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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강도헌장로교 합동측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합동측 목사가 되었다. 목회자가 되기까지 약간의 방황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기도로 목회자가 되었다. 중형교회와 대형교회의 부교역자 사역을 해 오던 중에 성령의 강권적인 끌림에 제자삼는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성(신학)과 체험의 전인적 영성에 관심을 두고 영성과 치유, 성장에 관해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영전전투’ 1권, 2권이 있고, 현재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강도헌 | 2017.07.17 10:52

그리스도를 사랑하라(출20:14)

 

성경은 ‘간음’을 단순히 육체적 잘못된 관계에만 국한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간음’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신랑)을 두고 우상을 숭배하는 간음으로 종종 비유 되고 있습니다. 특히 호세아서를 읽으면 고멜(이스라엘)의 영육적 간음이 노골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서 간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꾀 뚫어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사랑은 탐욕에 기인함을 간파하였습니다. 탐욕은 일종의 욕망으로서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행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자신의 욕망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 대상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다’라는 말은 ‘자신의 행복을 욕망하지 않는 자는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듯 그에게 욕망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삶의 형식입니다. 욕망을 인간이 가진 보편적 삶의 형식이라고 한 말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급자족적으로 존재하시고,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욕망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은 오직 행복을 욕망하는 존재로서 사랑은 그 자체로서 중립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간의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상승하거나 하강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사랑을 두 종류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피조물들에 대한 하향적 사랑인 ‘쿠피디타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상승적인 사랑인 ‘카리스타스’입니다. 이것에 대해 스웨덴의 저명한 신학자인 안더스 니그렌은 그의 탁월한 저서 《아가페와 에로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카리스타스와 쿠피디타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카리스타스는 위쪽으로 향하는 사랑이다. 쿠피디타스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사랑이다. 카리스타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쿠피디타스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카리타스는 영원한 것을 위한 사랑이고, 쿠피디타스는 일시적인 것을 위한 사랑이다. 사랑이 대조적인 경로를 택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그 본성상 영적이면서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카리타스란 존재에 대한 사랑이고, 쿠피디타스는 존재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리타스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며, 쿠피디타스는 ‘무엇-됨’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니그렌은 “인간은 카리스타스와 쿠피디타스 사이에서, 자신의 사랑을 위쪽으로 영원한 것을 향하게 할 것인지, 아래쪽으로 일시적인 것을 향하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사랑의 대상에 일치하여 변화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니그렌의 말은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과 점점 닮아가고 같아진다는 것으로서, 이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카리스타스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처럼 변화될 것이며(위치만 니와 그의 후계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신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쿠피디타스를 추구한다면 세상처럼 닮아가고 변화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열매로 알리라’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카리스타스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 자체,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효과나 혜택이 아닌 진리 자체, 의와 선으로부터 파급되는 유익이 아니라 선 그 자체 또는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장입니다. 11세기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에서 하나님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치의 정점으로서 자기 충족적이고 결핍을 전혀 모르는 존재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카리타스는 인간을 점점 더 가치 있게 하며 자기 충족적이고, 결핍을 모르게끔 함으로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의 모습 안에서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오늘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반해 쿠피디타스의 대상은 존재물들인데, 각각의 존재물들은 아무리 완벽한 존재물이라고 할지라도 존재의 결핍, 진리의 결핍, 선의 결핍, 아름다움의 결핍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의존한 쿠피디타스는 결국 약간의 보완과 보충은 될지는 몰라도 그 자체의 가치에 있어서 결핍되어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며,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안식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운 것들을 개발해야 하며, 결국 그의 모든 가치와 소유가 아무리 풍족할 지라도 그 모든 것들 또한 일시적 존재라는 것으로서 늘 불안해하고 쉬지 못하는, 그래서 삶의 존재물을 사랑하는 상태의 결과는 결국 영원히 불완전한 것으로서 쿠피디타스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존재물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는 우리를 점점 더 불완전하게 하고, 결핍되게 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 존재로서 추하고 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성형중독, 명품 중독). 이런 쿠피디타스는 불만과 고단함 그리고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구만 있을 뿐입니다.

 

카리스타스나 쿠피디타스는 그 대상으로부터 무엇인가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카리스타스는 스스로 충만한 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 결핍을 보충하려는 것으로서 그 결과 자신도 점점 충만해져 갈 수 있지만, 쿠피디타스는 그 스스로 결핍된 존재물들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것으로서 채우면 채울수록 점점 더 많은 결핍으로 끝없이 내려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입니다.

 

존재물을 향한 사랑인 쿠피디타스는 본성상 성적 탐욕과 현세욕을 의미하는 콘큐피스켄치아와 연결됩니다. 콘큐피스켄치아는 성적 탐욕과 현세적 탐욕의 노예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콘큐피스켄치아와 같은 노예됨의 이유는 그들의 마음과 목적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의 것들을 향하고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안’,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 때문에 세상의 존재물들을 통해 안정을 얻고자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16절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세상을 소유하려는 콘큐피스켄치아가 아니라 세상의 결핍에 대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 주심으로 세상의 결핍을 채워주시고자 하시는 아가페이다).

