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21세기 자본
겨울 방학을 맞아서 하루 날을 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공부하기로 했다. 필자는 그 중 후반부를 맡기로 했다. 그래도 피케티의 원래 의도를 알기 위해 서장을 읽고 그 서장을 생각하며 말하자면 그의 해결책을 알고자 노력했다. 약 10장분의 원고가 되었는데, 그래도 책의 소개로서는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싣는다.
Thomas Piketty, 장경덕역,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2014.
21세기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에 대한 피케티의 해결방안
우선 인상비평적으로 토마 피케티를 이야기할 필요를 감지한다.
1) 우선 그는 이 글을 통하여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제국주의를 통하여 이미 상당한 부를 쌓고도 또 다시 일어나는 유럽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마도 그의 관심사인 것 같다. 그에게 제3세계가 별로 관심거리가 아닌 것 같고, 미국은 하나의 비교치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아시아인으로서 볼 때는 그의 정당한 진술에조차 묘한 반감 같은 것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2) 그래도 그는 확실히 마르크스를 극복할 수 있는 경제학적 방법을 주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연속적이기도 하고, 불연속적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어떻든 그 당시 경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한 많은 경제 관련 실제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연속적인 것이고, 혁명까지 불사할 만한 결론을 얻어내기에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불연속적이다. 그러니까 토마 피케디는 어쨌든 자신이 마르크스보다 자료에 있어서 더 정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온 세계가 그의 이 책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일 것이다.
3) 읽고 보니 비전문가로서는 서론이 특별히 중요했다고 느낀다. 그의 서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본론이 요청된 것은 물론이고, 아마도 전문가들로서는 그런 본론이 있어야만 서론적 진술들을 인정하고 그의 대안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었으니까, 그의 본론이 불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비전문가들이 그의 주장을 대략 훑어 보는 데는 서론이 중요하다. 그리고 웬만하면 서론으로 만족하는 것도 읽을 거리 많은 세계에서 충분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4) 이 책은 또 경제적 불평등이 결코 소득의 불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이 책이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멸하면 좋을 그러나 불멸인 부등식 r>g (자본수익률>경제성장률) 이것이 문제이다. 일단 자본으로 형체를 갖추고 나면,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아도 그 수익이 노동 소득보다 더 많다는 것, 이것이 세계에 경제적 불평등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 사실은 아주 분명하게 파악하였다. 감감한 기억으로는 그래도 마르크스는 ‘지대’를 자본의 대표로 보았는데, 피케티를 따르면 이제 금융소득이 지대를 능가하게 되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겠다. 눈치로 살피건댄, 요즘은 각국의 부의 총액을 주가 총액으로 가늠하지 않나 싶다. 그 주가 총액은 실로 지대라기보다는 금융 자본으로 보인다. 또한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를 금융자본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5) 그리고 우리가 이미 익히 듣고 있는 대로 피케티는 세금을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금을 위해 그가 내 놓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의 저술은 그 자체가 적어도 경제적인 것은 실제 돈의 흐름을 파악한 자료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이 세금이라는 것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자료가 중요할 것이다. 그는 세금 중수를 위해 자료를 사용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보다는 길이 그 뿐이라는 입장인 것 같다. 그리고 경제 당국이 그 외길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은 되어 있으니 가능하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료에 대한 인식은 혁명을 피하게 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6) 피케티를 읽고 보면 그의 논의를 둘러싼 다른 논의가 있고, 그 논의는 몰라도 피케티의 이론으로 견주어 볼 경제적 사건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피케티 공부를 하는 것은 일단 이런 외적 환경들 가운데서 다소간 사용이 되는 것 같고, 그와 관련된 교회 지체들의 삶의 기쁨과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질 때, 그의 연구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보호무역주의로 피케티가 내 놓는 방향성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피케티는 말하지 않았지만, 유럽의 보수화나 보호무역주의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낙성대경제연구소의 김낙년교수는 한국에서의 경제적 불평등의 진전이 피케티의 진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당한 자료들을 통하여 입증하였다. 이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세계부와소득데이터베이스’에 한국 자료로 입력된다고 한다.
