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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10.일상과 기도

안영혁 | 2003.06.29 01:14
10.일상과 기도
일상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다 드러내고 또 다 드리자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행위로서 새삼 신학적 자리 매김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일상과 기도를 같이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보통의 삶과 영성적 삶을 같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삶을 다르게 말하는 방식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을 일상과 기도라고 불러보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 전체를 바라보는 가장 소박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일상의 의미들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으로 수행자들이 닦아온 기도의 단계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런 것이 우리 삶과 교회와 사회의 개혁에서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충만히 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이 일에 성령님은 항상 동행하시고 감동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은혜의 삶을 단지 기도의 순간에만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얻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를 떠나면 삶이 메말라진다거나, 일상 속에서 도무지 기도를 향한 자리를 내지 않는다거나 하는 불균형을 벗어버려야 한다. 일상 가운데 기도가 숨쉬고, 기도 가운데 일상이 녹아있는 삶을 소원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Ⅰ.일상
일상의 신학
교회에서 일상을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두서없이 말하면 하품하고, TV보고, 아이와 노닥거리고, 부부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그런 것들이 일상이다. 그런데, 그 일상이라는 것을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생각하면 일상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 좀 드러날 것 같다. 그 작업을 한 번 해보자. 그러기 앞서 일상의 신학이 가지는 색깔에 눈을 한 번 주어보기로 하자.
첫째로 일상의 신학이 일상을 축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일상은 일상으로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된다.
둘째로 일상이 일상으로 머물 때에 그것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는다. 바로 그럴 때에 일상은 인간다운 삶의 본질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일상은 그냥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그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둘 때 그것은 인간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일상은 참으로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게 되고, 나를 잊고 남을 염려하며,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되는 인내를 얻는다. 이런 일은 때로 기적의 삶 같지만 그러나 일상인 것은 분명하다.
셋째로 우리는 주일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닌 하찮은 일들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응해야 한다. 일상사가 짜증스런 것은 우리가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사에서 우리는 실은 옳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잘 처리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그렇다. 일상사는 우리를 현실적이게 하고 더러는 고달프고 낙담케 하며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삶이라는 참 축제에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칼 라너는 참 용의주도하게 우리의 일상을 연결시켜 놓았다. 일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길을 가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에로 이어 놓았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어른들은 늘상 일을 하는 것이며, 목적지를 갖고 어딘가로 가고, 그러다가는 앉아 쉬고, 일상에 나아오는 것을 알고 느끼기 위해 보며, 그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울거나 분노하거나 미움을 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웃는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 했는데,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며, 자는 것은 우리가 무가 되는 것 같지만, 또 하루의 일상을 위해 일상을 잠재우는 것이라고나 할까?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참으로 일상에서 일상에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것이 불만스럽고, 지리하고, 대수롭지 않아 보여서 이루지 못할 기이한 일을 계획하게도 되겠지만, 지내고 보면 그 또한 일상의 연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에서 일상이 가지는 신비성이란 것도 작지 않은 것 같다.
일하는 것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은 일이라고 했다. 성경은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인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영성적 일이라고 한다면, 일상은 역시 일이다. 성경은 내내 등장 인물들이 무슨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일은 말하자면 우리가 평일 또는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다. 우리는 이 일의 훌륭함을 노래할 수도 있고 일은 복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일을 오용하여 도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다운 일이란 이 양자의 중간에 자리 잡으며 단순히 일은 일일 따름이다. 고되면서도 견딜만하고 평범하고 길들어 단조롭고 되풀이되는 것이 일이다. 삶을 유지시키면서도 동시에 차츰 소모시키며 불가피 하면서도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은 선의 실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선을 실현시키는 것도 어쨌든 일을 통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하여간 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일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우리 실존의 죄스러움의 발로, 즉 하나님을 통해서만 초극될 수 있는 부조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 등 그 자체 죄가 아닌 죄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있어서 구원의 구체적인 발로가 되었다. 따라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주님 안에 행해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잔치라는 갚음을 받을만한 태도와 마음가짐의 단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신앙의 일상적 형태이다.
