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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영혼의 대적, 죄에 대한 총체적 지도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존 오웬/김귀탁/부흥과개혁사/권지성
br>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
존 오웬은 본 저서에서 불굴의 진리를 위한 백전노장으로서 크리스챤의 영적 전투의오랜 적인 죄의 근원과 전략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처럼 그는 참으로 죄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싸우며 진퇴를 거듭한 끝에 그의 대적의 속성을 깨우쳤음에 틀림없다.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허울좋은 말들로 신비주의적인 굿거리 같은 행동으로 죄와 사단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 속에 있는 죄라는 나쁜 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죽여도 죽여도 없어지지 않는 영혼의 히드라는 일평생 신자를 괴롭히지만, 그 실체 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죄 덩어리 죄를 먹고 마시는 병든 인간, 영혼의 심연 속에 사단의 악을 품고 미친 세상에서 함께 미쳐가는 인간성은 모든 학문과 과학으로도 영원한 대적인 죄라는 마음의 법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홀로 분연히 죄라는 절대 악과 믿음의 거룩한 싸움을 싸우다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 믿음의 사람 존 오웬이라는 노병이 있다. 오랜 세월 죄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검으로 죄에게 치명타를 가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법과 기도의 능력으로 그 진들을 무너뜨려온 거룩한 용사중의 용사이며, 타고난 영적 싸움꾼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과 성도들의 영혼의 질병인 죄에 대해 오랜 기간 조사하고, 연구하고, 처방을 내린 영혼의 의사가 바로 존 오웬이다. 그에게 신자의 영원한 원수인 죄악의 진을 파할 수 있는 전략을 들어보자.(별도기재)
성화의 길에 대한 대안
개인적으로 본 저서를 통해 깨달은 바를 적고자 한다.
첫째,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신자를 참된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 첫 걸음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죄에게 멀어지고 범죄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요일 1). 그러나, 죄의 법은 이러한 목적을 망각하게 하고, 죄를 범해도 구원만 받으면 상관없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죄에 대해 무디어진 마음의 법은 죄의 달콤한 유혹에 타협하게 하고 변명하게 한다. 마치 죄를 짓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혹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웬은 이러한 죄의 속삭임들은 복음을 사이비 복음으로 전락 시키는 행위라고 단호히 잘라 말한다. 물론, 용서와 은혜는 존재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은혜가 있으니까,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이다.
둘째, 죄라는 적의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즉, 죄라는 적의가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신자의 영혼을 공격하고 쓰러뜨려 노예화 시키는지에 대한, 즉 죄의 무서운 본성에 대한 자각을 새롭게 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 공격에 대해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지 않기 위해 분연히 맞서서 싸우고 유혹과 게으름에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127).
셋째, 지성을 굴복시키는 죄의 영향력에 맞서 총체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좋은 것이고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이지만, 이것을 핑계 삼아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고, 다시 십자가로 나아가 용서 받겠다는 식의 논리는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과 거리가 있다 (146-8).
넷째, 죄라는 적의가 어떻게 신자를 쓰러뜨리는지 영혼에 침투하는지 그 경로를 이해함으로써, 죄의 법에 대한 대처법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영혼 속에서 죄의 힘이 은혜의 수단인 기도와 묵상을 저지하기 위해 육신의 피로함과 타협하고, 우선 순위에서 이러한 영적 밀애를 미루게 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다른 주변적인 일들로 채우게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죄라는 짐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바라며 그 분의 은혜를 얻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다섯째, 죄의 총체적인 공격과 역사를 무너뜨리는 최선의 수단으로써, 오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201-2). 갈라디아서 6:14절의 말씀에서 보듯, 불 같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며,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지성에 대한 속임과 의지에 대한 죄의 잉태를 저지한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슬픔,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저주,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 그리스도가 토설하신 외침,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 영혼 속에 쏟아 부어진 사랑,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상고합시다. 되의 더러움과 죄과와 형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와 죽음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묵상합시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우리의 마음도 그분과 함께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
여섯째, 죄의 역사를 대적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죄를 이겨야 한다. 필자는 본 저서를 읽으면서, 내 속에 여러 의지의 동의가 반복되어 죄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이미 깊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8). 반복적인 죄악은 반드시 너무나 쉽게 죄악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죄에 대한 민감함이 필요함을 다시금 인지하게 된다.