인상비평 결어) 그러니 피케티는 마르크스 전후의 경제적 추이에서 출발해서 오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경제적 변화를 통계 자료를 기반하여 정리하고, 불가피한 미래의 선택에 대해서도 제안한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적 귀납법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수학은 그 기본의 연역적 원칙에 맞추어 답에 도달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경우에 n항에 대한 추정을 하고, 거기로부터 답을 얻어낸다. 그 n항을 얻는 방법이 기존의 연역적 법칙이 아니라 항의 존재를 귀납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의 연구 방법은 그런 수학적 귀납법 같은 인상을 준다. 경제가 어떤 불변의 법칙을 따라서 규범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통계를 보면 갈 길이 보이고, 더 좋은 길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세금을 잘 징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상비평 첨언) 비트코인 이야기가 한참 매스컴을 달구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뭔지를 모르는데, 토론은 대단했고, 이에 대한 국가의 조치는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다. 비고적 선한 정치 집단인 것을 자부하는 현재 정부의 입장을 고스란히 담아서 방송에서 이야기를 한 사람이 유시민이고, 정재승은 그 이야기에 빠진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유시민의 경우에는 의외의 사람들에 대한 고려가 약했고, 정재승의 경우에는 사회를 관통하는 도덕성에 대한 고려를 어디다 놓을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사회계와 과학계의 대표적 인물이니만큼 헛소리들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도 피케티의 조언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비트코인과 관련해서는 어떤 통계가 가능할 것인가? 그 필요한 통계의 영역들을 찾는 것 자체가 비트코인의 존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고, 그에 대한 통계적 자료들은 비트코인과 관련하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어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피케티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정말 피케티의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짐작컨대 제1부는 소득과 자본의 개론적 설명이고, 2부는 다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소득의 변화추이를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3부는 그와 같은 개념과 현실의 변화를 거친 다음 현재 세계에는 어떤 모양의 불평등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 요약발표에서는 그 불평등 구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7장의 ‘불평등과 집중’을 살펴본 다음, 이 불평등이 현재 세계적으로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3부의 마지막 장인 12장 ‘21세기 글로벌 부의 불평등’에 도달할 것이다. 제 4부는 이런 형편을 모두 고려할 때 내 놓을 수 있는 방안들인데, 13-16장까지를 핵심 통찰을 중심으로 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들어서면서 결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이 내용들은 어렵지는 않은 것 같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마지막 4부에 대해서는 그 형태만은 마치 로마서 성경공부를 하던 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계속하여 자본소득에 대한 징세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데, 그 진술의 국면을 바꾸어 가면서 거듭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마치 로마서가 비유를 달리하면서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진술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7장 불평등과 집중
우선 피케티는 마르크시즘이 나타나고 러시아 혁명에 도달하기 전 시기인 19세기와 1970년대 및 1980년대 부의 양상이 유사하다는 말에서 출발한다. 19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이 세습되었는데, 1970년대 이후의 세계도 그런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진술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세대간의 경쟁은 결코 자본을 세습하는 사람들과 노동으로 소득을 얻는 사람들 사이의 갭 정도의 엄청난 것은 아니라고 짚어내는 것이다. 자본이 세습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얼마간의 문제로 세대가 노동 소득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 결코 불평등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의 세습 혹은 자본의 소유는 단지 자본 소득의 구조적 폐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 소득의 양상까지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본을 가졌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매길 때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다(286). 그래서 자본은 2중적 불평등을 생산한다. 경제 성장률을 상회하는 자본 소득을 거두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불평등이지만, 그 외에도 노동의 구조를 왜곡시켜 더 많은 노동소득을 얻는다는 것이다(292~). 오늘날 미국의 CEO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이다. 피케티는 현실에서 가장 불평등이 낮은 편인 북구의 경우 상위1%가 자본은 20%, 총소득은 10%를 차지하며, 상위10%는 가본을 50% 총소득은 3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불평등이 높은 경우는 오늘의 미국으로 보는데, 상위1%가 각각 35%, 20% 상위10%가 각각 70%와 50%를 차지했다. 피케티의 말은 미국의 이런 통계는 유럽의 20세기초와 비슷하며, 2030년이 되면 미국은 거의 유럽의 20세기초와 같으리라고 본다.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피케티의 진술은 알고 보면 매우 상식적이다. 우선 경제적 불평등에서 노동소득의 불평등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국가의 총소득 중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소 2/3에서 3/4에 걸치기 때문이다. 해마다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큰 비율이 있기 때문에 노동소득의 불평들을 예사로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한편 그래도 보다 치명적인 불평등을 낳는 것은 역시 자본소득이다. 피케티는 이 불평등을 극심한 불평등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본소유의 불평등이 완만한 사회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309-310)말을 할 정도이다. 부가 얼마나 집중되는지 부를 소유하는 것은 하나의 초현실로 받아들여지는 때도 오히려 허다하다고 본다. 가장 가난한 50%는 예외없이 10%이하의 부를 소유하고, 2010-2011의 프랑스 통계를 따르면 상위 10%가 전체 부의 62%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장 21세기 글로벌 부의 불평등