걷는 것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가장 일상적인 것 중에는 걸음이 있다. 걸음에 대해서는 걷지 못하게 되거나 갇히거나 불구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야 문득 걸을 수 있음을 은혜로, 기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에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가 되려면 성경을 따라 영적으로 살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걸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일상의 걸음이라는 아주 본원적인 체험의 실마리를 따라 풀이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상의 걸음은 끝내는 우리의 목적지를 향한 걸음이 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걷는다. 그리고 이미 이 신체적인 걸음만으로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음을, 길손임을 말한다. 그리고 움직여지면서도 걸음이 늘 뜻한 데로만은 가지 않음을 체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처럼 깨달아 알고 자유로이 행하는 자의 걸음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에는 과연 인간 실존 전체가 담겨있고 드러난다. 우리는 걷는다. 걸으면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본연의 것은 우리를 향해 마주 오고 있고 우리를 찾고 있다. 이는 다만 우리도 걷고 마주 나아갈 때에 한해서이다. 우리의 마주 나아감이 벌써 우리를 향해 움직여 오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받혀져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은혜이다.
앉는 것
일상에는 걸음과 반대로 또 앉음도 있다. 목적지향의 삶이 있는가 하면 무조건 쉬는 삶도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고된 일이나 먼 길 끝에 고마운 마음으로 앉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치 걸음의 목적이 쉼인 것처럼 결국은 쉬려고 하는데, 모든 움직임은 오직 인간 본연의 충만한 삶의 결정적 자리를 향한 귀정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휴식이 곧 마음과 인간 전체의 고차적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빨리 달린다고 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된다는 법은 없다. 천천히 가는 자가 오히려 목적과 길을 제대로 생각하고 나섰기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거기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거기 도달하는 것은 오직 자기 도피의 헛된 소란보다 평정을 더 나은 것으로 여길 때이다.
물론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을 익히는 길은 여럿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자체로서 지탱될 수 있는 평정은 기도뿐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여러 종류의 휴식을 시도한다. 자연을 찾는가 하면, 친구를 찾고, 부모를 찾고, 때로는 아이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휴식의 종점에는 역시 기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오직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신비와의 사랑의 합일에서만 우리는 다시 더 가지 않아도 되는 데에 도달할 수 있고, 평정을 찾을 수 있고, 앉음과 쉼으로 비유되고 약속되는 저 말씀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보는 것
일상에 인간을 지탱해 주는 근본 기능의 하나는 보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아주 담담하게 객관적인 관계를 맺는 양상으로 체험된다.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계의 넓고 넓은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눈은 또한 성경에서도 말하듯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창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보고 모두 알 수 있다.
보는 눈과 내다보이는 눈은 인간과 세계 사이 안과 밖 사이의 신비로운 중심으로서 거두어들이고 내주며 나타내고 감춘다. 일상의 보는 행위 즉,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의 실존을 보는 사람은 정신적인 눈이 건전한 단순한 눈길을 가진 인간이다. 성경에서는 올바른 세계관을 일상의 눈길에 비유하고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내 눈이 성하여 밝으면 내 온 몸도 밝을 것이다.(마6:22)
웃는 것
일상에는 일의 심각성뿐 아니라 웃음도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웃는다는 것도 매우 엄숙한 일이다. 흔히 그 사람을 말보다도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 웃음이란 좋은 웃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밝은 마음에서 나오는 웃음을 말한다. 이런 웃음은 모든 것과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탁 트인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아에서 해방된자 만이다. 화내지 말자. 어느 경우도 화내지 말자. 그리고 정말 감정이 필요할 때는 온갖 양태로 표현되기 보다는 오직 웃음만으로 표현될 수 있게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켜가자.
