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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고백과 견해의 차이, 그리고 고백의 길(꽤 오래전 제 설교인데, 유용할 듯하여 싣습니다)

안영혁 | 2005.07.02 12:52
<눅9:18-2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처음으로 짜장면을 사준 사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아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 가족들 걱정할까 내색도 안 하는 사람, 크리스마스 때 산타였던 사람, 힘들다는 말을 안 하는 사람, 가장 늦게서야 집에 돌아오는 사람, 자식이 보낸 편지를 간직하는 사람, 그 편지를 백 번씩 읽어보는 사람, (딸과 팔짱을 낄 때 행복해 한 사람, 사위에게 딸을 부탁하며 눈물 흘린 사람) 속에 없는 말은 잘 못하는 사람, 그래서 가끔은 손해보는 사람, 말 한마디로 용기를 심어주는 사람, 언제나 뒤에서 응원을 해주는 사람,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사람.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 여러분, 이 말이 누구에 관한 것입니까? 아빠를 고백하는 글입니다. 고백의 느낌이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이 글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니라, 삼성 생명 광고에 실려 있었습니다. 고백의 분위기를 광고로 활용한 것이죠.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겠습니까? 이런 카피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이제 사랑 고백도 어려울 겁니다. 이제는 웬만큼 머리를 굴려 가지고는 광고만도 못한 고백이나 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백까지 파고드는 광고 카피는 참 당황스럽고 얄밉습니다. 우리 사는 데 고백은 대략 그런 느낌입니다.

원래 고백은 관계 속의 가장 깊은 진실을 정성을 다해서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로 그 고백을 요구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백을 하라는 말입니다. 지난 몇 주간 제가 설교했던 소경은 예수는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신뢰할 만한 선생님이라는 말이죠. 그것도 고백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갈릴리의 봄바람이라고 예수님을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그럴듯한 고백문 하나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대화법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먼저 딴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더냐?” 18절 말씀은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견해라고 합니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 이것이 예수님의 첫 물음이었습니다. 우선은 남들의 견해부터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물음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엘리야라 합니다.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합니다. 세례요한이 다시 되돌아 왔다 합니다. 꽤 활발하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도 말의 의미로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고백이 아니라 견해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유물론으로 전세계 150년의 역사를 들끓게 한 마르크스의 아들이 마르크스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예수가 누구야? “그는 아주 옛날에 저기 팔레스타인 땅에 태어난 사람인데, 연약한 사람들 편에 섰던 괜찮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였습니다. 전혀 고백은 아니죠. 견해를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견해가 아니라 고백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연이어 물었습니다. 그래 남들은 그런 견해를 가졌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마도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의 진의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경우처럼 견해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 내가 누구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견해가 아니라 고백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고백을 물을까? 충분히 알 수 있죠. 여러분, 연애들 많이 해 보셨나요? 연애하는 사람들은 견해를 말하지 않고 고백을 합니다. 저는 실패한 연애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 이런 주제에 부딪히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한 고백이 충분하지가 않고, 자꾸 그 사람에 대한 견해들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고백은 없고 견해만 무성한 연애는 정말 불행합니다. 견해가 있으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리고 때로 그것은 꽤나 좋은 것이기도 한데, 그런데 뭔가 마음에 꽉 차들어 오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만남도 그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 말을 접어두고 하고싶은 말은 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견해보다는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인생의 큰 시험입니다.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해.’ 이것이 교회가 아름답게 서는 비밀입니다. 온갖 일들이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교회의 기초는 그런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지는 두 개의 물음을 도구 삼아서 견해와 고백을 아주 분명히 갈라놓았습니다. 견해를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백을 나누어야 진정한 만남이 생기는 것입니다. 답을 합시다. 예수께서는 왜 고백을 요구하셨나? 제자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것은 사랑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총선시민연대에서 낙천자 명단을 내 놓았는데,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은 자기 당이 제일 많은 것에 낙망을 하면서 시민연대를 고발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신문에 보니까 모든 의원들이 이유에 대해서 다 변명들은 했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고백이죠. 남들이 뭐라 하는데 나는 그래. 그러나 정치가들이 하는 말은 항상 본질은 감추고 있죠. 그래서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자신에 대한 아주 호의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보다는 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어떻다 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피할 수 없이 고백을 요구하신다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고백을 합니까?  