부의 불평등이 우리 시대에 국제적으로는 어떻게 나타날까? 피케티는 끈질기게 여기에도 r>g 부등식을 적용한다. 특히 산유국들은 국부를 형성시켜 이것을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투자하는데, 자본 수익률은 어떻게든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는 수익을 올리게 된다. 자본이 수익을 올리게 되는 구조를 피케티는 미국 대학들의 기금을 예로 들어 잘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약 300억 달러에 달하는 기금 운용을 위해 매년 약 1억달러 그러니까 총 기금의 약 0.3%를 사용하는데, 수익률은 4-5%에 달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는 것이다. 산유국들의 국부 펀드도 나라에 따라서는 그런 수익을 올린다. 국제적으로 볼 때는 긴장감이 느껴질 만큼 그들의 석유는 엄청난 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석유를 채굴해서 단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수입이 자본으로 바뀌면 해가 갈수록 더 강력한 부가 되고 가속적으로 수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을 모든 비산유국들이 넋을 놓고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적 위협을 느끼게 되면 모종의 개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치적 개입이다. 해외에서 들어온 국부의 힘을 제한시키는 정치적 조치를 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국제적 분쟁을 불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부 펀드의 투자 대상이 되는 나라들은 그 국부 펀드가 파고 들어오는 것이 위협이 되겠지만, 반대로 국부 펀드를 투자하는 나라들도 그것이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투자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피케티의 지론이며, 실제로 이미 그런 현상들은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점 특이한 경우도 있다. 사우디는 자신들의 국부펀드를 비교적 수익률이 낮아서 미국 대학들은 결코 투자하지 않는 미국의 국채에 투자하고 있다. 피케티도 여기에 대하여는 확신을 갖지는 못하지만, 사우디의 이런 투자는 말하자면 미국에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것인데, 그러면 미국이 사우디를 지켜준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라크전 같은 상황에서 실제로 그런 의도가 적중한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하여간 이런 다기한 상황들과 관련하여 피케티가 종국적으로 하려는 말은 국제적 투자가 일련의 불평등을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무한정으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치적 힘 때문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결국 더 치명적인 것은 한 국가의 경계선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별로 신성할 것도 없는 자본화된 사유 재산에 대하여 지금까지 국가는 보호를 하여 왔고, 앞으로도 제도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이는데, r>g라는 부등식에서 보는 바 그대로 불가피하게 불평등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것을 넘어가는 방법은 자본에 대하여 높은 세금을 물게 하는 것 뿐이라고 본다. 이른바 정치경제학적 세계질서가 봉건국가가 무너지던 그 시대로부터 계속되어 왔고, 입법 사법 행정 모두가 자본을 보호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인 것처럼 여겨 왔는데, 자본은 그렇게 신성한 가치는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이 구조화되지 않도록 관리되지 않으면 재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불평등과 21세기 초반의 불평등 수치가 근접하려 한다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일이 아닌가? 19세기 불평등이 봉건주의 시대의 잔재였는데, 많은 면에서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 시대도 자본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또 다른 형태의 봉건주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세기의 불평등이 계급적 불평등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에 다가올 수 있는 불평등은 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가 걱정했던 것도 이 문제였다. 자본을 신성시하는 자본주의는 필히 패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의 목숨을 좀 연장시켜 준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터지자 자국의 승리를 위하여 부자들이 재산을 내 놓았거나 아니면 자본을 수용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불평등의 비율을 낮추어 놓았고, 전쟁 후에 경제 성장률이 높은 동안에는 말하자면 r>g 부등식이 보다 약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r-g의 값이 작았다는 말이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그 값이 커지고 있고, 그 값이 커지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자본은 지배력이 커지고 불평등이 덩달아 커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국제적 불평등을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정치가 그것을 감소시키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한 국가 내의 불평등보다는 덜 치명적이라고 본다. 피케티의 이 책이 탁월한 것은 내내 r>g라는 공식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명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리고 살피건댄 그 말이 맞는 것이다.
