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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역사 속의 두 흐름, 그리고 예수 공동체

안영혁 | 2003.09.18 19:11
<삼상8:19-22; 12:19-25> 위기를 넘어서

저는 오늘 조금 이상해 보이는 말씀들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12:19을 보면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20절을 보면 사무엘은 “두려워 말라”라고 합니다. 또 사무엘은 23절에서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들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으로 거의 바보와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무엘은 무슨 권한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두려워 떠는 백성들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한편으로는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말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기도할 줄도 모르는가 싶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도는 모두가 같이 해야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기도가 사무엘에게로만 편중되어 있는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허술한 데가 많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여러분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여호와께서 역사하실 때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지도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던 상황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임재하실 때 어땠습니까?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에 흙과 돌이 흩날릴 때 이스라엘은 두려워서 모세에게 기도해주기를 청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시내산 장면과 흡사합니다. 사무엘은 그만큼 큰 지도자였습니다.

우리는 사무엘 자신의 역사에서 그를 정당화할 만한 일을 이미 보았습니다. 제가 삼상 3장 말씀을 이미 설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에 야웨의 말씀이 희귀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사무엘에게는 부르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음성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무엘의 역사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3:19-4:1같은 말씀에서 그의 말씀이 하나라도 떨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로서 권위를 일찍부터 획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원래 그렇게 뛰어난 전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스바로 백성들을 모았을 때 그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무엘은 거기서도 다른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생애는 이렇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연속이었습니다. 혼자 하나님을 대하기도 하였지만, 공적으로 그 역사가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거나 변질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하나님과의 동행을 유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또 사무엘의 조언도 무시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신다는 것 하나만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범인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과 동행했고,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에 도달해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지도자가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그렇게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으로 행복한 제가 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되도록 이끌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또 다른 한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보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12장에 걸치는 내용은 우여곡절 끝에 왕정이 성립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큰 혼란을 줍니다. 대체 왕정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왕정을 허락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권선징악적인 주제를 많이 찾아냅니다. 한 사람은 믿음이 있고, 한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있는 사람을 닮아야겠습니다. 그런 설교를 저도 무수히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왕정에 관한한 답이 그렇게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무엘과 사울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조차 합니다. 그러면서 왕정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이 마주치는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렇게 선명치가 않습니다.

그 복잡성은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왕정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내내 블레셋과 싸우고 또 다른 민족과 싸워야 했습니다. 11장에도 암몬 사람들의 족장 나하스가 쳐들어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언제나 전쟁을 했는데, 이스라엘은 거기에 대해서 큰 불안을 느꼈습니다. 사무엘의 장년기 동안은 사람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마저 노년에 들었습니다. 그가 과연 얼마나 더 이스라엘을 지탱해줄지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재판을 굽게하면서 아버지의 현명함을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무엘 지도 하에 20년이 넘는 태평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이라 하면 너무 끔찍스럽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싸워줄 왕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들의 이런 바람을 무시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는 요구는 결코 무리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잡한 부분은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입니다. 지도층이 하층민을 지배하는 것이 싫어서 도망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이 지배층을 가지고 노예를 지배하는 애굽을 떠나서 힘겹게 광야를 유랑하다가 겨우 해방전통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왕정을 취하는 것은 그들의 건국이념을 다 쓸어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 왕정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무엘상 8:10-18에서 왕정이 어떻게 나쁜 것인지 완전히 까발려버립니다. 너희의 딸을 데려가서 식모를 만들 것이다. 너희 아들들을 데려가서 마부를 만들 것이다. 필요하면 땅도 뺏아 가고, 가축들도 뺏아갈 것이다. 사무엘의 이런 말들에는 독기마저 서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다 결정적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너희가 부르짖어도 그 때 하나님께서 너희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은 원래 부르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데,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부르짖고 아우성을 쳐도 하나님이 대답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을 완전히 떠나는 일이라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주 예민하게 감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왕을 구하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을 구하는 것은 나쁜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도 않았지만,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배척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약의 백성으로만 남도록 설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의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것에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포기할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설득할 수 없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그나마 유지를 해야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런 것도 못하시나 싶지만,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가기를 주저하자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게 하시다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유보를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현실 가운데서 왕을 원한다고 하니 그래 왕을 세우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사무엘도 결국은 그것을 따랐습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승인을 하신 것이 아니라 허용을 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승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역사 가운데서 왕정을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사무엘의 지도 아래 태평의 시대를 지내면서 어느 정도 사회 경제적인 질서를 형성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회 경제적 질서를 유지해줄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이런 요구를 도무지 승인할 수는 없었지만 허용해 주었습니다. 무슨 말장난일까 싶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파 공동체에 대해서 집착이 많았습니다. 사무엘도 그랬습니다.

