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이것을 생각하라(3)
아무리 성경의 권위보다 사람의 이성을 앞세운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라지만, 대놓고 ‘우리는 성경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대로 교회를 인도합니다’라고 홍보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본주의에 물든 신학을 흡수한 목사도 대중이 원하는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교회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강단에서 설교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파악하거나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교회의 신조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교회를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그 교회가 믿는 교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고, 바른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교회는 결국 기둥이 빈약하고 터가 불안정한 위태로운 집과 같기 때문이다(딤전 3:15).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 이사 가는 사람만큼 모래 위에 세워진 교회로 옮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 번째 우선순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는가?
성경적인 교회는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기 위해 수고한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교회는 인간적인 친밀감과 체계적인 조직과 형식이 빚어낸 일치감을 가지고 서로의 다양한 교리와 분별을 관용으로 품는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일치된 교리와 분별로 하나가 되어 나머지 인간적인 다양한 특성과 차이를 뛰어넘는 공동체다. 쉽게 말해 교회에 부하거나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와 비천한 자가 함께 할 수 있으며, 건강한 자와 병든 자가 있을 수 있고, 출신과 민족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반된 교리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와 경시하는 자가 함께 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다를 수 있더라도 교회는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분을 아는 일에 각자의 견해를 갖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도록 이끄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성도를 바른 교리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은 설교를 들으면서 다음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1.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주일 강단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라고 밝히는 설교자는 아무도 없다. 강단 설교는 하나님의 권위와 함께 전달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설교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류가 없고 하나님의 절대 권위가 담겨 있는 진리라고 인정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도 결국 자기 의견을 하나님 권위를 이용해 주장하는 것뿐이다.
설교자가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하는가? 가령 명백히 본문에 기록된 성경의 저자를 부정하거나 고대 근동 혹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가지고 성경의 의미를 희석하거나 왜곡하는가? 현대 사회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슈를 다룰 때(예로 동성애나 페미니즘), 성경 본문이 시대착오적 가르침이거나 저자의 편향된 견해라고 취급하지는 않는가? 혹은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사랑’이 골자고 나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마 5:18) 아니면 사람의 철학과 지혜로 난도질한 성경을 가지고 철저히 인본주의적 교훈만을 전달하는가?
2. 말씀의 역사적-문법적 의미를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는가?
어떤 설교가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이고, 또 어떤 설교가 인본주의적 설교인가? 그것을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잣대는 설교자가 본문을 어떻게 풀어 설명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어떤 사람은 신비주의와 미신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수단을 어리석고 난해하게 사용한다(타로 카드로 점을 치듯이 성경 본문으로 신탁을 받는 괴상한 방식의 성경 해석). 하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해석의 방식을 통해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하고 적용하게 하셨다. 문학적 장르 안에서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외부와 내부 문맥 즉 역사적, 문화적 배경 그리고 문법적 표현 방식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소설이나 수필 등을 읽을 때, 자동으로 이런 해석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친다.
만일 설교자가 성경을 권위 있고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그는 성경이 의도한 의미를 올바른 해석을 통해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성도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의도한 바고 그 근거는 여기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 내용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설교자가 단순히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가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적 권위와 함께 선포하기 원한다면, 그는 성경이 의도한 의미를 찾기 위해 올바른 해석법을 사용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원래 담고 있는 의미와 상관없이) 본문의 표현만을 가져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할 뿐이다.
말씀의 역사적-문법적 의미를 풀어 설명하는 방식의 설교를 일반적으로 ‘강해 설교’라고 말하는데, ‘강해 설교’라는 말이 붙어있다고 해서 모두 강해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청자가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구나’라고 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성경이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고 있구나’라고 보게 해주는 것이 참 강해 설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설교는 주해를 목적으로 하든 주제 전달을 목적으로 하든 강해 설교이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설교자가 어떤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설교는 강해 설교라고 부르기 힘들다.
3.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는 말씀인가?
모든 설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하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고(요 5:39), 성경을 조명하여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광,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신다(요 16:13-14).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설교가 지나치게 교훈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는 목적을 상실한 채 단순한 교훈만을 제시하는 데 그치기 쉽다는 말이다. 단순히 오래 참고 살라는 가르침,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결국 잘될 것이라는 위로, 서로 사랑하고 착한 말을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도덕적 권면은 성경적인 설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교회에게 선포하신 설교문인 서신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 안에 복음의 본질과 그 복음에서 흘러나온 교훈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둘은 끊어져 있지 않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 역시 그 견고한 결합을 깨지 말고 함께 선포해야 한다. 단순히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오래 참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저 착한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어떻게 우리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되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기본적으로 설교 강단을 통해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 성경 본문을 통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신 방식대로 즉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해 파악하고 그대로 선포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적용을 이끌어내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엄중하고도 어려운 과업이긴 하지만,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항상 수고하고 애써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권면한 것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1-5)
대중이 듣기 원하는 달콤한 이야기를 귀에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청중이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때로 듣는 이로부터 심한 박해와 고난을 받을지라도 오히려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말씀만을 전파하고 바른 교훈만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설교자가 있는 교회, 바로 그 교회를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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