이제 피케티가 제시하는 해결책에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그 해결책이라는 것도 말하자면 r-g의 값이 커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될 것이다. r=g가 된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피케티는 말하게 될 것이다.
제13장 21세기를 위한 사회적 국가
피케티는 굳이 봉건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경제학자답게 “세습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19세기의 불평등과 21세기 초의 불평등에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이 바로 이 세습자본주의이다. 자본을 쌓아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인위주로 자본을 지켜주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이런 개인적 자본을 신성시하는 것에서 나와서 사회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사회성을 위해서는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사회적 조치들을 견지하는 국가를 우리는 사회적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이 이미 다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국가의 세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대변한다. 1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도 국가의 세수는 전체 국민 소득의 10%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그 액수가 비교적 적다고 생각되는 미국만 해도 35%에 이르고, 유럽의 더 적극적인 사회적 국가는 50% 전후의 세수를 기록하고 있다. 우선 피케티는 이것이 부자의 돈을 뺏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능력이 되는 만큼 세금을 내게 하고 그것을 평등하게 나누어 쓰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징수한 세금은 대체로 3가지 개념의 일들에로 지출된다. 공공지출과 대체소득과 인전 지출이 그것이다. 공공지출이란 교육 의료 등에 대하여 국가가 지출하는 것이고, 대체소득이란 한 마디로 노동이 아니라 연금을 통한 소득을 뜻하는 것이며, 이전지출이란 가족수당이나 최저보장소득 같은 것이다. 이전지출은 말하자면 소득과는 다르지만 이전은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불을 해주는 것이다. 세금은 이와 같은 일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시 불평등을 최소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징세를 해야 하는데, 피케티는 “자본에 대한 글로벌 누진세”라고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불평등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시키는 것은 노동소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소득에 있기 때문에, 그 자본소득에 대하여 반드시 징세해야 하며, 또 자본이 커질수록 더 소득률이 높아지는 만큼 당연히 그 세금은 누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글로벌 누진세를 언급하는 이유는 비록 국제적 불평등이 국가 내의 불평등만큼은 심각하지 않다 하더라도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원천이기는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누진세를 글로벌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조세피난처를 따라 옮겨 다니는 자본에 대한 자료가 글로벌하게 공유되고, 그 공유된 자료에 대한 징세를 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국이 더러는 작은 정부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런 작은 정부를 적용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피케티는 특히 2008년의 금융위기가 1930년의 대공황과는 달리 비교적 여파가 작았던 이유는 국가가 최종적 대부처가 되어 주고, 대부를 위하여 사회에 금융의 유동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1997년 겨울에 겪은 금융위기는 사실상 대공황의 위험을 품고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가 그것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사태가 글로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2008년의 금융위기는 그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진 대책으로 넘어간 것이다. 미국이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하여간 미국은 엄청난 자금의 유동성을 제공하였다. 유럽의 실제적 형편은 발표자로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들도 마찬가지 조치를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여러나라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어려울 때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연금에 관하여는 기본적으로 미리 부과하여 그것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직전 세대의 노년을 지금의 세대가 책임지는 것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경제는 성장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성장하는 경제를 기조로 하여 연금을 지불하여야만 한 사회의 발전을 따라 정당한 보장을 제공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국민연금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 저소득 목회자들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다. 어쩌면 교단은 가만히 은퇴 연금을 받거나, 오히려 그 연금에 손을 대어서 물의를 일으킬 일이 아니라,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저소득 목회자들에 대한 대책을 숙의해야 할 것이다. 피케티는 현재 자본이 작은 국가들은 사회적 국가를 세우기가 어렵다는 말을 “극히 중요하다”는 말로 대신하는데, 이는 말하자면 유럽 중심으로 고찰한 다음, 더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국가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하는 말로 보인다. 고약해 보이지만, 현실은 그의 말대로 그렇다. 그런 면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북구의 나라들이 중국이나 인도나 베트남보다 훨씬 사회주의적이다.”
14장 누진적 소득세를 다시 생각한다
경제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13장까지만 도달해도 이미 우리시대의 이해에 대한 일정한 지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3장에서 피케티는 우리시대의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갈 방법은 자본소득에 대한 글로벌 누진세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그 누진세라는 것이 대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이제 다시 누진세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를 분명히 하려 한다.