제가 이 애매한 문제를 할 수 있는 한 간략하게 요약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의 기도가 매우 절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실은 기도하기보다는 현실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뜻대로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역사에는 두 가지 맥락이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상8-12장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지파동맹에서 왕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러면 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회과학적 사실들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고동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기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그런 개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왕정의 수립은 하나님의 패배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겨루어서 이기려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쨌든 그 백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왕정이 되었을 때 가장 고달파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주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것을 오히려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아팠지만 그냥 그 왕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냥 그렇게 백성들 마음대로 하게 두시고 말았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어두운 역사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심어놓고 있는데, 바로 사무엘의 기도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의 기도는 그 어린 시절로부터 장년기의 미스바 집회를 거쳐서 오늘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 끊임없는 사무엘의 기도의 역사가 바로 12:23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 하는 것을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역사는 인간의 현실을 따라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역사 속에는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흘러가는 강력한 한 맥락이 있습니다. 다시 돌이키고 다시 돌이켜서 하나님의 언약을 되살리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답게 되도록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역사가 오늘 말씀에는 사무엘의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기도하겠다고 하는 이 말은 매우 큰 역사적인 발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간에 세계무역기구 총회에서 할복을 한 이경해씨의 시신이 돌아왔습니다. 경의도 표하고 애도도 표합니다. 그러나 하여간 이것은 우리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사무엘은 분노해서 칩거하거나, 혹은 자해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그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겠다. 기도하겠다는 말이 이만큼 큰 역사적 발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기도가 여러분의 생애에서도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세상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만, 내 속에는 기도의 힘이 꼿꼿이 살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도 기도하고 있고, 내일도 기도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오늘의 이 흐름을 넘어서 다시 구원의 힘으로 생명의 힘으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도한다면 대체 뭘 기도한다는 뜻이었겠습니까? 마음이 쓰리지만 우선은 가장 중요한 기도는 이스라엘이 왕국으로 잘 성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결국 실패했지만, 사무엘은 그것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사무엘은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비록 왕국이 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이 중심이 되는 그런 나라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꼭 그런 나라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의 기도제목을 성경이 세세히 보여주지 않아도 사무엘과 그 백성들의 대화를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의 이 기도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은 이렇게 왕정으로 가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는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 기도는 어디에 가서 맺혀질 것 같습니까? 역사적으로 말하면 너무 뚝 떨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들이 많지만 교회는 그 일을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이 살아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체제로 말한다면 왕정보다는 그 이전의 지파동맹체제에 훨씬 가깝습니다. 각 지파가 그 지파 각 사람들의 입장을 수렴하여 의사를 결정하던 지파 동맹체가 일인중심 혹은 지배층 중심의 왕정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지파동맹에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있어서 왕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요했던 것입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오면서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그 체제를 교회를 통해서 새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이 교회를 마치 국가와 같은 체제로 가지고 간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저절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그런 실험을 자신도 모르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바로 그런 나라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상의 왕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정을 원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중심이라기보다는 사람의 권위와 효율과 기득권을 지키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파동맹체제보다도 더 언약 중심의 나라를 원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있는 것이라면 그 나라는 그런 나라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에게 왕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교회에서 큰 시험입니다. 대통령이 우리교회에 출석한다고 하면 대단한 이슈가 되고, 어떤 교회가 예산이 몇 십억이라 하면 입이 딱 벌어지고, 어떤 교회에는 고위공직자가 많다는 것이 소문이 되고, 어느 교회에는 의료선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에는 법조인 선교회가 있다고 하면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로 무엇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정말 그런 성공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니고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최후의 만찬같은 그런 나라였습니다. 배신자가 있기는 했지만, 만찬 공동체는 매우 끈끈하고 견고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베드로의 배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베드로같은 처지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께서 붙들려 있는 판국에 예수와 같은 패거리라 하면 붙들려서 사형은 아니라도 뭔가 불이익을 당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를 구해줄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갈릴리의 한 시골 마을 가버나움에서 시골 청년들 한 무리가 물의를 일으키면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뿐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그가 투사로서 싸워야할 의식이 아직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배신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했습니다. 베드로가 허술했다기보다는 예수께서 만들어놓은 공동체는 그만한 정치적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공동체는 끈끈한 힘이 있었습니다. 흩어진 것 같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갈수록 더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나라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더 엄청난 의미의 해방의 나라를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어떤지를 아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그 만찬공동체는 매우 작고 정치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 가운데서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강력한 나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 가운데 이미 임하여 있다고 예수께서 무수히 가르쳤던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목사님은 어떤 나라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바로 이 말씀으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성찬공동체를 원합니다. 현실에서 이 만찬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모양이 되어야할지 그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이 지향은 아주 뚜렷합니다.

오늘 교회에 주어져 있는 과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왕정도 아니고 사사체제도 아니고, 예수님의 만찬공동체를 일구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 가운데서 끊어낼 수 없는 강력한 결속이 있는 나라. 우리끼리 잘 결속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왕정을 반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속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백성들의 속박을 싫어하고 백성들의 해방을 원했습니다. 그 해방의 나라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참 미약해 보였지만 예수께서는 성찬 공동체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성찬 공동체를 이룹시다. 제자가 선생께 나아와서 어깨를 기대고 말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그 마음 속에 모든 의미의 해방이 고동치고 있는 나라.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가슴아파하며, 뒤척거리면서 현실과 이상 가운데서 고민하던 그 나라를 우리는 오늘 우리 가운데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에서 그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더 살갑지 못했던 것을 제가 회개합니다. 제가 더 생기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이끌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를 보면서 희망없다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의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비슷한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사무엘은 이루지 못한 그 나라를 만들어 갑시다. 왠가하면 우리는 이미 사무엘의 그 가슴아팠던 경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무엘보다 더 뛰어나지 못하지만 예수께서 길을 닦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지배하는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는 더 가까운 자리에 나아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가 됩시다. 그리고 그 사무엘이 이루지 못했던 나라를 아름답게 이루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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