일곱째, 크리스챤의 의무를 지키는 것은 바로 영적 퇴보와 침체에서 이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웬은 여기서 “의무를 지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의무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리킵니다. 영적 권태, 즉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찾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소통의 도구인 기도와 말씀을 게을리 함으로 파생되는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의 통로인 기도와 말씀가운데 생생한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비판적 평가에 대하여
존 오웬의 저서 대부분은 읽기가 난해하고 복잡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사실 17세기의 스콜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오웬의 글들은 감성적 글귀들과 포스트 모던적인 말랑말랑한 묘사로 가득 찬 현대의 글들에 익숙한 독자들이 읽기에는 극약과 같은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비판적인 독자들은 과연 이러한 복잡한 논리 구조와 사색의 작업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이냐며 딴지를 걸지도 모른다. 필자의 한 친구는 과연 누가 이러한 복잡한 죄에 대한 사고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겠으며, 정말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청교도들과 많은 믿음의 거인들이 걸었던 죄와의 투쟁을 평가절하하는 애기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웬은 이러한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는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죄에 대한 해독제를 가지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죄라는 악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지식이 아닌 모호한 관념만을 가지게 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187).
성도들이여! 내가 질문 하나를 하겠다. 당신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두려움 혹은, 이러한 성화의 삶을 살기 싫어서 그러한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라. 놀라운 사실은 우리 시대의 대다수가 스스로 영적 대적인 죄와 화평의 관계를 선언하고 그와 친구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신자 속에 감추어진 성공의 욕구, 맘몬 신앙, 그리고 교활한 자기애라는 죄의 법을 긍정의 힘이라는 그럴싸한 에너지로 변화시키라는 메시지에 열광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메시지는 싫어하는 당신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부패한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읽어야 할 책.
약 400년 전, 존 오웬이라는 믿음의 선배에 대한 기독교 고전읽기는 2009년 교권주의와 오염된 교리로 불신자들의 돌팔매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의 모든 성도들이 읽고 회개해야 할 책임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자정 능력을 상실한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 나오는 흙탕물이 된 말씀의 꼴을 먹고 있다. 법정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목회자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듣고도 아멘 하면서 막가파식으로 추종하는 서글픈 우리 안에 든 병든 양 떼들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그래서, 신자로써 얼마나 죄악된 삶을 살아 왔는지 돌아보고 뉘우쳐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설교가들이 읽어야 한다.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특정 정당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읽어야 한다. 경제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잘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잘 될 것이라고 맘몬 신앙을 부르짖는 거짓 선지자들 목회자들이 읽어야 한다. 읽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그릇 해석하게 만들고, 성도들의 영혼을 갉아 먹게 하는 죄의 법을 깨뜨려야 한다.
셋째,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될 젊은 대학생들이 읽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소망 없는 시대라고 했다. 왜 소망 없는 시대일까? 그것은 소망 없는 젊은이들로 이 세대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할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 고시 시험, 취업 시험으로 20대에 정말 바쳐야 할 진리를 위해 정작 싸우지 않는다. 따라서, 2009년 대학 청년들에게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 청년들 마음 속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죄로부터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대학 선교 단체의 학생들 조차 참 진리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간지 오늘의 운수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입에 찰싹 달라붙는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속 시원하게 미래를 점쳐주는 스포츠 일간지의 오늘의 운수처럼 당신의 귀를 시원하게 해 주지 않는 책이 바로 오웬의 저서이다. 오히려, 죄라는 악의 존재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가련한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죄가 당신의 영혼을 침체에 빠뜨리고, 농락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지루하고 딱딱해서 잘 읽어지지 않는다. 듣기 싫은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죄의 힘을 이기기 위해 기도와 묵상에 온전히 전념하라는 소리도 듣게 된다. 그러나, 성도여! 당신은 결단하여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죽게 하고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빠뜨린 죄악과 동거동락하며 지옥의 쾌락 속에서 즐거워할 것인가? 존 번연은 신자의 인생은 친구와 함께 악한 대적들과 싸우며 천성을 향해서 가는 길이라고 묘사하였다. 칼과 지도는 이제 당신의 손에 지워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진리로 맞서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먹다 토하여 내친 것을 주워 먹을 것인 것? 두려움 속에서 용기가 필요한 자들이 있는가? 기억하라. 이 싸움은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니 오직 은혜로만 가능한 싸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 때, 백전백승하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독을 권한다.