좋은 웃음은 사랑의 표시이며 하나님 안에서 포용하는 사랑의 계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웃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의 못난 짓 때문에 그 좋으신 마음 어디선가 맑고 밝게 터져 나오는 그 웃음 속에는 하나님의 광채의 모습이 비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모든 것이 좋다는 진리를 웃음으로 알리시는 역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일상이 천국이 되는 것은 웃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먹는 것
먹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너무나 자주 훌륭한 잔치의 예를 보여주셨기에 그것만 잘 새긴다 해도 먹는 것의 중요성은 얼마든지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제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상적이면서도 매우 신비로운 일을 몸이라는 기계를 돌리기 위한 물적인 충전쯤으로만 여길 위험에 이르렀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으로서 먹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인의 사정이다. 우리 일상의 경험영역에서 식사보다 더 신비로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주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사랑을 통해 세계라는 전체에 자기를 내맡기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세계의 것을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내 몸의 내부까지 동원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드러내려면 함께 하는 식사가 그 우선적 상징이 되는 것이다.
함께 하는 식사는 먹는 이들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상징 곧 실행인 것이다. 왜냐하면 식사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자신을 서로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나누는 식사는 모든 이가 주님 자신인 같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마심으로서 하나님과 서로를 합일시키는 영생의 음식을 삼아 실현되는 궁극적인 일치의 상징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을 때면 일상의 식사도 언제나 축제다운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식사는 일상에 있어서의 축제이다. 그것은 모든 이의 염원인 일치를 알리기 때문이며 일상에서 조용히 그리고 뚜렷이 영원한 삶의 잔치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식사로 인하여 피로를 풀고, 아픔을 그치게 하고, 몸의 나쁜 기운들을 몰아낸 경험들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가?
자는 것
우리는 평생의 삼분의 일을 잠을 잔다. 잠은 우리 삶의 큰 몫을 이루고 있으며 누구나 다 하는 작업이자 예술이다. 잠에 대하여 우리의 체험은 무척이나 인간적으로 확인해 준다. 그러나 성경에서 잠은 그보다 한결 깊은 현실의 표상이자 비유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순한 마음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뜻깊은 꿈을 가리키기도 한다. 꿈은 평상시에 억눌려 있기 쉬운 인간의 심층을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자는 잠은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다. 인격과 자유를 갖추고 자기 자신을 지니고 좌우하는 인간이 잠이 들면 자기를 풀어 손을 놓고는 자기 실존의 존재들에게 내맡긴다. 잠은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잠이란 우리 자신이 무가 되는 것이면서도 또 전혀 무가 되는 것은 아닌 그런 일상이다. 이 아주 철학적인 일을 우리는 매일 밤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참 신비스런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만하다.
하나의 전인적인 행위로 마음을 푹 놓고 믿으면서 잠을 맞는다면 그것은 기도의 내적 구조와 상통하는 것이다. 기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사랑으로 여겨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자기 실존을 믿는 마음으로 내맡기는 행위인 것이다. 기도하면서 잠을 맞으면 잠들면서 빠져드는 자기 존재의 어두운 심연이 축복으로 청정해진다. 그러면 잠은 평온하고 안락해져 삶의 깊은 바탕과 통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온전하게 머물기 위해 자기의 자유 인격과 삶의 모든 의식적 기획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바탕인 것이다. 잠과 기도가 다같이 우리에게 최상의 휴식인 것을 깨닫는 것은 휴식이 없는 세상 가운데서 참으로 소중한 일인 것 같다. 개성과 재미와 열정과 중독에 빠져 분주하게 깨어있는 시간을 포기하지 못하고 의식을 깨워두고 괴롭히는 것은 인간의 큰 불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 자신을 열어 주자.

