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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9.경건주의자들의 영성-종교개혁의 계속이란 관점에서

안영혁 | 2003.06.29 01:13
9.경건주의자들의 영성

경건주의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조이다. 또한 종교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원래 이념을 견지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원래 이념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정통 종교개혁은 점차 개신교 스콜라주의로 기울고 말았다. 그 나름의 열정이 있었겠으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라기보다는 자기 교파를 위한 교리적 열정이었다. 바로 그런 어긋난 열정에 반대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경건주의다. 경건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그 경구는 경건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경구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경건주의자들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무슨 국가적 종교지도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거나 단단한 교리를 형성시킨다거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금 성경이 내게 어떻게 보이며, 그것이 실제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국가적 헤게모니를 가지거나 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들의 중첩으로 보인다. 정통 종교개혁만 하더라도 한 제후의 영역에서 자기 교파를 인정받아야 종교적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상황이 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좀더 흘러간 상황에서는 도시적 자유가 형성된 가운데서 정말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정치적 질서의 주님이신가 하고 다시 물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분명 경건주의는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진일보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경건주의는 나름대로 대중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종교개혁만 하더라도 모든 백성들이 고백을 가지고 개신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제후의 신앙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각 개인에게, 그리고 그다지 탁월하지 않은 인물들에게 당신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경건주의는 그야말로 고백하는 각자가 중요했던 사조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에게는 사소한 개인이 중요했고, 그 사소함에 목숨을 걸었고, 그것이 경건주의의 진정한 의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덴저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사제 중심의 교회에 일찌감치 반기를 들고 11세기로부터 평신도 공동체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오히려 사제들의 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 말로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것은 막혀 있었고, 그런 면에서 발덴저들이 선구였고, 경건주의자들은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오늘 21세기 교회는 또 나름대로 역사적 자리가 있지만, 그 내용들을 요모조모 뜯어보면 정통종교개혁의 면모보다는 경건주의의 면모를 훨씬 많이 찾아보게 될 것이다. 물론 경건주의 찬양 일색으로만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 참여에도 불구하고 극히 개인주의적이었던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타계적 천상적 개인주의적 신앙을 낳는데 틀림없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인주의적인 신앙 양상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경건주의는 이렇게 현대의 우리들에게 생각할 많은 것들을 일깨워준다. 이미 20세기를 사로잡은 오순절파의 성령운동이 지구촌을 쓸고 나갔고 아직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그래도 경건주의는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인가 현대적 영성의 실마리 같은 것을 도출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후반부터는 문화 운동은 대중 운동이냐 아니냐가 그것의 의미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정도이다. 그만큼 특출한 사람이 아니어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앙운동 또한 대중운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건주의는 스스로 교회 내의 작은 교회를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가 누구든지 자신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유도하였기 때문에, 대중 신앙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칼뱅에게 기독교강요가 있다면 요한 아른트에게는 「진정한 기독교」가 있다.(이 책은 1605년에 초판을 내었고 백 수십판을 거듭한 당시의 베스트 셀러였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의 성공은 여러 외적인 요인도 있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보면 역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1546년 루터의 서거, 1564년 칼뱅의 서거 후에는 그만한 열정을 가진 개신교 운동의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열정은 결국은 일종의 규칙같은 것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흐름은 이른바 개신교 스콜라주의를 낳고 말았다(물론 경건주의의 기본 개념은 절대적으로 정통 종교 개혁의 교리를 따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 이런 흐름 가운데 극단적이기는 하나 정통종교개혁은 대중 신앙운동으로서는 실패작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지역적 영향을 조사한 보고들은 아주 철저하지는 않아도 정통종교개혁이 대중의 신앙에 분명한 인상을 남겼다고 밝히고 있으며, 지당한 결론이다.

그러나 분명 정통 종교개혁이 신앙의 개혁으로서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3세대 정도의 종교개혁 흐름은 이미 개혁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있다는 비판을 하였다. 그런 비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요한 아른트(1555-1621)이다. 그의 비판은 매서웠다. 루터교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전파하는 그들의 방법 가운데서 오히려 참된 기독교적 삶을 등한히 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요컨대 교리 논쟁을 일삼아서 오히려 회개와 믿음 같은 것의 참 의미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크게 말해서 인문주의 이래로 상공시민사회의 도시화는 진전되고 있고, 자꾸 모든 면에서 주체성의 요구는 높아지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개혁을 시도한 개혁 세력마저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적절한 대답을 가지고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죄를 대적하는 길고 어려운 싸움을 대비하게 해 주며, 새로운 삶을 촉진하는 방법으로서 자기 부인과 자기 성찰을 권장했다. 영적 성장의 추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일의 중요성을 긍정했고, 또 독자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즐거운 연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제공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없었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그 핵심은 아른트가 결국은 행위주의에 기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루터의 가르침을 떠나 멜랑히톤의 수덕적 경향으로 기울 것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이것은 카톨릭에로의 퇴행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논쟁은 오늘도 없어지지 않은 논쟁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루터는 카톨릭의 수덕적 경향에 타협하지 않는 반론으로 나서서 마침내 새로운 신학을 형성시켰다. 그것은 교회의 새 바람이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교리적으로만 자리잡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될 것이다.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이미 교회에 새바람을 불어넣던 루터의 열정은 모습을 감추고 만다. 아른트는 구원받는 행위를 밝히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인에게 들어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밝히려고 한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구원의 서정이라는 주제가 내내 논의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루터의 가르침에 근거할 때 사람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은혜에 근거한 삶은 어떤 것인지 하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했다. 실행이라는 것은 루터에게서도 중요했고 칼뱅에게서는 더 중요했다.(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의 지침으로 의도된 것이다). 은혜의 교리와 그 실천의 보다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전파, 그것이 요한 아른트가 목적했던 바이다. 그는 말년에는 거의 이단으로 지목될 뻔했으나 정통 루터주의자 요한 게하르트(1582-1637)가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했기 때문에 그런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다.

