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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절망에서 솟아난 희망
나는 요즘 교회의 어려움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가지는 감정의 매서움이 어디까지인가를 보는 듯합니다. 신앙의 오용과 뒤틀림 속에서 20년이 다되도록 배웠던 신학도 어려서부터 익혔던 신앙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도 경험하구요. 부목사의 그 허약한 현실적 기반을 절감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사람 속에 내재하는 전혀 다른 양 극점을 보면서 절망에 휩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롬7,24)고 하는 바울의 탄식이 아니더라도 나는 인간 안에 그 상극(相剋)의 점들이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가를 보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나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도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이 영성신학과 신비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전혀 비 영성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내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 행위들은 내게 좌절을 주지요. 좌절은 분노를 낳습니다. 그 절망스런 분노는 그냥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전달하는 의식을 치러야 그 꼬리를 감춥니다. 그 후 곤혹스러운 절망감으로 며칠을 견뎌내야 겨우 눈비비고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참 비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내 속에 있는 상극이 행동으로 표출되었을 때 겪는 좌절은 내게 곧 사람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난 절망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절망이 꼭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정말 신중하게 절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바라보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기도 합니다. 절망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보지 못하면 그 골짜기에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눈부신가를 알리 없습니다. 절망의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비로소 십자가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절망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희망이기도 하지요. 나의 절망을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싶습니다. 행여 어둡고 무겁다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그 침침한 절망의 골방에서 언제나 다시 내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 절망의 골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희망은 거짓입니다. 내 마음속에 잉크처럼 번져오는 죄의 파괴성 앞에 절망하지 않고 나는 어떤 희망의 노래도 부를 수 없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절망하여 허락되는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며칠 전 올해 학교에 입학한 큰 녀석을 위해 내 공부방 한 구석을 비워낸 일이 있습니다. 책상 앞에 꽂힌 내 책을 다 내리고 책상 위를 몇 번의 걸레질로 닦아 냈습니다. 네 개의 책상 서랍 중 두 개를 그 녀석을 위해 깨끗이 비웠습니다.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나 아닌 누구를 위해 내 한 부분을 비워내는 것은 참 오랜 만의 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부교역자의 생활 속에 한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마흔이 넘어선 나를 정리하고, 닦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목회는 여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삐꺽거리는 사역지와 많은 사람들과의 부대낌, 메케한 보일러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골목을 걷는 듯한 답답함입니다. 부딪치는 현실보다 더 큰 하늘이 마음에 담겨있어야 하루하루를 품고 살아갈 텐데, 작은 일에도 쉬 상하는 마음은 좁은 인간성일까, 신앙의 허약함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내 소중한 것을 비우는 일만이 나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며 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지 않고 내가 희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비워내는 이 비움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난 절망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절망이 꼭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정말 신중하게 절망한다는 것은 희망을 바라보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기도 합니다. 절망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보지 못하면 그 골짜기에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눈부신가를 알리 없습니다. 절망의 한 가운데 서 있을 때 비로소 십자가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절망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희망이기도 하지요. 나의 절망을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싶습니다. 행여 어둡고 무겁다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그 침침한 절망의 골방에서 언제나 다시 내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 절망의 골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희망은 거짓입니다. 내 마음속에 잉크처럼 번져오는 죄의 파괴성 앞에 절망하지 않고 나는 어떤 희망의 노래도 부를 수 없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절망하여 허락되는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며칠 전 올해 학교에 입학한 큰 녀석을 위해 내 공부방 한 구석을 비워낸 일이 있습니다. 책상 앞에 꽂힌 내 책을 다 내리고 책상 위를 몇 번의 걸레질로 닦아 냈습니다. 네 개의 책상 서랍 중 두 개를 그 녀석을 위해 깨끗이 비웠습니다.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나 아닌 누구를 위해 내 한 부분을 비워내는 것은 참 오랜 만의 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부교역자의 생활 속에 한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마흔이 넘어선 나를 정리하고, 닦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목회는 여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삐꺽거리는 사역지와 많은 사람들과의 부대낌, 메케한 보일러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골목을 걷는 듯한 답답함입니다. 부딪치는 현실보다 더 큰 하늘이 마음에 담겨있어야 하루하루를 품고 살아갈 텐데, 작은 일에도 쉬 상하는 마음은 좁은 인간성일까, 신앙의 허약함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내 소중한 것을 비우는 일만이 나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며 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지 않고 내가 희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비워내는 이 비움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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