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편집자칼럼
- 신동수1999-2002년 서울 방배동 기독신학교에서 M.Div.를 수학하고, 2002-2004년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Th.M.으로 조직신학(칼빈연구)을 전공, 2004-2010년까지 미국 휘튼대학원 성경.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할 때까지 개혁신학과 칼빈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시카고 지역에서 한인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담임목회 및 도시선교 등을 섬겨왔으며, 학교와 목회, 그리고 이민생활 현장에서 고민하며 묵상한 에세이와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의미있는 개혁파 신학/신앙 관련 서평 등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은혜로 용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대로 벌해야 할 것인가?"
전에 한국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이든 한 안수 집사님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혼자 다 부리고 다녔습니다. 나이가 이제 고작 스물 너 댓 밖에 되지 않았는데 유치장을 일곱 번이나 들어 갔다 왔다니, 그 삶이 얼마나 허랑 방탕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어느날 이 청년이 남의 돈을 훔치다 적발되어 경찰서에 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죄질이 무거워 교도소로 송치되어 ‘징역’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에 담임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성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일일이 사인을 해서 탄원서를 제출하면 징역만은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감옥에 갔다오면 어떻게 ‘사람’ 구실 하겠느냐는 걱정과 동정이 담겨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죄는 밉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은혜로운 광고에 마음에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만은! 제 마음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잘못한 것 없이 후미진 골목 뒤로 끌려가서 입술이 터지도록 맞고 이빨이 깨진 사람들의 아픔은 어떻게 합니까? 칼들고 덤벼들어서 돈 뺏기고 추행을 당했던 여인들의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은혜 좋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자니 ‘법’(진리)이 울고... 법과 ‘진리’를 따르자니 ‘은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은, 늘, 이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 서게 됩니다. 법과 진리도 하나님의 것이고, 용서와 은혜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를 추구할 때, 다른 하나가 무너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와 진리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 아닙니까? 어떤 경우에도 은혜를 따라야지요!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성경이 진리의 말씀 아닙니까? 악을 악으로 분별하고 대적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악을 몰아내고 진리를 세워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따를 것인가? 진리를 따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저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면서, 바른 성경적 관점과 해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1. 은혜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혜만 있으면 사람을 망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 대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성전에 앉아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 뒤로부터 어수선한 소리가 나더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반라의 한 여인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대충 걸친 옷 매무새가, 그녀가 방금 전 간음죄를 짓다가 잡혀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행한 수치스러운 일과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선 자신으로 인해 너무나 창피하고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전날 초막절 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헤매다가 눈이 맞은 사내가 못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녀가 어두움 가운데 행한 죄는 빛 가운데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군중들은 분명 진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죽이는 진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진리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은혜’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가 진리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 기초한 진리여야, 그 진리가 살리는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은혜로 덮고자만 하면 치명적 결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며 법과 정의만 외치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정의가 되어버립니다. 은혜를 좇자니 진리가 서지 않고 진리를 좇자니 은혜스럽지가 않습니다. 이는 진리가 없는 은혜는 사람을 못쓰게 하고,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은혜와 진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은혜와 진리 모두를 찾을 수 있을까요?
3.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 주에 담임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성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일일이 사인을 해서 탄원서를 제출하면 징역만은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감옥에 갔다오면 어떻게 ‘사람’ 구실 하겠느냐는 걱정과 동정이 담겨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죄는 밉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은혜로운 광고에 마음에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만은! 제 마음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잘못한 것 없이 후미진 골목 뒤로 끌려가서 입술이 터지도록 맞고 이빨이 깨진 사람들의 아픔은 어떻게 합니까? 칼들고 덤벼들어서 돈 뺏기고 추행을 당했던 여인들의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은혜 좋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자니 ‘법’(진리)이 울고... 법과 ‘진리’를 따르자니 ‘은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은, 늘, 이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 서게 됩니다. 법과 진리도 하나님의 것이고, 용서와 은혜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를 추구할 때, 다른 하나가 무너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와 진리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 아닙니까? 어떤 경우에도 은혜를 따라야지요!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성경이 진리의 말씀 아닙니까? 악을 악으로 분별하고 대적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악을 몰아내고 진리를 세워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따를 것인가? 진리를 따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저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면서, 바른 성경적 관점과 해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1. 은혜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혜만 있으면 사람을 망칩니다.
‘은혜’ 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이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데 하나님이 거져 주신 생명’입니다. 우리의 받은 직분이 그렇고, 은사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죄사함” 이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잘못은 다 내가 했는데, 죄 없다 여김을 받는 것이잖아요. 아무리 큰 죄를 범하고, 아무리 악랄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은혜로 용서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리가 없이 은혜만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무엘하 13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논은 다윗의 첫 아들이었습니다. 용모도 준수한 편이었고, 잘하면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만 청년의 정욕을 제어치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갈구하는 여인은 다름 아닌 배다른 여동생이자 아우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이었습니다. 상사병이 날 정도로 몰래 욕망을 품고 있다가, 친구요 모사였던 요나답의 조언을 듣고는 짐짓 아픈체 하고, 다윗왕에게 청하여 다말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시중들던 여동생과 억지로 동침을 하였습니다.
