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영성신학 인식론

안영혁 | 2004.02.02 19:24


영성의 논의가 혼미한 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분명한 규정이 항상 흐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 일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나아오심을 통한 일치가 기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나아오심이란 우리 쪽에서는 그것을 기획할 능력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인식 구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에크하르트가 하나님의 섬광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실제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섬광은 인식론적이지 않고 존재론적이다. 인식론이란 어떤 사태의 일관된 흐름이나 반복 등을 계기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섬광이란 그런 계기가 없음을 말한다. 칼바르트가 원에 접선이 다가오는 것처럼 원은 원으로 있고 접선은 접선으로 따로 있는데, 크기도 없는 접점이 생길 뿐이라고 하였던 바로 그것이 섬광이다. 섬광은 그래서 계기가 없고 크기가 없다. 거기에는 존재의 일치 내지는 교환이 일어나는데, 에크하르트는 말하자면 그 일치와 그 교환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 영성신학은 어떠한가? 어떤 종교적 엘리트의 말로 하기 어려운 환희의 순간, 절정의 순간을 나누는 것이 과연 오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성인가? 단호히 아니다. 오늘 영성을 구하는 곳은 도시이다. 도시가 비록 사람을 황폐하게 한다 하여도, 도시가 비록 인간성을 무너뜨린다 하여도, 이제 인간의 현실은 목가적 현장이 아니라 도시이다. 말하자면 대세이다. 기독교의 눈에 조차 도시화가 사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도시라는 현실은 대세이다. 영성신학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자고 한다면 그것은 도시에서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도시란 무엇인가? 도시는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현실이 기본이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에서 그것을 본다. 그보다 앞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것을 본다. 도시가 아니라 개인적 상태의 인간은 악하다 하더라도 혼자 악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용서받고싶어할 뿐이다. 그러나 도시는 다르다. 소돔에서 도시인들은 함께 죄의 경향을 만들어서 그 죄의 경향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바벨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크기와 폭을 알지 못한 채로 거기에 도달하려 하였다. 오늘의 많은 과학적 연구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모두 악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악과 연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원자력은 사람에게 그 어느 시대보다 큰 힘을 주었지만,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 가운데 하나를 주었다. 이런 모든 것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악이 홀로 있지 않고 연대를 이룸으로 대담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를 다 이렇게 매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이 바라보는 도시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창세기는 대세였던 바벨탑을 부수는가 하면 소돔도 불태운다. 그러나 대세는 대세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이라는 초유의 도시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은 그 다윗을 향해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다. 도시는 다시 한 번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시는 명확하게 그런 2가지 의미를 지녔다. 악의 연대로서의 도시, 그러나 인간 현실로서 하나님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연대. 오늘 영성신학은 바로 이 도시를 향하여 무엇인가 말하여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신학은 여기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영성신학은 다른 어떤 신학보다도 바로 여기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오늘 도시에서 과연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 신학은 얼마나 철저히 반응해 왔는가? 이것은 항상 어려운 문제이자, 한편으로는 달갑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신학은 항상 시큰둥하게 뒤를 따르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드시 선각자도 있었다. 12세기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들은 그런 면에서 선각자였다. 그들에게는 진정 도시가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제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하나의 도시적 연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주교는 짖지 않는 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말씀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절망적으로 엄숙주의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것이 통째로 몹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숙주의만으로는 도시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설교하는 일에 힘을 썼다. 그래서 순회 설교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진정 도시의 문제를 고민하였고, 도시 사람들이 좋든 싫든 그들에게 의미있는 그 무엇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오늘의 영성신학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한다.

