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나상엽스무 살 어린 시절 만나 20여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한 아내의 남편, 10대에 접어드는 예쁘면서도 드센 두 아들의 아빠로, 지금 경기도 안성의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머리 굵어가고 얼굴 두꺼워지는 중학생 아이들과 성경과 문학, 아름다운 우리 주님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자라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인해, 이제껏 기독교 문서사역과 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함께 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또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기대하며 따르기 소원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나상엽 | 2016.04.24 23:03

1.

4.13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마다 각 계층의 표심을 잡으려는 여러 장밋빛 공약들을 내놓았습니다. 그중 작년부터 계속해서 이슈화되고 있는 것이 청년들을 위한 정책인데, 13%에 육박한 청년 실업률이 보이듯(졸업 유예 등을 포함한 실질실업률은 3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하네요) 사회 현실의 두터운 장벽 앞에 무너져내리는 청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몇몇 지자체나 야당들 중심으로 월 50만원 내외의 “청년수당”을 대안으로 앞장세우고 있는 반면에, 정부나 여당은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하며 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르든 간에 청년들에게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덕 와닿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2.

40km 떨어진, 하룻 길 되는 거리였습니다. 짧지 않은 거리를 지나 나인 성에 도착하셨을 때, 성문 밖으로 몰려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만났습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일상다반사이고, 중동의 작은 마을의 초상은 주민 모두의 행사였기에 사람들은 으레 하던 대로 장례 절차를 따르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전문으로 곡을 해주는 사람들의 커다란 울음 소리가 거리를 채우고, 그 뒤로 눈물을 훔치는 가족들이 뒤따르고, 다양한 이유와 생각들로 함께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웅성대며 행렬을 이루고 있었겠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무리들의 행렬이 다소 무표정하게 묘사되었다면, 누가는 그분의 행동과 감정을 부각시키려 했는지,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단어들이 거리마다 스피커를 통해 웅웅 울려대는 커다란 구호와, 허공에서 아른거리기만 하는 몇십 억 몇백 억 하는 숫자들로 시끄러운 오늘 우리들에게 더욱 반갑게 다가옵니다. 물기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봐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인데, 어째서인지 우리를 위한다는 사람들의 눈매는 하나같이 다들 미덥지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주님은 그들과 다릅니다. 다른 꿍꿍이 심산 없이 우리의 슬픔과 상실감을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깨진 꿈과 상한 마음, 지친 몸을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과부로서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살아왔던 그녀가 맞닥뜨리고 있는 그 상실의 무게를 누가 헤아릴 수나 있었을까요? 그래서 아예 그 슬픔의 참상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로 하고 슬쩍 한번 시선 주고, 아무 말이나 대충 던지면서 적당히 위로의 포즈를 취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나인 성 성문에서 맞닥뜨린 이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보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슬픔 곁에 자리를 펴고 앉으셔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 사 53:3)의 입으로부터 나온 “울지 말라”라는 이 역설적인 말씀은 그래서 얼마나 더욱 강력한 위로가 되는지요?


게다가 우리 주님은 그 슬픔의 깊음에까지 이르십니다. 당시 어쭙잖은 정결 예법을 따라 누구도 시체나 시신을 두는 관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는데,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이 이 통상적인 장례 행렬을 멈춰세웠습니다. 무리가 아무리 함께한다 한들, 이들의 행렬이 여전히 동네 밖 언덕 비탈에 있을 가족 장지를 향한 장례 행렬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행렬을 멈추게한 것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모든 방향을 뒤집어 엎으시는 전복적인 사건을 일으키시는데, 바로 죽은 청년을 살려내셨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3.

여기 우리들을 위한, 그리고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누가 말씀하십니까? 주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듯이(“내가”),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십니까? 천지의 주재, 만유를 붙드시는 분, 생사화복의 주관자, 생명의 주,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죽음의 권세자, 무서움의 왕을 멸하신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로 원수의 머리를 짓밟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바로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청년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이 말씀이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얼마나 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또한 이 청년은 진짜로 죽음의 그늘에 주저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죽음이 슬픈 것이지만, 청년이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비참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이 과부에게 그러했듯이, 더 이상 미래가 없고 살 소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어서는 안 되기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뭐라 말씀하십니까? “일어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이 능력입니다. 이 말씀이 있으면 삽니다.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습니다(15절). 요한복음5장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나사로도 그러했습니다(요 11장). 죽음의 두터운 장막을 찢어버리고 그 사이로 강렬하게 비취는 생명의 빛입니다.


4.

매일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무수한 소리들, 우리를 살리겠다며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무성한 구호들, 한시도 우리의 시선을 가만 두지 않는 소란한 뉴스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하루가 여전한 장례 행렬 중의 한 걸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인공적인 소음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살리시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세미한 음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미한 음성이라 할지라도, 그 음성이 우리 귀에 와닿기만 하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지기만 하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요, 참된 생명 곧 영생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대 청년이여, 오늘 이 음성을 듣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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