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동수1999-2002년 서울 방배동 기독신학교에서 M.Div.를 수학하고, 2002-2004년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Th.M.으로 조직신학(칼빈연구)을 전공, 2004-2010년까지 미국 휘튼대학원 성경.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할 때까지 개혁신학과 칼빈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시카고 지역에서 한인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담임목회 및 도시선교 등을 섬겨왔으며, 학교와 목회, 그리고 이민생활 현장에서 고민하며 묵상한 에세이와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의미있는 개혁파 신학/신앙 관련 서평 등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칼빈의 [참된 기독교인의 삶] 에 나타난 개혁파 신앙

신동수 | 2016.10.27 04:51

칼빈의 [참된 기독교인의 삶] (The Golden Booklet of the True Christian Man) 은 1539년 [기독교강요] 라틴어 2판에서 [De vita hominis Christiani] (기독교인의 삶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처음 모습을 나타내었으며, 내용상의 지대한 관심과 개혁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수로서 인식되어 1540년 프랑스어 단행본으로 시작하여 1561년 영어번역, 이후 4세기가 흐른 지금 전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수 많은 개혁성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개혁신학의 핵심으로 불리울만 하며 무엇보다 참 신앙을 가지게 된 개혁성도들 - 로마카톨릭의 미신적 신앙을 벗어나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 – 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어떤 노력과 분투를 해야하는지 보여주는 개혁신앙의 백미라 아니할 수 없다.

종종 종교개혁을 이신칭의 교리논쟁 중심으로만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데, 칼빈의 본 논고는 참된 개혁신앙인 (A True Reformed Christian) 의 삶과 영성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개혁신앙은 그 시초부터 – 쯔빙글리의 [참 신앙과 거짓신앙에 대한 주석] (1525) 이래로 –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믿음과 함께 거룩하고 흠없는 성도의 삶이 개혁의 참된 목적으로 제시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에서 밝히는 참된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과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왜 그리스도인의 삶이 중요한가?

"중생의 목적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 (갈 4 : 5, 벧후 1 : 10 참조)" (III.6.1).

2. 그리스도의 삶의 규범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1).

2) 여러 성경구절: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열성이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토대로 생활을 설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3) 교부들의 논의: "한 가지 덕목에 대한 훈계를 기술하는 데도 옛날 교부들은 무수한 말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1).

4) 칼빈 자신의 간결한 생활지침: "나는 원래 간결한 것을 좋아하며 더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교리의 단순한 개요를 가급적 간단하게 제시하겠다" (1).

3. 그리스도의 삶의 동인 (Motives)은 무엇인가?

1) 성경의 교훈: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교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이 전연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된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준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2).

2) 거룩함의 줄: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이 그 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굳게 결합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 (infuse) 되어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3) 구원의 목적: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평생 거기서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성경에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거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시 116 : 19, 122 : 2-9 참조)....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흠이 없고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시 15 : 1-2, 24 : 3-4)" (2).

4. 그리스도와 성도의 삶의 관계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을 때에(고후 5 : 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형상을 인치시고(히 1 : 3 참조),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3).

2) 양자됨의 조건: "주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즉 우리의 양자 관계의 유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의에 몸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반역하는 사악한 배신 행위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3).

3) 감사의 생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녀다운 생활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말 1 : 6, 엡 5 : 1, 요일 3 : 1)" (3).

5. 성도의 삶은 입술의 고백으로 충분한가?

1) 크리스챤임을 공허하게 자랑하는 자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다. 복음을 해득하려면 복음이 영혼을 전적으로 점령하고 속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아니면서 그런 체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모독 행위를 못하게 하고 교사인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4).

2) 교리와 삶의 관계: "우리는 종교 생활의 근원이 되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 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우리의 속마음에 들어가며, 다음에 일상 생활이 되며, 우리를 개조하고 동화시킴으로써 복음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4).

6.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할 수 있는가?

1) 복음으로 호흡하되: "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에서는 복음만을 호흡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원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복음적 완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5).

2) 목표를 세우고 분투 노력하여 전진하라: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을 눈앞에 세우라. 우리가 분투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하라…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5).

3) 선 자체에 도달하기까지: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 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 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5).

4) 육신을 벗을 때 완전에 도달할 것: "육신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 만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 (5).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칼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 (칭의) 는 신자의 순종 (삶) 을 통해 조화와 일치를 이룬다고 본다. 칭의를 받았다고 하면서 의에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칭의이든지 아니면 받은 칭의가 크리스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이에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은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 을 더욱 확고하게 확인해주고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2. 인간본성에 대한 칼빈의 언급들은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인간본성 이해와 맞닿아 있다. 특히 우리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 이 전혀 없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 는 사상은 어거스틴/아퀴나스적 이해를 반영한다. 특히, 성령 – 사랑 - 의 “주입” (infusion) 은 혹자에게서 심히 꺼려하는 단어이지만 칼빈은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3.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 믿음으로 말미암은 양자됨 – 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 (infuse) 되었다” 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주입받은 우리는 “성화” (sanctified) 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화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함을 주입받지 못한 것이며,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아니며, 결국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4. 칼빈은 중생의 목적에서도 밝혔듯이 구원의 목적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흠이없이 의로운 자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확인한다. 카톨릭의 구원관은 신자의 의로운 삶 (선행) 이 구원에 보탬이 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제 개혁된 구원관은 의로운 삶 (흠없는 삶) 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표지 (열매) 요 구원의 목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개혁파 신앙이 가지는 독특한 개혁 프로그램이 드러난다. 루터란이 이신칭의의 교리에 치중하는데 반해 개혁파는 쯔빙글리로 부터 칼빈, 그리고 이후 칼빈주의자들 (경건주의/청교도) 에게 이르기까지 구원의 목적으로서 의롭고 흠 없는 삶에 개혁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5. 칼빈의 개혁성도 프로그램은 "오직 믿음" 의 구호로 그치지 않고 "의롭고 거룩한 삶" 을 향한 목표와 동기와 구체적인 방법들 (이어지는 III권, 7장-10장) 을 제시한다. 후대의 경건주의/청교도들에게 두드러지지만, 칼빈은 흠없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향하여 부단히 "분투" 하고 "노력" 해야 함을 강조한다.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함" 에 이를 수는 없지만 상당한 진보에 이를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인정" (agree) 하게 하고 "확인" (confirm) 하게 된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거룩함의 열망과 의롭고 흠없는 삶을 향한 일말의 진보가 없다면 그의 구원은 말 뿐인 거짓이요 참 복음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 개혁파 종교개혁이 50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말로만 개혁파 신자인양 교리를 떠들 뿐 "참된 성도의 삶" 에 있어서는 일말의 진전도 보이지 않는 - 아니 삶에 있어서는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매우 욕되게 하는 개혁파 (장로교) 의 현실 -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 개혁파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찾고 개혁된 신자의 신앙과 참된 삶으로 회복되기를 안타까움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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