이게 웬 훼궤망칙한 일입니까?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요, 율법에서도 엄히 금하는 천륜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게다가 성폭행 후에는, 도리어 다말을 싫어하여 문 밖으로 내어 쫓아 버렸습니다. 다말 편에 생각해 보세요. 이런 부끄럽고, 억울하고 치욕스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녀는, 이제 평생 자기 방안에 갖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궁안에 있는 사람이나 백성들이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으니 그녀에게 꽃다운 미래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오라비 압살롬이 자기 친동생의 일로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게 되었습니다. 저 배다른 형 암논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벌해주시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일이 분명 다윗의 귀에도 들렸거든요. 그렇다면, 의로운 왕 다윗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했습니까? 암논의 죄를 묻고 다말에 대한 책임을 물었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법이고 진리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아무 책망도 하지 않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암논을 불러다가 ‘징계’하고 다말에 대한 적절한 책임을 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래도 내 큰 아들인데...’, ‘행위는 나쁘지만, 아들이니까 사랑으로 용서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암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는 용서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는 좋은 것입니다.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을 무작정 덮는 것이 진정한 은혜일까요?
다윗은 아들의 문제를 ‘은혜’ 로, ‘은혜스럽게’ 해결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만은. 진리를 밝히지 않고, 진리대로 판단하지 않는 ‘은혜’ 는 오히려 암논을 망치는 결과가 되고, 그의 집안에 더 큰 문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아버지가 진리를 세우지 않자,결국, 자기 스스로 배다른 형 암논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사이가 벌어진 다윗과 압살롬은, 후에 결국 부자간의 전쟁에 까지 이릅니다. 이로써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 뿐 입니까? 아버지가 자기 여동생을 범한 큰 형 암논의 죄를 진리대로 판단하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자기가 아버지의 첩들, 즉, 자기 계모들을 백주에 욕을 보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의 시작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진리가 없는 은혜를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없는 은혜는 사람을 망칩니다.
2. 진리는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입니다.
진리란 무엇인가요? 진리란, 시비를 제대로 가려 법대로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부패’ 공화국이라고들 말을 합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그 부패의 정점을 찍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OECD 국가들 중 뇌물로 법을 세우지 못하는 비율이 전체 2위라고 합니다. 법 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진리 보다는 뇌물과 협잡이 판을 칩니다. 도무지 법과 진리가 서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밝히고, 옳고 그른 것이 밝혀져야, 공의가 서고, 공평이 이루어집니다. 정말로, 법과 진리가 바로 서는 세상이 고대됩니다만은!!! 그러나, 은혜가 없이 진리만 외칠 때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 대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성전에 앉아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 뒤로부터 어수선한 소리가 나더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반라의 한 여인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대충 걸친 옷 매무새가, 그녀가 방금 전 간음죄를 짓다가 잡혀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행한 수치스러운 일과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선 자신으로 인해 너무나 창피하고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전날 초막절 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헤매다가 눈이 맞은 사내가 못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녀가 어두움 가운데 행한 죄는 빛 가운데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그녀를 빛 가운데로 데리고 온 것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진리의 판결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그들은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 간음하다 잡힌 유부녀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 악한 죄에 대한 책임은 죽음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웅성웅성 대다가 급기야 하나씩 하나씩 돌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누구든 한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면 다 같이 돌을 던질 기세였습니다.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군중들은 분명 진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죽이는 진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진리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은혜’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이는 진리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가 진리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 기초한 진리여야, 그 진리가 살리는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은혜로 덮고자만 하면 치명적 결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며 법과 정의만 외치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정의가 되어버립니다. 은혜를 좇자니 진리가 서지 않고 진리를 좇자니 은혜스럽지가 않습니다. 이는 진리가 없는 은혜는 사람을 못쓰게 하고,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은혜와 진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은혜와 진리 모두를 찾을 수 있을까요?
