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셀러
요란하지 않으나 역동적인 기도를 원하십니까?

나는 이 책으로 인하여 한 번도 주목해보지 않았던 무용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몸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아주 작은 몸짓에서 매우 크고 아름다운 몸짓까지가 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되며 기도가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영성을 말하면서 열정적으로 외쳐볼지 아니면 깊이 침잠해볼지 생각하게 되는데, 외치지도 침잠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몸짓 혹은 역동적 몸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책들이 영성신학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야말로 영성이 진정 어떤 느낌인지를 가르쳐주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저자 실레스트 스노우버(Celeste Snowber)는 자신이 책 속에서 여러번 말하고 있는 대로 간단하게는 무용을 하는 사람이고 자세하게는 예술무용가요, 그래서 영성연구가요, 교육학자이다. 그런데 분야가 무엇으로 불리든 그녀는 무용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말한다. 무용을 근거한다기보다는 몸짓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고,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안에서 내 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자신의 세계를 세워나가는 사람이다. 교회의 기도와 예배는 너무 말과 이성에 의지한다. 외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여간 개념이 결부된 말로 되어있다. 스노우버가 말로 하는 기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그녀가 이 책에서 인용한 시인 예이츠(W.B.Yeates)의 다음과 같은 말에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두뇌로만이 아니라 몸 전체로 느껴 마음에 품게 되는 생각들만을 믿는다". 말이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라, 점차 우리는 그것이 몸에 같이 느껴지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 신앙생활은 겉돌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딘가 김이 빠져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몸으로 드리는 기도'가 요청된다. 스노우버가 실례로 들어놓은 트리푸디움(tripudium)을 한 번 이야기해 보겠다. 적게는 서너명에서 많게는 백명 이상의 사람까지 적당히 열을 지은 다음에 스탭을 밟으면서 원을 그리며 돈다. 앞으로 3보 뒤로 1보 4박자를 단위로 단지 스탭을 밟는 것이다. 내 손은 앞 사람 어깨 위에 올라가 있다. 아마도 4박자에 맞는 노래를 같이 하면서 돌게 될 것이다. 나는 집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이 스탭을 밟아보았는데, 재미있었다. 매우 단순한 동작이다. 그러나 그 동작이 옆에 있는 사람과 공동체에로 연결되고, 당연히 하나님께로 연결된다. 내 내면에 있는 역동성의 하나님이 느껴진다. 그러면 이런 역동성에 대해서, 이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우리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느끼면 된다. 저자는 이것을 몸동작이 가진 은유성이라고 표현하였다. 정말 어떤 황홀감을 주었기 때문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항목을 찾아보았더니 아마도 희랍정교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사진이 떠 있었다. 백명을 훌쩍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의 홀에 둘러써서 바로 그 네 박자의 스탭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찬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군중들 속에는 기쁜 마음으로 딸과 함께 걷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이런 것이 몸으로 드리는 기도로구나 하며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몸으로 드리는 기도가 성경적으로도 아주 풍성한 지지를 받는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언약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염치불구하고 기뻐 뛰놀았던 것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바, 약간은 황홀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그 어디엔가 아주 명백히 역동성이 자리잡고 있는 그런 움직임을 구약시대 사람들은 많이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춤춘다는 말이 나오지만 그 춤추는 것도 어깨춤을 추는 것도 있고, 빙글빙글 도는 것도 있고, 풀쩍 풀쩍 뛰어오르는 것도 있고, 또 비교적 잠잠하지만 충만이 있는 그런 움직임들이 구약시대에는 다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시대라고 해서 안 그런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말씀하면서 저자거리에서 춤추는 것과 관련한 비유를 하셨다. 예를 들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예수님 특유의 한 춤이었다고 평가한다. 몸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선은 기도가 무엇인지 아주 깊이 느끼게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둘째로는 기도의 역동성과 함께 삶 전반의 역동성을 얻게할 것이다. 이 역동성은 나 안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로 나아가서 활력있는 공동체성을 얻게 할 것이다. 영성이라는 말은 있지만, 기도 프로그램도 활력적인 기도 인도자가 없으면 어렵고, 이렇다할 프로그램도 없는데, 이 몸으로 드리는 기도는 자꾸 한 걸음 한걸음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기도를 느끼고, 내 몸을 느끼고, 역동성을 얻고, 공동체를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몸으로 드리는 기도에서는 일어난다. 저자는 실제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공동체적 몸동작을 마지막 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아주 수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영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나로서는 몸으로 드리는 기도의 기초가 될 만한 몸동작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 전문가를 찾아볼 생각도 한다. 기도를 말하고, 영성을 이야기할 때 꼭 같이 해야되는 한 분야로서 몸동작과 춤으로서의 기도가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쁨이다.
저자 셀레스트 스노우버(Celeste N. Snowber) 예배 무용 예술가이며 작가이자 교수이다. Southeastern Massachusetts 대학에서 학사(B.A.)를, Gordon Conwell 대학에서 신학으로 석사(M.A.)를 받았으며, 몸으로 드리는 기도, 춤, 영성 그리고 예술에 관한 분야에 관한 워크숍을 이끌고 있다. Regent 대학의 학제간 연구와 영성 신학 분야의 교수를 역임하였고, 브리티시컬럼비아 Trinity Western 대학의 예술 학과에서 가르쳤다. 현재 Simon Frazer 대학 교육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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