다. (pp. 84-5) "죄의 옛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당연히 여기셨습니다."(p. 86)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악함은 타락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고통을 낳았다는 논리적 귀결로 전개된다.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단순히 결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피조물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서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은 개심(改心)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악인에게 제공해 줍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p. 144)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인간의 범죄와, 죄악의 문제는 정치체계나 도덕, 혹은 고상한 철학이나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머지 세 장은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이다. 이 세 장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의 지옥교리는 현대인의 발목을 잡는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가!" 이러한 항변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유효한 답변이다. 그러나, 회개치 않는 인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가 문제가 된다. 루이스는 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묵과와 용서를 혼동하는 데서 나온 태도입니다. 악을 묵과하는 것은 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악을 선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용서를 베푸는 쪽뿐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용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p. 187) 동물의 고통에 있어서는 몇가지 주의점을 제시한다. 동물들이 겪는 고통을 쉽게 의인화하여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적용시키지 말라는 점,(p. 205) 동물은 인간처럼 불멸의 의식,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불멸한다고 가정하는 데 진짜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문제는, 이미 설명한 대로 '의식'이 없는 피조물에게는 불멸이라는 것이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은 천국이다. 루이스는 단순히 지옥에 대응하는 보상개념으로 천국을 놓는점에 대하여 반대한다.(p. 223) 천국은 하늘에 있는 파이를 보며 침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채우시는 빈 구멍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은 거의 본질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드림(self-giving)- 자신을 개방하고 열어젖히며 양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복받는 영혼은 자기 속에 부어지는 빛나는 쇳물을 점점 더 많이 감내하는 거푸집이자, 영적인 태양이 정오에 내뿜는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을 점점 더 많이 드러내는 몸입니다."(p. 234)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상상하는 고래등같은 기와집, 금은보화가 깔린 환상의 도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선하심이 가득한 곳이며 우리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향인 것이다. 루이스가 제시한 고통의 문제는 단순한 신정론의 문제제기의 반복이 아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에 밝혔듯이 현대인들에게는 껄끄럽고도 촌스러운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다시금 제기하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에서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인기 없는 지옥교리와 천국교리,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보다는 오직 칭찬과 위로, 기분 좋음의 다채로운 설교단상에 차려진 변절된 기독교에 새로운 각성을 요구한다.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자는 항상 옳다."는 마케팅 전략의 노예로 기독교 강단이 전락할 것인가, 잘 팔리지도 않는 인기 없는 예례미야의 외침을 계속할 것인가는 결국 목회자의 몫이다.
C. S. 루이스는 늦은 가을 다시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잘 재단된 정장차림으로, 진지하고도, 진실한 모습 그대로 [고통의 문제]를 들고 천천히 소리없이 다가왔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햇살이 아침에서 저녁을 비추듯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옥한흠목사님의 [고통에는 뜻이 있다]란 설교집은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도 하고, 필립 얀시의 고통의 주제를 다룬 책들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붙들고 있다. 성경의 욥기는 대표적인 인생이 겪는 대표적인 고통의 문제를 다룬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저서들에서 다루어왔던 고난의 문제, 과거, 현재, 미래의 고통을 알고 느끼는 인간만의 문제를 루이스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만의 독특한 논리적인 접근으로 파헤치고 있을까? 이 책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인간의 누미노제경험을 통해 선하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내며 이러한 전재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선함, 인간의 악함, 인간의 타락, 인간의 고통 I, 인간의 고통 II,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으로 맺고 있다. 서론에서 불신자시절 자신이 믿었던 우연히 생긴 우주는 결국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여 저온의 동형동질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비관론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결정적으로 그 무의미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자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겠냐는 점에 있어선 답변이 궁하다.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더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논증하며, 그 유추의 배경에는 누미노제의 종교적 심성이 인류에게 존재함을 증명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를 결국 이끌어낸다.(pp. 22-3) 루이스는 이에 대한 증거로 수많은 고전 문학작품에 나타난 인류의 누미노제의 경험을 제시하였고, 도덕과 누미노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의 두 번째 요소는 단순히 도덕법만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도덕법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논리적이든 비논리적이든 경험적 사실로부터 추론해 낸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을 해서 아는 것이지, 경험적 사실들 속에서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p. 30) 루이스는 인류는 자연스럽게 누미노제의 경험을 통해 도덕의 개념을 유추해 내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곧 인간으로 하여금 혼란과 무질서해 보이는 우주에서 선한 창조주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본론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전능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피조물과 창조주로서의 문제로 이해하여 변증을 시작한다. "인간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하나님의 자유는 여러 대안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중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선은 추구할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으며, 완전한 지혜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 가장 알맞은 수단을 결정하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바로 그 자신의 선함을 뿌리삼아 자라며 그 자신의 전능을 대기 삼아 꽃핀다는 것입니다."