3.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우리 인간은 한계적이어서, 은혜와 진리를 모두 충족시키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며, 또한, 진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중 하나만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은혜” 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요한복음 8장의 정욕죄 범한 여인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씀의 진리를 가지고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를 외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 8:7) 여기서 분명 예수님의 명령은 “돌로 치라” 였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분명히 세우셨습니다. 여인의 죄는 그 책임을 물어야 할, 돌로 쳐야 할 죄라는 것입니다. (돌로 쳐라!) 얼버무리거나 어물쩡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로서 여인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치라’ 는 단서를 다심으로써 그들이 함부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 8:11) 예수님은 결국 아무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돌로쳐라 라시며 그녀의 죄를 인정하고 진리를 세우셨지만, 은혜로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을 향한 ‘진리’ 와 ‘은혜’를 모두 충만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그녀의 죄가 돌에 죽어야 할 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값없이 죄사함과 새 인생을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진리를 드러내시지 않고, 은혜만 베풀었다면, 그것은 여인을 더욱 못쓰게 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은혜가 없이 진리만 주장했다면 인은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진리’ 와 ‘은혜’ 가 충만하셔서 죄를 드러내시면서도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일 것입니다. 최근 시카고의 교계 분쟁을 살펴보면 당혹스러운 부분은, “은혜롭게 하자”는 말로 무작정 덮고 가려다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야기되거나, 혹은 “법과 진리대로 하자”고 하다가 결국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고 정죄하기 위한 법이 되는 경우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진리는 감춰진 채 은혜를 빙자하여 쉬쉬하면서 곪은 곳이 터지기까지 썩어가는 교회가 생기기도 하고, 은혜와 사랑은 식을 대로 식은 채 스스로 세운 정의와 법으로 정죄하고 면직과 출교가 난무하다가 결국은 갈라지는 교회가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이런 은혜와 진리 하나만 붙잡은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 모두가 충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한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추악한 죄인들의 죄를 기꺼이 아낌없이 용서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그 죄의 댓가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친히 당신이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인이 담당해야 할 죄의 책임을 직접 지시고, 그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실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죄인들을 향한 모든 정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죄악의 값을 다 갚으실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셨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울부 짖으셨습니다 (마 27:46). 하나님은 십자가의 진리로써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어물쩡 죄를 덮고 넘어갔다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이 처절하게 드러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님이 피흘리시며 드리신 이 기도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죄 사함의 은혜로 바꾸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진리대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이처럼 진리대로 죽으신 그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은혜는 진리와 함께 오는 은혜이며 그리고 진정한 진리는 은혜가 동방된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와 진리가 주님의 십자가로 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피흘리시며 드리신 이 기도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죄 사함의 은혜로 바꾸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진리대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이처럼 진리대로 죽으신 그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은혜는 진리와 함께 오는 은혜이며 그리고 진정한 진리는 은혜가 동방된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와 진리가 주님의 십자가로 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음에 의문이 생겨 고민하고 있을 때, 목사님의 광고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탄원서를 쓰는 것이 진리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제가 매를 들고 붙들고 가르쳐서 새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의 눈물과 노력을 보시고 이 탄원서에 싸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간혹 ‘은혜’ 나 ‘진리’ 하나에 너무 매이다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진리를 세우는 은혜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따를 때, 은혜가 있는 진리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나 자신을 드려서 희생하며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나를 살리신 그 은혜와 진리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갈 때, 은혜냐 진리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 모두를 충만히 드러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댓글 0개
| 엮인글 0개
19개(1/1페이지)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19 | [신동수 칼럼] 찰나(刹那)의 사역 | 신동수 | 2021.06.04 04:41 |
18 | [신동수 칼럼] "미친 개처럼 잡아 죽여라" : 종교개혁의 그림자 | 신동수 | 2021.01.13 23:04 |
17 | [신동수 칼럼] 이신칭의: 똥통 (?) 에서 피어난 놀라운 은혜의 깨달음 | 신동수 | 2021.01.12 03:40 |
16 | [신동수 칼럼] 낙태: 한국 교회의 위선 | 신동수 | 2020.12.16 08:30 |
15 | [신동수 칼럼] 빛의 축제를 맞이하며: 하누카를 지키신 그리스도! | 신동수 | 2020.12.09 23:05 |
14 | [신동수 칼럼] 감사절을 맞아 보은한 대한민국 | 신동수 | 2020.11.28 12:14 |
13 | [신동수 칼럼] 카톨릭 교회, 우스꽝스러운(?) 판데믹 대처 | 신동수 | 2020.11.25 06:59 |
12 | [신동수 칼럼] 1920년 대 미국 교회 최악의 영적 대공황: 2020년 한국 교회가 받 | 신동수 | 2020.11.21 08:20 |
11 | [신동수 칼럼] 1920 년대로 부터 2020 년대를 읽다 | 신동수 | 2020.11.17 22:30 |
10 | [신동수 칼럼] 교황, 진작에 그럴줄 알았다?! | 신동수 | 2020.11.15 10:23 |
9 | [신동수 칼럼]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의 다양성에 눈을 떠야... | 신동수 | 2020.11.14 13:14 |
8 | [신동수 칼럼] "이제 때가 되었다" - 동성애 담론에 대한 개혁파 신학자의 한 견해 | 신동수 | 2017.01.27 05:51 |
7 | [신동수 칼럼]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의 명암 | 신동수 | 2016.12.12 11:01 |
6 | [신동수 칼럼] 링컨, 그는 과연 위대한 기독교적 대통령이었나? | 신동수 | 2016.11.14 09:37 |
5 | [신동수 칼럼] 제발 덮어놓고 전도하지 맙시다! | 신동수 | 2016.11.07 11:09 |
>> | [신동수 칼럼] "은혜로 용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대로 벌해야 할 것인가?" | 신동수 | 2016.11.02 01:16 |
3 | [신동수 칼럼] 개혁신학의 영성 [1] | 신동수 | 2016.10.28 08:39 |
2 | [신동수 칼럼] 칼빈의 [참된 기독교인의 삶] 에 나타난 개혁파 신앙 | 신동수 | 2016.10.27 04:51 |
1 | [신동수 칼럼] 쯔빙글리가 말하는 "참 신앙" (True Religio [1] | 신동수 | 2016.10.26 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