우선 피케티는 모든 종류의 세금에 누진세를 적용시켜야 한다고 보며, 당연한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금의 종류를 먼저 알려준다. 소득세, 자본세, 그리고 소비세가 있고, 현대에는 사회보장 기여금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 소득세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에 대한 세금이고, 자본세는 자본총량에 대한 세금이며,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일정부분 결부되어 있다. 소비세는 납세자의 소득이나 자본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은 간접세적 성격을 가졌다. 피케티는 비록 각 물건의 구입에서 서로 다른 세율을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총소비 금액에 따른 총소비세를 적용시킴으로써 소비에 대하여 세금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부조리를 넘을 수 있다고 본다.
한편 피케티는 누진세와 관련하여 20세기 세금 부과가 주먹구구식으로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나마 누진세를 적용시킨 것은 긍정적인 일이기는 하나, 세율과 세액에 대한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그래야 되지 않겠느냐는 사회적 도덕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피케티는 이제는 상당히 잘 준비된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각 나라들이 자료를 쌓아왔고, 그 안에서 비교치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미 누진세의 도덕적 의미에 대하여는 찬동한 셈이니까, 이제 후로는 그것이 정말로 잘 작동이 되도록 조치를 구하는 것이 요청된다고 본다.
제15장 글로벌 자본세
피케티는 결국 국가가 개인의 자본을 옹호하는 체제가 아니라 사회가 공존하는 사회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또 그 사회적 국가를 실현하는 방법의 핵심은 누진적 소득세를 철저히 관철하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과 결부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617)의 실현이다. 국제적 금융투명성이란 조세 피난처등의 불투명한 자본 흐름을 이겨내는 징세 자료의 투명성을 말한다. 피케티는 12장에서 이미 “부유한 국가들은 정말로 가난한가?”라고 하면서 부유한 국가들의 국가적 순자산이 오히려 줄어들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정말 부유했던 국가들이 가난해진 것인가 하고 묻는다. 아니라는 말이다. 피케티는 이 자료들의 결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잘 지적하였다. 독일 일본 등의 몇 나라를 제하면 그렇게 자산이 줄어들었고, 뿐만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은 작은 자산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쪼그라든 상황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그 자산의 총합을 구해보면 세계 전체가 그냥 이유도 없이 자산이 줄어 들어 있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지구는 화성이 소유한 것이 틀림없는”(556) 것 같다고. 이것은 말하자면 자료의 투명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감추인 자산은 최소한 총 자산의 10%는 될 것으로 판단되고 더 높여 잡기로 한다면 30%로 잡히기도 한다. 이 감추인 자산들은 말하자면 조세 피난처 같은 곳으로 가서 거기 쌓여 있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이 기업들에 감세를 단행하자 애플사가 세계에 널린 회사조직을 미국으로 가져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말하자면 조세 피난처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미국의 조치는 조세피난처에서 자본을 불러낸 효과는 있지만 감세를 매개로 하였기 때문에, 글로벌 누진세라는 관점에서는 그리 건강한 방법은 못 되는 것이었다. 세계 어디서든 기업의 활동이 드러나도록 하는 금융 투명성은 실로 중요한 일로 보인다.