필립 야콥 슈페너(1635-1705)는 1675년에 「경건한 소원」이라는 책을 내었다. 아른트가 진정한 기독교를 낸지 70년이 지나서 이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실은 아른트의 성서 주석의 서문으로 써진 것인데, 나중에 다시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이다. 그러니까 아른트와 슈페너의 연관성이란 불문가지이다. 슈페너는 그렇게 말하였다 한다, “1415년 후스의 시대에 생명나무는 뿌리를 내렸으며 1517년 루터의 때에 그 나무는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1618년 수확자들이 열매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1618년은 말하자면 아른트의 경건주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슈페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요한 아른트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른트를 따라서 당시의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비판하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아직도 성례전을 미신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고, 참된 회개와 믿음이 없는 채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비판하고 거듭남과 새로남의 지속적인 과정을 강조하였다. 이런 면은 믿음의 실제화라고 할 수 있고, 그대로 신앙의 대중화의 방향이었다. 요한 아른트와 슈페너의 역사적 차이라 한다면 아른트는 아직 30년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시기를 살았고, 슈페너는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조약이 이미 끝난 시기에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슈페너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 대해서 반성도 하고 비판도 했을 것이다.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말하자면 역사에도 많은 빚을 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마도 슈페너는 이미 세속화에 대한 우려를 깊이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협력하여 노력하는 것이 과연 대중의 경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그는 경건한 소원에서 성직자들이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여 독재를 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개혁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말한 신앙의 주체화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는 만들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인제사장설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영적 기능이 예외 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오늘의 평신도 신앙운동을 예감하는 내용들이다. 어쨌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궁극에 있어서는 직접적이어야 한다는 면에서 그는 철저했다. 마치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철저했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신앙의 대중화, 주체화, 실제화 등에 타협없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안수받은 성직자들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평신도들의 친교 그룹이 목회적 돌봄을 감독하는데 점차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성직자들이나 국가가 부과하는 징계조처보다는 효과적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헌신을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가르침은 성육신의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구원행위보다 신자의 구속이라는 주관적 행위에 초점을 두었다.

경건주의가 보다 실제적인 운동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에게 이르러서이다. 그는 할레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경건주의의 이상을 신학 교육에 적용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교육 과정에 있어서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학문적 연구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경건을 일깨우는 목표를 우위에 두었다. 그리고 경건주의 방식의 삶과 운동을 위하여 고아원, 성경학교, 학교, 도서관, 출판사 등을 세웠다.

경건주의는 합리주의의 전개와 함께 그 주장히 현저히 위축되었다. 원래부터 신학적이기보다는 성화의 단계에 대한 평범한 관심이 주가 되었던 경건주의는 보다 지성적인 논란을 견뎌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대학자였던 슐라이엘막허의 절대적 의존감정이라는 것도 대단히 경건주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 개신교에서는 믿음과 관련하여 그것을 감정에 의존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슐라이엘막허 조차도 그 당시로서는 절대적 의존감정이라는 개념을 찬탄을 받으면서 구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로부터 경건주의적 관점이 다시 부흥하여 20세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이제는 단지 합리주의적 논쟁이 아니라 신앙의 전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경건주의가 평가될 수 있으리라. 그런 면에서 사실 오늘의 개혁교회는 경건주의가 가진 기본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 그들은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구체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그 답을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경에서 얻으려고 하였다. 경건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는 그러한 경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다. 오늘에 이르러 영성을 새삼 이야기하는 것도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의 경건주의의 부활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경건주의의 초기 대가들은 대체로 회개를 매우 중시했다. 프랑케는 신생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죄를 대적하여 싸우면서 회개를 체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기쁨을 얻는 것이라 하였다. 야콥 뵈메는 보다 신비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경건주의자들은 대체로 그런 경향을 가졌다. 여기서 다시 고대의 잣대를 한 번 들이대볼 만하다. 그것은 과연 단성론과 양성론 둘 가운데 어디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루터로부터 심각하게 죄에 대하여 고뇌하는 것은 인간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고, 그만큼 그 근본 기조는 양성론에 가깝다. 그러나 급진적 경건주의자들은 신비적 합일과 새로남을 강조하는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슈페너 등에 비하면 회개에 대하여 최고의 중점을 두지는 않았다. 회개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행복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엠마누엘 스웨덴보리 같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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