많은 학문적 분석 후에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단은 견해이지 고백은 아닙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의 내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당신은 내게 선생님이십니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견해가 아니라 고백이기를 원하십니다. 고백은 그를 향하여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를 향해 부딪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와 콱 충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그런 충돌을 기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콱 부딪혀서 깨어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수없이 부딪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을 다 지고 십자가로 가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우리에게도 고백을 원하십니다. 너는 나를 왜 만나는 거냐? 우리 사이에는 진정으로는 뭐가 있는 거냐?

예수님이 두 마디의 말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이제 고백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명확하게 그 상황을 깨달았습니다. 고백은 그야말로 강한 충돌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두 마디의 물음으로 그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뭐라 하더냐? 그렇다면 너희 영혼 깊은 곳에 묻노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에게 나는 무엇이냐? 너희와 내가 충돌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 베드로는 그런 고백의 의미를 깨닫고서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당신은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런 뜻이죠. 제가 아는 어떤 자매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명문대를 나와서 역시 명문대를 나온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리 잘 풀리지는 못했습니다. 남편의 일은 잘 풀려가지 않는데, 게다가 시댁에서는 교회에를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댁으로부터 제대로 독립도 못한 채로 교회도 출석하지 못하고, 자기 부부의 생활은 풀려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어렵죠. 이 자매가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최종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별로 많지 않은 자기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는 가지도 못하면서, 조그만 수입의 십일조를 평일에 은행을 통해서, 드렸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다른 것은 다 어렵고, 십일조를 당신께 드립니다.” 여러분, 얼마나 고백적인 삶입니까? 이런 십일조는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십일조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정말 가슴 아프죠. 이혼이라도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현실 속에서 그녀의 고백은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감추어버리는 나의 고백은 무엇인지 한 번은 더러는 명확하게 그것을 들추어내기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서 그 고백을 들추어 내셨죠. 정말 예수님은 훌륭한 고백의 산파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장차 기독교 교리를 만들기 위한 준비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예수가 무슨 의미인지 자주 묻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정 깊이에 이 고백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내 인생에 들어오셔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백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 심정의 고백을 들추어내기를 원합니다. 나에 대한 너의 견해 말고, 나에 대한 너의 심정을 다한 고백은 대체 무엇이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굉장히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마16:16다음의 16:17에서 예수님은 이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께서 네 마음에 그렇게 역사를 하셨구나! 듣고 보니 내가 너무 기쁘다! 몽땅 모아서 이야기하자면 잘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꾸준히 예수를 보아온 한 제자가 그의 마음을 모아서 고백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 10년을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어쨌든 고백을 일으켜 내야 한다. ‘비록 그 고백이 다소간 다르다 하더라도, 예본교회에 와서는 고백을 해야지 그냥 견해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교회의 상식으로 통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피시는 예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뻐하신 고백을 방향을 돌려서 반대로 감추라고 하십니다. 21절에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그리고 감추라고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백은 감추는 대신 그 다음 단계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라고 했습니까? 23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요약하면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고백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는 나를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구원의 확신을 오히려 감추라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저는 이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 예수께서 나를 구원했습니다라는 말, 이 말을 자꾸 하면 이 놀라운 고백이 견해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견해가 되어서 떠돌고, 눈치 빠른 사람들이 그런 견해를 받아들여서 “당신은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결정적인 때에는 이런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가벼이 생각하고, 나도 그런 견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울림으로 이 말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말을 너무 자주 드러내지를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국어시간에 죽은 비유라는 것을 배웁니다. 예를 들어 “쏜살같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아주 빠른 것을 말하죠. 