1월 29일 아침 서울시가 버스 노선을 위해 빅데이터를 활용했다는 기사가 실렸다(동아일보, 공공사업 핵심자원으로 뜨는 빅데이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hm&sid1=105&oid=020&aid=0003124754). 기술적으로는 이런 빅데이터가 사용될 환경이 충분히 준비된 것이 분명하다.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글로벌 조세자료를 동원하는 국제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트럼프가 명백한 보호무역주의를 취하고 있는데, 피케티는 이런 보호무역주의에 대하여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런 보호무역주의는 국제적 협조에로 나가는 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금융의 투명성이란 글로벌 사회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윤리적 행위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마르크시즘이 보여주었던 윤리적 요구 같은 것이 보여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체제를 전복하자는 요구는 아니고 함께 가자는 요구이니, 그래도 실현가능성은 좀더 높다고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모더니즘 사회의 살아남기 전략이었던 셈이고, 피케티의 처방은 빅데이터 시대의 살아남기 전략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는 확실히 좀더 발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조치는 부자들이 결심할 사항은 아닌 것 같고, 늘 국가적 차원의 윤리적 결단에는 정치가 나설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다. 그래서 역시 긴장도는 높다. 가닥을 잡기 어려운 경제계에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등식 r>g의 끈질긴 추적으로 피케티는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피케티가 경제학 관심자나 진보적 학습자들을 넘어서는 자리까지 읽혀지고, 실현되는 것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제16장 공공부채의 문제
공공부채란 아직 징세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에 대하여 정부가 이를 당겨서 써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현재의 징세 제도로는 필요한 만큼의 액수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되니까 부자들에게 채권을 팔아서 국가가 그것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공부채는 국가가 부자들에게 돈을 빌려 쓴 것인 것, 형식은 달라도 효과는 징세와 같은 것이다. 피케티의 요점은 이런 공공부채라면 그것을 슬며시 해소시키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사회가 이런 공공부채에 대한 부담을 덜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우선 모든 공공자산을 민영화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공공자산을 부자들에게 다 팔아서 부채를 매우면 된다는 것이다. 공공건물, 학교, 대학, 병원, 경찰서, 사회기반시설 및 기타 공공자산을 다 팔아치우면 공공부채를 팔아치울 만한 크기가 된다고 본다(651). 그러나 피케티가 이것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모든 공공시설에 대하여 임대료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영화의 위험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래도 일러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공공자산에 대한 기여를 전혀 하지 않는 부자들이 과연 사회에 대하여 어떤 존재인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공부채만큼의 국채가 어긋난 경제운용은 아니라는 것도 함께 보여준다.
피케티는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파격적인 징세를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이 파격적인 징세를 통하여 국채 문제를 해결하고, 공공시설들은 여전히 공적자산으로 남기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치적 결단을 해야하는데, 정치가와 부자들은 한 통속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지적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피케티는 그리이스의 금융위기를 예로 들었다. 이 위기를 이기기 위해 헤어컷 조치가 취해졌다. 이것은 채권의 일부를 채권자들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는 방법인데, 이 충격적인 방법은 금융공황이나 연쇄적 파산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충격이 큰 것이다.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파격적 세금이 더 온건한 방법이라 보는 것이다. 국가들은 자신들이 이미 그리이스와 같은 처지로 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저 파격적 징세를 실시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피케티는 설득하고 있다.
한 가지 재미 있는 발상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공공부채는 그대로 두고도 그에 대한 부담은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국채란 사실 실물은 없는 채 금액으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명목자산인데, 실질자산에 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그 명목자산의 실질적 가치는 떨어지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국채에 대한 사회적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전략은 실제로 독일이 많이 사용해 왔었다(655-66). 그러나 이 방법의 위험은 표적이 되는 부자들이 아니라 자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피해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좋은 방법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있어도 사회는 가난한 현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런 저런 방법들이 있지만, 부작용도 함께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역시 징세가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피케티의 연구결과이다. 서둘러 그의 결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매우 짧지만 통찰이 넘치는 것 같다.
결론
피케티의 결론은 결국은 마르크스의 시대와 자신이 시대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현실 인식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판단이 명백히 옳았더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것은 과학적 접근이 없는 경제적 불평등해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과학적 접근을 결국 프로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았지만, 피케티는 자본에 대한 글로벌 징세로 보는 것이다. 그는 정치와 사상은 분명히 경제와 사회와는 다른 영역으로 존재하지만, 전혀 별개로 존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체제의 대립(공산주의와 자본주의)으로 갔을 때는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감히 입을 대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체제 경쟁을 넘어서, 말하자면 과학적으로는 징세를 위한 빅데이터를 작동시키고 정치는 이런 활동을 돕는 역할을 해낸다면, 오늘의 경제적 불평등을 어느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피케티는 마르크스를 계승하면서 또한 넘어서고 있다.
현실인식에 근거한 피케티의 마지막 묵시는 놀랍다.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의 생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숫자에 대하여 예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숫자란 말하자면 세금이라거나 자본수익률이라거나 경제성장률이라거나 하는 것을 나타내는 숫자들을 말한다. 그것이 투명해지지 않으면 늘 자본을 쥐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번의 체제전복으로 세상이 바뀔 수는 없는 것이며, 경제활동을 하며 사는 한은 이 숫자에 대한 예민함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시대의 과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케티에 부딪혀 보니까, 마르크스가 목소리를 높였던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가졌던 의미도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종교인 세금제도에 접해서도, 돈도 없는 목사들이 많은 세금을 내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자신의 경제생활을 투명하게 한 상태에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적게 낼 방법도 찾으며 사는 것이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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