일상에서의 은혜의 체험
은혜의 체험이란 강생과 십자가 희생으로 그리스도 안에 현실이 된 삼위일체의 성령의 내리심을 말한다. 신비가들은 은혜를 이미 체험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은혜의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먼저 인간 실존에 있어 정신적인 것을 경험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분명 그런 체험을 해보았고 매일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이렇게 본다면 은혜를 체험한 사람과 성인들 내면은 그 얼마나 은밀한 정열로 불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런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사로잡힐까봐 자신이 영적으로 살기 시작하고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다. 성인들은 순수한 영성의 맛을 체득한 것이다. 그들이라고 약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이라고 일상의 습성에 늘 되돌아가지 않아도 좋아서가 아니다. 은혜가 일상과 통념적인 행동도 역시 축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되도록 해줄 수 있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영성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은 그런 나의 영성 뿐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섭도록 깊은 심연이, 그의 무한성이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다 내주어 더는 자기에 속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자신의 세계, 은혜와 영생의 하나님 세계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세 삶에서는 성령의 잔이 곧 그리스도의 잔과 하나이다. 이를 마실 수 있는 자는 오직 허무에서 충만을, 추락에서 상승을, 죽음에서 삶을, 버림에서 찾음을 차츰 맛볼 줄 알게 된다. 대체로 그것은 오직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정신의 이런 해방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신을 해방하시되 언제나 초자연적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은혜의 체험을 오직 자아를 잊음으로써만 찾을 수 있으며 몰아적 사랑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이를 찾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렇듯 죽이면서 아울러 살리는 체험 같은 것이 건재하는가를 이따금 물어야 한다. 그 까닭은 영성생활에 있어 우리가 성령의 체험에서 얼마나 아득히 떨어져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 이다.



Ⅱ.기도
우리는 앞서 일상을 일상으로 있게 하면서 그래도 거기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게 할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항상 진한 경험을 하고 싶어한다. 일상과는 다른 비일상적 은혜경험을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을 말하는 곳에서 이미 기도에 대하여 말하였다. 앉아 쉬는 일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쉼을 위해 기도를 향한다고 하였다. 기도는 분명 일상의 한 부분이다. 오히려 일상이 기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엇인지 부족하여 정말 진한 휴식을 필요로 하고, 정말 나를 던져버리기 원할 때 우리는 좀더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원하는 인간 본질의 모습이다. 일상의 기도는 무엇이며, 비일상의 기도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 가운데 우리는 기도의 단계를 배워야 할 필요를 갖게 된다.
조던 오먼은 그의 책 영성신학의 한 부분에서 기도의 단계를 이야기하였다. 그의 진술을 따라 우리의 기도의 삶을 돌아보기로 하자. 그는 기도를 아홉 단계로 나누어 말했다. 구송기도-묵상-정감의 기도-단순성의 기도-관상기도-정적의 기도-일치의 기도-순응일치의 기도-변형일치의 기도로 기도는 단계를 깊이하여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 동안 수행자들이 해오던 기도의 방법이다. 우리는 물론 성경을 따라 어느 정도 기도의 모습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으나 기도가 이런 단계를 밟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반드시 이대로는 아니더라도 이 단계는 기도가 정말 무엇인지를 드러내준다.
1.구송기도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또렷하게 말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하는 기도이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횡설수설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께 아뢰는 것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기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정말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말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내가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디로 가기 원하는지도 개념을 가지고 또렷하게 알게 된다. 이것이 기도의 첫 단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되 모호하고 무책임하게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또렷한 내용이 있는 만남 그것이 기도의 첫 걸음이다.
2.묵상
구송기도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또렷하게 하면 거기 내가 중시하는 바가 또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냥 구송기도로는 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자리가 있다. 그 때 우리는 그 나타난 주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묵상이다. 한편 묵상은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말씀하는 성경 말씀을 읽고 거기에 대하여 묵상하고, 오히려 나의 기도할 길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생각이 가닥이 잡히지 않고, 기도하고 싶어나 구송기도로 또렷하게 나의 의식을 표현할 수 없는 때에 우리는 이미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알 것은 이것이다. 구송기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 잡념으로 묵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구송기도가 어려우면 성경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옳은 일이다.
3.정감의 기도
우리가 묵상을 통하여 기도의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무슨 깊이를 얻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깊은 기도는 곧 깊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풍부한 기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고뇌가 깊은 기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묵상의 단계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우리는 좀더 하나님께로 깊이 들어가서 사랑이 어린 기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감의 기도이다. 이 정감의 기도는 우리를 사랑으로 순화하여 기독교인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4.단순성의 기도
사랑은 상대의 존재에 기뻐하는 일이 아닌가? 깊은 사랑을 거친 사람은 이제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랑의 기쁜 감정 다음의 평화로운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 때에 기도하는 사람은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어떠하다고 지성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뜨겁게 사랑한다고 감성적으로 외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존재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평화가 놓이게 된다. 정감의 기도까지가 내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도였다면 이제 서서히 하나님께서 내게로 나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도는 일치인데, 내 쪽에서 나아가다가 차츰 하나님께서 내게로 나아오시는 자리에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 단순성의 기도까지를 수덕적 기도라 하고 다음의 기도부터를 신비적 기도라고 부른다.