(p. 51) 사람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자유의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 주제를 옮겨간다. 이것은 신정론(神正論)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함과 우리의 선함은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완벽한 원과 아이가 처음 그린 바퀴 그림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p. 58) 하나님의 선하신 기준을 통해 인간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의 기회를 얻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하나님의 선은 사랑으로 궁극적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결핍된 선이 아닌 완전한 선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선이십니다. 그는 선을 주시는 분이지, 선을 필요로 하거나 어디서 얻어 와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본질상 끝없이 이타적인 것으로서 모든 것을 주되 아무것도 받지 않는 사랑입니다."(pp. 73-4) "그는 없는 행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될 것이냐,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함에 반응함으로써 그의 선함을 공유하며 그를 닮은 존재가 될 것이냐,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냐, 우리는 이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p. 79) 신정론의 문제를 논의한 후 그는 곧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바로 인간의 악함과, 타락, 고통의 문제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아주 악해졌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워낙 잘 아려진 바이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현대인, 심지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생생하게 실감시키기는 아주 어렵습니다."(p. 83) 그것은 두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친절, 자비만 강조하여 스스로를 비교적 의인으로 여기는 점, 두 번째는 정신분석학의 대중화로 억압, 억제이론을 통해서 죄에 대한 개념을 무능화 시키는 점이라고 루이스는 지적한다. (pp. 84-5) "죄의 옛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악한 것을 당연히 여기셨습니다."(p. 86)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악함은 타락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고통을 낳았다는 논리적 귀결로 전개된다.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단순히 결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피조물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서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은 개심(改心)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악인에게 제공해 줍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p. 144)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인간의 범죄와, 죄악의 문제는 정치체계나 도덕, 혹은 고상한 철학이나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머지 세 장은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이다. 이 세 장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의 지옥교리는 현대인의 발목을 잡는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가!" 이러한 항변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유효한 답변이다. 그러나, 회개치 않는 인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가 문제가 된다. 루이스는 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묵과와 용서를 혼동하는 데서 나온 태도입니다. 악을 묵과하는 것은 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악을 선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용서를 베푸는 쪽뿐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용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p. 187) 동물의 고통에 있어서는 몇가지 주의점을 제시한다. 동물들이 겪는 고통을 쉽게 의인화하여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적용시키지 말라는 점,(p. 205) 동물은 인간처럼 불멸의 의식,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불멸한다고 가정하는 데 진짜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문제는, 이미 설명한 대로 '의식'이 없는 피조물에게는 불멸이라는 것이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은 천국이다. 루이스는 단순히 지옥에 대응하는 보상개념으로 천국을 놓는점에 대하여 반대한다.(p. 223) 천국은 하늘에 있는 파이를 보며 침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채우시는 빈 구멍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은 거의 본질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드림(self-giving)- 자신을 개방하고 열어젖히며 양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복받는 영혼은 자기 속에 부어지는 빛나는 쇳물을 점점 더 많이 감내하는 거푸집이자, 영적인 태양이 정오에 내뿜는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을 점점 더 많이 드러내는 몸입니다."(p. 234)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상상하는 고래등같은 기와집, 금은보화가 깔린 환상의 도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선하심이 가득한 곳이며 우리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향인 것이다. 루이스가 제시한 고통의 문제는 단순한 신정론의 문제제기의 반복이 아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에 밝혔듯이 현대인들에게는 껄끄럽고도 촌스러운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다시금 제기하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에서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인기 없는 지옥교리와 천국교리,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보다는 오직 칭찬과 위로, 기분 좋음의 다채로운 설교단상에 차려진 변절된 기독교에 새로운 각성을 요구한다.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자는 항상 옳다."는 마케팅 전략의 노예로 기독교 강단이 전락할 것인가, 잘 팔리지도 않는 인기 없는 예례미야의 외침을 계속할 것인가는 결국 목회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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