그 뜻은 알겠는데, 쏜 살같이 라는 비유의 원래 감흥은 없어져 버린 것이죠. 그래서 이 말은 상투어가 되어버렸고, 비유로서는 적합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비유, 죽은 비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그렇습니다. “그는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런 확신은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정말 예수께서 또다시 나를 충돌하여 올 때 “당신은 나를 구원했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입만 열면 구원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문화 때문에 예수의 구원이 그 원래의 힘차고 신비적인 힘을 너무 잃어버렸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뭔가 아주 감동적인 말이 아니라 교회의 상투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가면 원래 그런 소리한다. 뭔가 그렇게 말해야만 기독교인다운 것 같아서 자꾸 “예수는 나를 구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려는 욕심 같은 것은 제쳐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그 말에는 아주 소중한 사람의 마음이 서려 있어서 그것을 자꾸 건드리면 민감함이 사라져버리고 헛된 굳은살이 박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아주 민감한 반응으로 이런 고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여간 고백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고백을 여기 저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를 따라 오너라. 예배시간에 일찍 오는 것이 예수를 더 잘 믿는 표지도 아니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예수를 더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생각은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레위기를 읽었습니다. 레위기는 제사 예법만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려낸 귀중한 성경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온갖 제사법과 그리고 그와 연결된 생활을 다 이야기한 다음에, 맨 마지막 즈음에 가서 순종을 요구합니다. 레위기26:3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준행한다는 것은 곧 순종한다는 말이고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믿음에 관련된 온갖 내용들이 있는데, 그 내용이 있으면 뭐합니까? 그것을 순종해야한다는 것이죠. 성경번역 선교회의 일화는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종족에게는 믿음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해주면서 고민하다가, 믿음 대신에 순종이라는 말을 썼더니 뜻이 통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나에게 고백을 가졌느냐? 그러면 그 말을 네 마음 깊은 곳에 보관해라. 그리고 그 마음의 고백을 가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것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편안한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 순종의 길에 들어서면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나는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에 대해서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26절에서는 만약에 예수를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마지막날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거라고 했습니다. 나는 부인하고 예수는 시인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 극단적인 말씀을 많이 합니다. 거듭나라. 이것은 사람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죽도록 충성해라. 지금 세상살이만 해도 죽겠는데, 또 죽도록 충성하라니 너무 심한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너무 극단적인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자주 이 말을 들어와서 그렇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합니까? 제가 신앙 생활이 이제 30년인데, 그 동안에 정말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을 본 것은 손에 꼽힙니다. 예수를 시인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시인하면서 거기다 예수의 이름을 덧붙여놓는 것이 요즈음 기독교인들의 사는 방법입니다.

저는 적어도 오늘만은 아주 원론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원하는 사람은 전심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 가운데 주님 앞에 우리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나를 부인하고 주를 시인하는 기초입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까지 뜨겁게 돌아보면서 나를 되새겨볼 수 있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것은 틀림없이 자기를 주장하고 예수는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부인하고 싶으면 먼저 주님 앞에 무릎꿇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시리즈를 쓴 이엠 바운즈는 그 시리즈 1권 「기도의 능력」에서 골방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골방은 연구에 골몰함으로 혹은 사업상의 활동에 희생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하는 골방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가서야 연구와 사업에 사용되어야 하겠다”. 저도 그 동안에 십자가를 지는 실제적인 활동에 많은 강조를 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지만,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서 이 기도에 정말 진지해 집시다. 저는 이번 주간 기도원에 갈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기도하고 계획할 내용이 많았습니다마는,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정말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는 기도에 깊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또 다음 주일에는 훨씬 더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로 만납시다. 예수님은 고백을 원하시는데, 우리가 진정 고백을 시작하는 길은 전심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고백이 분명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따라서 십자가에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가운데 진정 이 일들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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