5.관상 기도
관상이란 내 생각을 내가 본다는 의미이다. 나의 분주한 마음을 그치면 이제 내가 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때 나는 이미 단순성의 기도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자리에 들어가 있다. 내가 보는 것은 바로 그런 나이다. 단순성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나아오심 그 자체라고 한다면, 이제 그것을 응시하는 단계가 관상 기도라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거룩한 지성과 거룩한 감성을 일으켜 하나님을 응시하며, 그렇게 하나님을 응시하는 나 자신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상은 나를 보는 것이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거룩한 기쁨이 있다.
6.정적의 기도
다시 거룩의 지성과 거룩의 감성을 움직인들 무엇하겠는가? 다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적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말하자면 정말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바라보던 상황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나를 추동하여 집어 넣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라기보다는 정적이다. 마치 나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기도 가운데 나의 존재는 감추어지고 하나님께서 나와 일치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전 3단계가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단계였다면, 4-6단계는 하나님께서 내게로 다가오시는 단계이다. 이 정적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가오심이 진행된다. 그리고 기도는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여 내가 하나님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일치된다는 것이다.
7.일치의 기도
기도에서 방언이 있고, 예언이 있고, 몰아적인 경지가 있다는 것은 기도가 이런 자리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적 기능이 점차 하나님께로 사로잡혀 가고 일치되어 간다는 것이다. 일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제 모호하고 불확실하던 것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구송을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확실성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내게서 확실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는 이제 분주함이 없어진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친밀하게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여기에 대해 의심이 없어진다. 이것은 우리 자신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신비적 확신이어서 그 기쁨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 가운데 지루함과 싫증이 없게 된다. 하나님과 일치되어 기쁨에 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8.순응일치의 기도
단순 일치는 우리의 내적 기능이 하나님과 일치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순응일치는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에 순응되어 우리의 전체가(우리의 외적 감각까지-신체적 심리적 영적 모든 요소에서) 하나님과 일치됨을 말한다. 단순일치가 탈혼이라면 이제 탈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일치되고자 하는 갈망 속에 들게 된다. 수행자들은 이 단계는 마치 수행자가 죽음을 원하는 것 같은 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빌1:23에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는데, 순응일치의 기도에 들어가면 그런 소원이 간절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온전히 떠나고자 하는 영적 상태이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1:24에서 이어서 말한 대로 육신에 거하는 것이 ... 더 유익하리라는 말이 이 땅을 사는 우리들에게 알맞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되고 그리고 몸과 영이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할 것이다.
9.변형일치의 기도
수행자들은 이것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결혼이라고 말한다. 일치나 순응일치가 아직은 약혼 정도라고 한다면 변형일치는 결혼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기도자의 영혼이 전적으로 사랑하는 이 즉 하나님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지상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으로서, 이로 하여 영혼은 빛나고 하나님 안으로 변모되어 들어가서 그 영혼은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게 된다. 다소간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중세의 수행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간절히 원하여 오상을 얻기 원했던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프란시스코는 확실히 그의 만년에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픈 바로 인해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고통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여겼다.
과연 오늘의 기도자들은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프란시스코의 이야기는 와전된 것일까? 그러나 어쨌든 중세의 몇 수행자들에게서 오상의 증거가 이야기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일치되려고 갈망했던 그 일만은 분명히 있었던 일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수행이 어떤 실제적 결과를 갖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에 앞서, 그리고 이미 불우함이 없는 사람이 또 더 많은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기에 앞서 기도의 이 한 가지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일상도 돌아보고 기도도 돌아보았다. 버릴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가운데 일상을 살아야 한다. 한 가지 일도 기도하고 행하고, 또 그 다음의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인도받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오히려 일상을 의미 있게 살려낼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일상은 오히려 소실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의 의미도 같이 품게 되리라는 것이다.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일상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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