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강도헌장로교 합동측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합동측 목사가 되었다. 목회자가 되기까지 약간의 방황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기도로 목회자가 되었다. 중형교회와 대형교회의 부교역자 사역을 해 오던 중에 성령의 강권적인 끌림에 제자삼는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성(신학)과 체험의 전인적 영성에 관심을 두고 영성과 치유, 성장에 관해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영전전투’ 1권, 2권이 있고, 현재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강도헌 | 2022.02.04 10:34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한 가지로 압축한다면, 그동안의 패권 사상이었던 서구-기독교 우월주의 사상의 해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1세기부터 서구는 플라토닉에 갇혀 있다가 중동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접함으로 과학과 기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후 몇 세기 동안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유럽 외 신대륙을 향한 팽창정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럽 이외의 타 대륙들을 경험함으로 중세 서구의 스콜라철학의 한계들을 발견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각종의 민중 봉기들과 같은 혼란의 시기들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니체의 등장은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니체의 등장 이전까지 서구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사상의 토대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접하고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자연중심적 영혼론을 설명하였지만, 그 또한 영혼의 등위개념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토닉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모든 힘에는 관성의 작용이 있듯이, 사상적 흐름과 힘에도 관성적 힘이 그 후세들에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니체는 서구사상의 근간이 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아니라 원초적 씨앗에 해당하는 교회와 바울을 겨냥하였다. 사실 바울 서신들을 통해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서신들 속에 파편처럼 뿌려져 있는 다양한 내용 들은 딱 맞아 떨어지는 퍼즐 조각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사도행전에 소개된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바울의 핵심 사상을 취하는 것이 보다 덜 혼동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바울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신은 유대 바리새적 전통 사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죽음의 이유가 죄로 말미암는다는 유대적 사상의 입장에서 유대의 제사법이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닫고, 부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넘어 부활과 영생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후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까지 기독교 사상은 내외적으로 대혼란기를 겪게 된다. 그리고 라틴기독교 사상파에 속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적 사상의 틀을 이용하여 기독교 사상을 정립하고, 로마는 우여곡절 끝에 라틴기독교 사상을 로마의 정치 종교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니체는 바울에서 출발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로마의 기독교에 대해 비평을 시작함으로 관념주의 서구사상의 한계를, 당시 서구에서 새롭게 힘을 발휘하고 있던 르네상스적 흐름에 따라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양의 자연순환 사상들을 사용하여 서구 관념주의 사상의 해체를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 관념주의적 사상 풍토는 바뀌지 않고 베버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직도 관념 중심적 서구사상은 과학적 사유와 대립하며 지속되고 있다. 아직 대중적으론 무의미하지만, 사상적으로 관념중심의 서구 사상은 포스트모던 학자들에 의해 해체의 종말 단계에 와 있다.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포스트휴먼에 대한 신유물론적 사상이 무르익고 있는 현실이다.

 

언제까지 관념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해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꿩이 땅속에 머리를 쳐박고 있으면 정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일까? 자기 자신과 다름을 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교만에서 내려와야 한다. 자신과 다름은 적이 아니라 좋은 친구이다. 좋은 친구로 인해 내가 더 깊어지는 겸손의 지혜를 잃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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