 

탐욕이란 무엇인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은 원래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욕망이 무한하게 된 것은 그 본성이 비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그리스도교는 그 원인에 대해 죄와 하나님을 떠남에 기인한다고 본다). 즉, 공복을 채우려는 인간의 자연적 식욕은 하루에 세끼 음식을 먹음으로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왜곡되어 자연적인 욕구가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으로 변하면서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무한한 것’이 됨으로서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망이나 ‘더 멋있는’ 옷을 입고자 하는 욕망은 어떻게 해도 만족될 수가 없습니다.

 

세네카는 모든 탐욕의 저변에는 반드시 삶에 대한 불만족,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사린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온갖 탐욕(중독)으로 몰아 넣습니다. 세네카가 간파한 이 악순환 구조가 탐욕의 콘큐피스켄치아적 성격입니다. 때문에 모든 탐욕적인 사람은 삶을 긍정하지도 못하지만, 죽음을 긍정하지도 못하며, 살 수 있는 용기도 없지만 죽을 수 있는 용기도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도 성적 탐욕의 콘큐피스켄치아적 성격에 대해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면서 쾌락의 유형을 나누었습니다. 즉, 갈증, 식욕, 성욕 등은 객관적이고 생리적 욕구로서 이것의 충족은 만족이지만, 욕망의 충족은 불합리한 쾌락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롬은 성적 탐욕과 같은 불합리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은 육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음주에 대한 욕구가 갈증보다는 정신적 조건에 기인하듯, 강렬한 성욕 또한 생리적 욕구가 아닌 정신적 불안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프롬에 의하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시장경제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상품들)을 소유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시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 변환을 시켜 자신을 스스로 상품화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스스로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각종 쾌락을 좇는 탐욕의 이러한 속성을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찾는데 주력하지만, 쾌락은 그 본성상 손 안에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역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브래들리는 자신의 《윤리적 학습》에서 쾌락주의의 역설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쾌락은 망해가는 연속이다. 하나가 생기면, 강렬한 자기 느낌이 만족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내 그 느낌은 사라지고, 그것이 사라지면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또 다른 쾌락에 쾌락이 겹쳐올지라도 궁극적 만족을 주지는 못 한다. … 쾌락이 머무는 동안에는 여전히 쾌락을 갈망하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고, 사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때문에 행복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항상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고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은 쾌락주의 또는 쾌락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헛되다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증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사랑하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을 당시 그 인근 지방의 종교적, 사회적 상황으로 보면 간음을 금지하는 계명은 하나의 종교적 모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근동지방의 종교나 사회에서는 간음을 오히려 신성화하거나 관습화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에 의하면, 고대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연의 생산력을 신성화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생명력을 신성화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력의 최고 절정인 인간을 생산하는 행위를 최고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의 신전들은 은밀한 관계를 맺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이쉬타르,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로 알려져 있던 아스타르테의 신전들은 수 백명의 여사제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사제들은 ‘거룩한 창녀’ 였던 것입니다. 이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생산력을 예비하는 행위로 여겨졌고, 여기에서 얻은 수입은 모두 신전에 바쳐졌습니다. 이러한 신전에는 여사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사제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신전을 찾는 남성이나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곳곳에서는 이러한 종교 매춘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종교 창녀를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어진 돈을 성전에 바치는 것을 금했고(신명기23:17,18), 르호보암 시대에도 이러한 행위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아사 왕이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냈고(열왕기상15:12), 그 후에도 요시야는 미동의 집을 허는 조치를 내렸지만(열왕기하 23:7). 예언자 호세아가 살았던 당시에도 종교 창녀들과 함께 희생을 드렸습니다(호세아4:14). 이렇게 생산의 힘을 신성화하는 것은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의 풍습으로도 행해졌습니다(김용규의 데칼로스 388-9, 참조하라).

 

이렇듯 부적절한 성행위에 의한 예배가 널리 유행하던 당시, 예배의 형태는 물론이고 간음을 금지시키고 성적 순결을 요구하는 형태의 선포는 당연히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제 7계명은 콘큐피스켄치아 또는 쿠피디타스에 대한 첫 번째 종교사적 도전이자 역사적 선포하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생산의 힘을 신성화하는 종교와 풍습이란 결국 존재물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존재물에 대한 사랑은 그 존재물이 주는 쾌락을 얻기 위해 그 존재물을 숭배하고, 그 존재물이 주는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야훼’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야훼’란 우리가 앞서 1계명부터 3계명까지 살펴보면서 ‘존재의 근원’, ‘존재를 존재케 하는 자’라는 뜻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표현한 ‘하수관으로 흐르는 물을 정원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즉,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던 에너지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 살아가는 생산을 숭배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추구함으로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산을 사랑하고 행복(쾌락)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들로서 더 소유하고 가지기 위해 살아가는 쿠피디타스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과 이 세상의 결핍들을 채워주는 카리타스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소유와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소유하는 것에 기뻐하는 탐욕적 사랑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오히려 타인에게 나눔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는 자들입니다. 카리스타스는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 의’(마태복음 6:33)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카리스타스는 스스로 충만함을 누리는 자로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나눌 수 있지만, 쿠피디타스는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핍된 자로서 더 가지려고만 할 뿐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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