도시에 의미있는 영성은 무엇인가? 모든 여자들에게 연정을 일으킨다는 리차드 기어는 티벳 불교에 깊이 빠져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의 낭만 못지 않게 깊은 종교심, 아니 열정적인 종교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의 티벳 불교를 향한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줄 수 없다. 왠가 하면 그것은 역시 이미 말한 대로 자신이 섬광을 보고 있다는 말일뿐이기 때문이다. 그 섬광, 그 존재론만으로는 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무엇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식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렇게 인식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나의 경험은 이러하다.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먼저 인식론이란 관점에서 영성신학을 규정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존재론적인 영성신학을 인식론적으로 해부해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놀이의 영성이라는 말은 어떤가? 요즈음 교회는 절박할 정도로 놀이를 필요로 한다. 안산 제일교회는 교회에 아예 레저 타운을 갖추다시피 하였다 한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보해낼 수 있을지는 생각보다도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리라 본다. 그러나 일단은 그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읽어낸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접점을 찾아낸 것이고, 접점을 넘어서 그 현상의 연속에 대하여 뭔가를 읽어낸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흐름이 있고 연속이 있고 계기가 있다. 놀이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를 얻게하는 그 무엇이 있다. 영성은 그것이 거룩성 가운데 진행됨을 말하는 것이다. 상담학자들은 놀이 치료를 하지 않는가? 어쩌면 영성은 도시를 향한 하나의 치료책일수도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 와서 쉬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시대마다 다른 의미로 읽히겠지만 오늘로서는 영성적이고 상담적인 치유일 수 있다. 가장 단순하고 그 의미 체계가 드러나는 것으로 우리는 놀이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를 넘어 각 사례로 가는 것은 영성 상담의 분야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여간 이제 영성신학은 그 인식론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알지도 못하는 모호한 말들로 미묘한 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영성신학을 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 끈이 무엇인지 그 연속은 무엇인지 그 계기는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물론 그렇게 밝히 드러낼 만한 일이 못되기 때문에 오늘까지 이렇게 모호한 채로 흘러오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밝혀야 한다. 그것은 또다시 아주 복잡한 하나의 인식 체계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학에서 또 하나의 복잡한 의미체계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한 백년이 지난 후에 그 인식론이 폐기처분 된다 할지라도 오늘 신학은 그것을 해내야 한다. 오히려 폐기처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을 이야기하고 오늘 속에 거룩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연속성을 가지는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인식론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몇 사례들에서 그것이 가지는 구조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차피 영성신학의 인식론은 성경에서 연역적으로 주어지는 체계는 아니다. 도시라는 유기체와 영성이라는 경향이 만나서 그것이 작용하는 연속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을 자처하는 영역에 대하여 우리는 분석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인식론을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그 각 사례만큼 인식론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연결적 연구는 각 사례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원칙들을 드러내 줄 것이다. 그러면 그 원칙들을 연결시키고 거기에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영성신학의 존재론적 원칙들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이 잘 진행되기만 한다면 영성신학은 의미있는 그 어떤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작업은 더 있다. 우리가 오늘의 여러 실천 신학의 영역을 섭렵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여러 시대 속에서 진행되어온 영성신학의 많은 진술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들도 틀림없이 우리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찾아내고 그 진술의 연속성 계기성을 밝힐 수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 영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영성신학의 역사적 진술들을 통하여 먼저 그들이 영성과 관련하여 어떤 연속성을 추구하였는지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진술들은 그 자체로서는 등장 인물 각각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시간이 더해가면 이 각각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하기에 따라서는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여기에 대한 학생들의 접근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복잡한 영성신학의 한 쪽 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이야기된 영성신학 인식론의 관점에서 정돈된 의식에 따라 그 한 내용을 채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한 장씩의 벽돌을 가지고 모이는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서론적 접근은 장차 깊이 있는 영성 연구의 초석을 놓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은 분명 영성 신학의 아주 깊은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출발점이어야 한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주소도 없는 어떤 자리에서 감동을 운위하면서 영성신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영성신학의 연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런 영성 연구의 첫 개념은 단연 「영성신학 인식론」이다. 약간은 어려운 이 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이 말이 익숙해질 때까지 자꾸 사용하여야 한다. 언제부턴가 개념적으로 어려운 말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경향들이 생겼다. 상당히 옳다. 그러나 그런 질책을 하는 시기는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자리는 아니고, 내가 지나온 사닥다리를 이제 걷어치울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도시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으로는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수많은 생태적이고 탈속적인 운동 조차도 그것은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운동이다. 역사적 영성 개념과 영성의 보편적 개념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것이 도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 대한 연구를 하여야 한다. 이 또한 아주 맹아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 영성 신학과 관련하여 도시 문제를 어떻게 건드릴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과연 영성과 관련시킬 때 우리는 도시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는 도시의 제반 사항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도시가 그냥 세워진 자연물이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라고 본다면, 도시 사회학적 관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그 도시 사회학에서 영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도시는 대체 어떤 사회이며, 그래서 영성 신학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는가? 영성신학은 과연 거기에 응답할 수 있는가? 혹은 아니면 도미니크 수도회가 이미 고려하였던 그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등등.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하여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엘룰의 「현대인과 기도」같은 책은 매우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우선 그 영성이라는 것의 기본적인 수련의 자리에 대한 감각을 형성 시켜야 한다. 영성이라고 할 때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찾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까지도 감행하였다 한다. 그것은 매우 개연성이 있는 말이다.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나아가는데, 그 나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너무나 강하여 그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의 포기는 무색하여 지고 우리의 영성의 추구는 하나님과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의 집착으로 남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의 자리는 깊이에까지 들어가면 역시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나중에 그런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할 걱정이고, 우선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자료를 다루는 열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는 무엇인지, 성경을 읽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그네조차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금식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등을 고려해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여 보아야 한다. 실행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여야 한다.

앞 단락에서 이미 단서가 보이는 바대로 영성신학은 또한 실천을 요구한다. 어쩌면 우리는 영성의 수행 내지는 순례를 단행하여야 한다. 금식 기도원의 영성은 무엇이며, 뜨거운 체험을 구하는 신유 은사집회의 영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노동 수도원의 영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장애인 공동체의 영성은 무엇인지, 공동체 마을의 영성은 무엇인지, 그런 수행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예를 들어 박성준 교수의 퀘이커 공동체 경험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으로 전달된 것으로 안다. 가벼운 수중의 앎 정도로 이를 평가해보자면 그것은 말하자면 사랑의 진지한 구현이었다. 이런 일을 위하여 우리는 인터뷰를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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