저자 존 오웬 (Jhon Owen)
1616년 영국 옥스퍼드주 스타드햄에서 그곳 교구목사인 헨리 오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존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요, 은사받은 대 설교자요,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의 감독이요, 옥스퍼드대학교의 부총장이요, 크롬웰 경의 국목이요,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낸 저자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퀸스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고, 대학을 나와 석사학위 과정을 거칠 때쯤 이미 수많은 고전에 통달하는 한편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히브리어와 랍비들에 대한 지식에도 깊이 몰입하는 등으로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70세에 못 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심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1683년에 생을 마감했다.
br>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
존 오웬은 본 저서에서 불굴의 진리를 위한 백전노장으로서 크리스챤의 영적 전투의오랜 적인 죄의 근원과 전략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처럼 그는 참으로 죄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싸우며 진퇴를 거듭한 끝에 그의 대적의 속성을 깨우쳤음에 틀림없다.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허울좋은 말들로 신비주의적인 굿거리 같은 행동으로 죄와 사단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 속에 있는 죄라는 나쁜 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죽여도 죽여도 없어지지 않는 영혼의 히드라는 일평생 신자를 괴롭히지만, 그 실체 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죄 덩어리 죄를 먹고 마시는 병든 인간, 영혼의 심연 속에 사단의 악을 품고 미친 세상에서 함께 미쳐가는 인간성은 모든 학문과 과학으로도 영원한 대적인 죄라는 마음의 법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홀로 분연히 죄라는 절대 악과 믿음의 거룩한 싸움을 싸우다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 믿음의 사람 존 오웬이라는 노병이 있다. 오랜 세월 죄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검으로 죄에게 치명타를 가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법과 기도의 능력으로 그 진들을 무너뜨려온 거룩한 용사중의 용사이며, 타고난 영적 싸움꾼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과 성도들의 영혼의 질병인 죄에 대해 오랜 기간 조사하고, 연구하고, 처방을 내린 영혼의 의사가 바로 존 오웬이다. 그에게 신자의 영원한 원수인 죄악의 진을 파할 수 있는 전략을 들어보자.(별도기재)
성화의 길에 대한 대안
개인적으로 본 저서를 통해 깨달은 바를 적고자 한다.
첫째,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신자를 참된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 첫 걸음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죄에게 멀어지고 범죄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요일 1). 그러나, 죄의 법은 이러한 목적을 망각하게 하고, 죄를 범해도 구원만 받으면 상관없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죄에 대해 무디어진 마음의 법은 죄의 달콤한 유혹에 타협하게 하고 변명하게 한다. 마치 죄를 짓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혹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웬은 이러한 죄의 속삭임들은 복음을 사이비 복음으로 전락 시키는 행위라고 단호히 잘라 말한다. 물론, 용서와 은혜는 존재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은혜가 있으니까,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행위이다.
둘째, 죄라는 적의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즉, 죄라는 적의가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신자의 영혼을 공격하고 쓰러뜨려 노예화 시키는지에 대한, 즉 죄의 무서운 본성에 대한 자각을 새롭게 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 공격에 대해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지 않기 위해 분연히 맞서서 싸우고 유혹과 게으름에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127).
셋째, 지성을 굴복시키는 죄의 영향력에 맞서 총체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좋은 것이고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이지만, 이것을 핑계 삼아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고, 다시 십자가로 나아가 용서 받겠다는 식의 논리는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과 거리가 있다 (146-8).
넷째, 죄라는 적의가 어떻게 신자를 쓰러뜨리는지 영혼에 침투하는지 그 경로를 이해함으로써, 죄의 법에 대한 대처법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영혼 속에서 죄의 힘이 은혜의 수단인 기도와 묵상을 저지하기 위해 육신의 피로함과 타협하고, 우선 순위에서 이러한 영적 밀애를 미루게 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다른 주변적인 일들로 채우게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죄라는 짐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바라며 그 분의 은혜를 얻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다섯째, 죄의 총체적인 공격과 역사를 무너뜨리는 최선의 수단으로써, 오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201-2). 갈라디아서 6:14절의 말씀에서 보듯, 불 같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며,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지성에 대한 속임과 의지에 대한 죄의 잉태를 저지한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슬픔,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저주,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 그리스도가 토설하신 외침,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 영혼 속에 쏟아 부어진 사랑,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상고합시다. 되의 더러움과 죄과와 형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와 죽음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묵상합시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우리의 마음도 그분과 함께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
여섯째, 죄의 역사를 대적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죄를 이겨야 한다. 필자는 본 저서를 읽으면서, 내 속에 여러 의지의 동의가 반복되어 죄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이미 깊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8). 반복적인 죄악은 반드시 너무나 쉽게 죄악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죄에 대한 민감함이 필요함을 다시금 인지하게 된다.
