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제 3의 공간

강도헌 | 2021.12.21 06:40

3의 공간

 

아리스토테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언급하였다. 지금 나는 사회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곱씹고 있는 중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단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사회라고 정의를 했는지를 사색 중이다. 그러면서 유추되는 단어들 몇몇이 있다. ‘문화’, ‘소통’, ‘공생’, ‘진화’, ‘공간등의 단어들이다.

 

누가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인간을 만든다.”고 했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순간부터 나는 주역’, ‘도덕경’, ‘풍수학등에 호기심을 느끼며 짬짬이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사회학 학계에선 공간의 사회학에서 마음의 사회학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음도 공간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올덴버그는 3의 장소를 언급하였다. 1의 장소는 이고, 2의 장소는 직장또는 학교이고, 3의 장소는 비공식적 회합의 장소를 총칭한다. , 모르는 사람,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편안하게 출입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올덴버그에 따르면 제 3의 장소에서 모든 위대한 문명이 탄생했다. 로마의 포럼, 파리의 카페, 런던의 펍, 피렌체의 광장, 비엔나의 커피하우스, 독일의 맥줏집 등이다.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3의 장소로서의 스타벅스의 경영철학은 적중했다. 슐츠는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매개체라고 정의하며, 스타벅스를 단순한 유통이 아니라 총체적 문화라고 말한 것은 그가 단순한 장사꾼만은 아님을 느끼게 해 준다. 스타벅스를 통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유럽은 차나 커피 대신 술을 가까이 했다. 게다가 당시 커피는 이슬람의 음료라는 인식이 강해서 종교적 거부감도 심했다. 하지만, 유럽에 커피가 도입되는 일차적 계기는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금주운동을 동반했고, 이 과정에서 정신을 맑게하는 커피의 가치가 재발견 된 것이다. 알코올과 달리 커피는 정신을 일깨우는 음료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성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상적인 음료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가 일상화 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유럽에는 관습의 대변화가 일어났다. 남성적이고, 중후함을 강조하던 바로크 시대가 끝이 나고, 여성적이고 가벼움과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로코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융거).

 

고대와 중세시대까지 제 3의 장소는 광장이었다. 그래서 신전이나 대성당 앞에는 커다란 광장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부터 제 3의 장소는 카페로 이동하게 된다. 스미스의 국부론, 뉴턴의 만류인력의 법칙, 로크의 사회계약론 모두 런던의 카페에서 탄생하였고, 파리의 카페에서는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 디드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카페를 즐겨 찾았다. 실제로 1789712일 카페 드 포이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카페가 없었다면 프랑스 대혁명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카페는 살롱이나 술집과 다르다. 술집이 주로 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집단주의의 무대라면, 카페는 교양으로 무장된 시민들의 소통과 정보와 토론의 장소였다. 살롱이 귀족주의와 가깝고, 음주문화가 노동자 계급과 가깝다면 카페는 시민적 공간이었다.

 

지금 한국의 제 3의 공간은 어디일까? 성전이 기도처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소라면, 광장과 카페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 인식의 확장과 관계의 확장이 일어나는 곳이었지만, 현재 한국의 카페는 고도의 상술로 인해 사치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아무나 편안하게 출입하기 쉽지 않은 장소이다. 또한 카페에서 정보교환이나 진지한 토론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면 SNS가 제 3의 공간일까? 글쎄다. 옆집 창문 넘어로 잠깐 인사를 나눌 뿐이다. 그래서 그 창문 쪽 벽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은 쉬지 않고 발전하는 가운데, 인간의 의식은 퇴보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이 공간의 부재로 인한 인식의 성장판이 닫혀버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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