일곱째, 크리스챤의 의무를 지키는 것은 바로 영적 퇴보와 침체에서 이기는 길이라는 것이다. 오웬은 여기서 “의무를 지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의무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리킵니다. 영적 권태, 즉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찾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소통의 도구인 기도와 말씀을 게을리 함으로 파생되는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의 통로인 기도와 말씀가운데 생생한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비판적 평가에 대하여
존 오웬의 저서 대부분은 읽기가 난해하고 복잡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사실 17세기의 스콜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오웬의 글들은 감성적 글귀들과 포스트 모던적인 말랑말랑한 묘사로 가득 찬 현대의 글들에 익숙한 독자들이 읽기에는 극약과 같은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비판적인 독자들은 과연 이러한 복잡한 논리 구조와 사색의 작업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이냐며 딴지를 걸지도 모른다. 필자의 한 친구는 과연 누가 이러한 복잡한 죄에 대한 사고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겠으며, 정말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청교도들과 많은 믿음의 거인들이 걸었던 죄와의 투쟁을 평가절하하는 애기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웬은 이러한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는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죄에 대한 해독제를 가지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죄라는 악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지식이 아닌 모호한 관념만을 가지게 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187).
성도들이여! 내가 질문 하나를 하겠다. 당신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두려움 혹은, 이러한 성화의 삶을 살기 싫어서 그러한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라. 놀라운 사실은 우리 시대의 대다수가 스스로 영적 대적인 죄와 화평의 관계를 선언하고 그와 친구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신자 속에 감추어진 성공의 욕구, 맘몬 신앙, 그리고 교활한 자기애라는 죄의 법을 긍정의 힘이라는 그럴싸한 에너지로 변화시키라는 메시지에 열광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메시지는 싫어하는 당신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부패한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읽어야 할 책.
약 400년 전, 존 오웬이라는 믿음의 선배에 대한 기독교 고전읽기는 2009년 교권주의와 오염된 교리로 불신자들의 돌팔매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의 모든 성도들이 읽고 회개해야 할 책임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자정 능력을 상실한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 나오는 흙탕물이 된 말씀의 꼴을 먹고 있다. 법정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목회자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듣고도 아멘 하면서 막가파식으로 추종하는 서글픈 우리 안에 든 병든 양 떼들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그래서, 신자로써 얼마나 죄악된 삶을 살아 왔는지 돌아보고 뉘우쳐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설교가들이 읽어야 한다.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특정 정당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읽어야 한다. 경제지상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잘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잘 될 것이라고 맘몬 신앙을 부르짖는 거짓 선지자들 목회자들이 읽어야 한다. 읽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그릇 해석하게 만들고, 성도들의 영혼을 갉아 먹게 하는 죄의 법을 깨뜨려야 한다.
셋째,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될 젊은 대학생들이 읽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소망 없는 시대라고 했다. 왜 소망 없는 시대일까? 그것은 소망 없는 젊은이들로 이 세대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할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 고시 시험, 취업 시험으로 20대에 정말 바쳐야 할 진리를 위해 정작 싸우지 않는다. 따라서, 2009년 대학 청년들에게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 청년들 마음 속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죄로부터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대학 선교 단체의 학생들 조차 참 진리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간지 오늘의 운수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입에 찰싹 달라붙는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속 시원하게 미래를 점쳐주는 스포츠 일간지의 오늘의 운수처럼 당신의 귀를 시원하게 해 주지 않는 책이 바로 오웬의 저서이다. 오히려, 죄라는 악의 존재 앞에서 한 없이 약하고, 가련한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죄가 당신의 영혼을 침체에 빠뜨리고, 농락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지루하고 딱딱해서 잘 읽어지지 않는다. 듣기 싫은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죄의 힘을 이기기 위해 기도와 묵상에 온전히 전념하라는 소리도 듣게 된다. 그러나, 성도여! 당신은 결단하여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죽게 하고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빠뜨린 죄악과 동거동락하며 지옥의 쾌락 속에서 즐거워할 것인가? 존 번연은 신자의 인생은 친구와 함께 악한 대적들과 싸우며 천성을 향해서 가는 길이라고 묘사하였다. 칼과 지도는 이제 당신의 손에 지워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진리로 맞서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먹다 토하여 내친 것을 주워 먹을 것인 것? 두려움 속에서 용기가 필요한 자들이 있는가? 기억하라. 이 싸움은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니 오직 은혜로만 가능한 싸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 때, 백전백승하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독을 권한다.
저자 존 오웬 (Jhon Owen)
1616년 영국 옥스퍼드주 스타드햄에서 그곳 교구목사인 헨리 오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존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요, 은사받은 대 설교자요,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의 감독이요, 옥스퍼드대학교의 부총장이요, 크롬웰 경의 국목이요,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낸 저자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퀸스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고, 대학을 나와 석사학위 과정을 거칠 때쯤 이미 수많은 고전에 통달하는 한편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히브리어와 랍비들에 대한 지식에도 깊이 몰입하는 등으로 천재성을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70세에 못 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심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1683년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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